| 한자 | 崔炳鎬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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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서로 군정서 헌병대원|참의부원|일본 경찰 처단 시도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수학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8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4월 |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4월 9일 |
| 출생지 | 강원도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통화현 |
| 학교|수학지 | 길림성 통화현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길림성 집안현 |
| 활동지 | 하얼빈 |
일제 강점기 만주·노령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병호의 이명은 병호(炳浩)였다. 부모를 따라 어려서부터 만주에 건너가 통화현(通化縣)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최병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전전하면서 동지를 찾아다니다가 왕청문(旺淸門) 영안(寧安)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봄에 김만수(金萬秀)·유기동(柳基東)등과 함께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에 입대하여 헌병대원이 되었다.
이후 최병호는 1923년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다. 이어 1924년 4월 하얼빈(哈爾濱) 일본 총영사관 순사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와 형사부장 송도(松島) 등이 독립투사들을 함부로 해친다는 정보를 듣고 이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김만수(金萬秀)·유기동(柳基東)과 함께 협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6일 하얼빈 18도가(18道街) 평강리(平康里)의 중국여관 동발잔(同發棧)에서 계획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포위당했다.
그날 밤 12시에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던 국길(國吉)은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며, 동 여관이 벽돌집이어서 이들을 쉽사리 체포할 수 없게 된 일본 경찰은 8일 오후까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에 중국 측에 강권하여 중국군 2백여명의 증원을 받아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일본인의 앞에 항복하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절대 불응하였다. 일본 경찰은 동일 오후 1시경에 폭탄 10개를 투척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260발의 탄환을 퍼부어 잔인하게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최병호를 비롯한 김만수(金萬秀)·유기동(柳基東)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최병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