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鴻來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을사오적 처단|동학당|정의단|북로 군정서|참의부 |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4월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회령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만주 |
| 활동지 | 길림성 왕청현 |
| 활동지 |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 |
| 활동지 | 집안현 |
| 활동지 | 하얼빈 |
이홍래는 만주로 망명하여 1910년 동학당(東學黨)을 조직하였다. 1918년 정신(鄭信)외 1명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대종교도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정의단(正義團)에 가입하여, 기관지 『일민보(一民報)』를 간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같은 해 8월 김좌진(金佐鎭)이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자 이홍래는 이에 가입하여 모연국장(募捐局長)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3년 김승학(金承學)· 이유필(李裕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홍래는 1888년(고종 25)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태어났다.
이홍래는 대한제국 말기에 민영환(閔泳煥)의 휘하에서 총순(摠巡)으로 근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인하여 민영환이 자결하자 사직한 후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1월 이홍래는 김동필(金東弼)·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을사 오적(乙巳五賊)의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계획을 실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각자 5적을 맡아 암살하기로 하였다. 이 때 이홍래는 강원상(康元相)과 함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암살하기로 하고, 권중현이 탄 인력거를 습격하였으나 호위하던 일본군인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이홍래는 이후 만주로 망명해 1910년 동학당(東學黨)을 조직하였다. 1918년에는 정신(鄭信) 외 1명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이홍래는 정의단(正義團)에 가입하여 간도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기관지 『일민보(一民報)』를 발행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같은 해 8월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 등이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제4중대장 겸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서 군자금 모금과 일제의 기관 파괴 활동을 하였다. 1921년 9월 부하들을 간도 지역에 파견해 태평양 회의에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4월 강기성(姜基成)과 함께 하얼빈도외17도구(哈爾濱道外十七道溝)에서 밀정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강기성(姜基成)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5년 4월 24일 이홍래는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및 폭발물 취체규칙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받고, 경성 복심 법원에 공소하였는데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