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豆滿江 사람들 |
|---|---|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다큐멘터리 |
|---|---|
| 양식 | 르포다큐멘터리. |
| 감독 | 신동환|조천현(VJ) |
| 공연시간 | 60분 |
| 창작|발표 시기/일시 | 2000년 11월 26일 |
| 초연|시연장 | 서울 |
| 촬영지 | 두만강 일대 |
남북 정상 회담 이후 중국 내 두만강 변의 한인[조선족] 마을과 탈북 주민들의 삶의 변화된 모습을 밀착 취재한 르포 다큐멘터리.
1999년 가을, 눈 쌓인 백두산. 산자락의 명소인 ‘옥녀 늪’ 인근의 백두산 21번째 조중 국경비 앞에 두만강의 발원지가 있다. 발원지 인근의 김일성 낚시터는 북한의 제1두만강유적지이다.
길림성(吉林省) 용정시(龍井市) 삼합진(三合鎭) 승리촌(勝利村). 탈곡하는 농민들. 북한회령(會寧)과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회령에 친척이 있는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사정이 자급자족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한다.
회령시 간평 마을과 신전 마을. 집집마다 지붕에 말린 먹을 거리와 강가 아이들의 노는 장면에서 식량난의 고통은 없어 보인다. 1997년 극심한 수해를 입었던 북한주민들은 식량난에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야 했다. 2, 3년 전 탈북 꽃제비들이 도강했을 때 당시 이들을 구해준 것은 한인[조선족] 마을 사람들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도문(圖們) 양수진(凉水鎭) 마을의 노인도 충북 옥천에서 왔다가 북의 여성과 결혼했다. 북한의 재난 때 북한에 가서 처남을 구휼하기도 했다. 세계가 북한의 사정에 관심을 두기 전 이미 한인[조선족]들은 북한구제의 선두에 나서고 있었다. “한집안이나 다름없었다.”는 주민의 말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살아야 했던 이들의 100년 세월이 절절하다.
두만강개산둔진(開山屯鎭)에서 한인[조선족] 형 집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 동생이나 화룡진(和龍鎭) 숭선진(崇善鎭)에서 일하는 탈북자 최씨. 이들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 식량난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을 벌기위해 두만강을 무시로 넘나들고 있다.
취재진을 봐도 개의치 않는 북한군 병사들의 모습. 몇 년 전엔 볼 수 없는 일이다. 긴장이 완화된 국경수비군대의 모습. 그물로 고기도 잡고 취재진과 대화도 하는 모습에서 변화의 모습을 감지할 수 있다. 빨래하는 여인의 비누에서 ‘생필품의 보급’을, 고기를 구워먹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굶주림’은 없어 보인다.
두만강 변에서 작은 희망을 찾는다. 지붕마다 널려있는 옥수수를 보면서 이번 겨울엔 배고픔은 없으리란 기대가 든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이다. 한국과 각국의 지원에 의한 식량 해결이 아니라 북한 내 자급자족의 계획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위성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한인[조선족]가구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 삼합진 승지촌의 주민들은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해 필요성과 관심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남쪽이 북쪽을 많이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친다. 그래서 한민족이 하루빨리 통일되는 것이 좋겠다고.
그 자리에서 도도히 민족을 품어 안았던 것처럼 두만강변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