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한자 曺奉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정치인
성별
대표경력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농림부 장관|국회의원|국회 부의장
출생 시기/일시 1899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활동 시기/일시 1958년
몰년 시기/일시 1959년
추모 시기/일시 2011년
출생지 경기도 강화군
학교|수학지 경기도 강화군
학교|수학지 일본동경
학교|수학지 일본동경
학교|수학지 모스크바
활동지 경성
활동지 경성
활동지 인천
활동지 서울
활동지 서울
활동지 서울
묘소 서울 중랑구 망우산
정의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치가.

개설

조봉암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호는 죽산(竹山)이다. 1899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의 빈농 집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 참가, 이후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1959년 11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2011년 1월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신원이 복권되었다.

활동 사항

조봉암은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강화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강화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가했다가 1년 동안 투옥되었다. 이후 출옥되어 서울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정칙(正則)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중앙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던 가운데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계열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이후 여기에서 활동하다가 단체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조봉암은 조선 노동 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동 운동을 전개했다.

조봉암은 1922년 웨르흐네스크의 고려 공산당 회의에 참가했다. 조선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통합대회 결렬 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 대회에 보고하기도 했다. 1924년 모스크바 동방 지도자 공산대학 단기 과정을 이수했다. 그 뒤 귀국하여 신사상 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 활동했다. 이들 단체가 통합된 화요회에서 설립 주체로 활동했다.

1925년 조봉암은 조선 공산당과 고려공산 청년회 조직에 참여했다. 조선 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했다. 1926년 제2차 조선 공산당을 조직했다. 이후 5월 만주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을 조직, 책임 비서가 되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에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도 활동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으로 제2차 조선 공산당 조직이 일본 경찰에 의해 해체되자, 제3차 조선 공산당 ML당 조직에 참여했다. 이후 1928년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국1당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중국 공산당에 소속, 활동했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 영사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 동안 수형 생활을 했다. 이후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결혼했다. 그 뒤 인천에서 은거했고, 일본 경찰의 주요 시찰 인물로 파악되어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5년 2월 일본 헌병에 의해 검거, 다시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수형 생활에서 풀려났다.

해방 이후 조봉암은 건국 준비 위원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6년 사회주의 계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활약했다. 1946년 5월에는 박헌영(朴憲永)의 노선을 공개서한을 통해 비판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 생활 보장’을 내걸고 노동 계급의 독재, 자본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중도 통합 노선을 주장하면서 조선 공산당과 결별했다.

조봉암은 같은 해 8월 이후 미군정의 좌우합작을 지지, 협력했다.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을 맡기도 했다. 그 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았다. 특히 농림부 장관 때는 농지개혁을 적극 추진했다. 1949년 농림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관사 수리비를 농림부 예산을 전용하였다가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그 책임을 진 것이다. 1950년 조봉암은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차점으로 낙선되었다.

1956년 11월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혁신정치와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인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출범했다.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는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 후보로 하면서,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1957년 진보당을 창당했고 위원장에 선임되어 195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했다. 1958년 1월 간첩죄 및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진보당원 16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1959년 11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1992년 10월 국회의원 86명의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이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 탄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였고, 신원이 복권되었다.

저술 및 작품

『우리의 당면과업』『우리는 왜 개헌을 반대했나』

『공산주의 모순발견』『우리가 나아갈 길』

참고문헌
  • 박태균, 『조봉암 연구』(창작과비평사, 1995.)
  • 정태영·오유석·권대복 공편,『죽산 조봉암 전집』 1-6 (세명서관, 1999)
  • 서중석,『조봉암과 1950년대』 상·하 (역사비평사, 199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 (www.history.go.kr)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www.jinsil.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관련항목
관련 웹사이트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