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族 삶의 現場을 記錄하는 延邊 撮影家 協會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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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현대/현대 |
| 단체 | 연변 촬영가 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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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9년 3월 13일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6년 5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8년 10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12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4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4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9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8년 12월 |
| 설립시기/일시 | 길림성 연변 |
| 개칭시기/일시 |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의 촬영가 협회로서 한인[조선족]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삶의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단체.
1959년 3월 13일 연변 사진계는 연변 문학 예술계 연합회의 제의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중국 촬영가 협회의 비준과 동의를 거쳐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 제1차 대표 대회를 거행하고 중국 촬영가협회 연변 분회의 출범을 만천하에 알렸다. 동시에 김진호를 주석으로 한 제1기 주석단을 결성하면서 중국 조선족 사진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 놓았다. 그 이전인 1952년 김진호는 이미 중국 촬영가 협회 상무이사로, 중국 촬영가협회 동북분회 설립 소조의 책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강찬혁, 김홍국, 채규익이 중국 촬영가 협회 회원으로 되면서 중국 조선족 사진계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서 한껏 자랑을 떨치었다. 1959년 9월 연길 노동자 문화궁에서 제1차 연변 사진 예술 전시회인 『공화국 창건 10주년 사진,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62년 9월 연길시 제2소학교 예당에서 제2차 연변 사진 예술 전시회를, 1963년 9월 연변 노동자 문화궁에서 제3차 연변 사진 예술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출품작은 전부 흑백사진이었지만 최고 수준의 사진 전시로 연변을 벗어나 매체를 통하여 그 매력을 과시하였다. 이는 동시에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차원이 가장 높은 사진전시회였으며 중국 내에서도 명망이 높아 중국 조선족의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거동이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는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주년에 즈음하여 사상 첫 사진 작품집을 출간하였다. 사진작품집은 중국 조선족이 민주 혁명, 항일 투쟁, 조국 해방 전쟁 등 활발한 혁명 연대에 위훈을 떨친 조선족 용사들의 불멸의 영상을 담았으며 자치주창립 10년 이래 연변의 풍토 인정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예술은 예술사상 가장 연소한 예술이라고 한다. 1839년 다게레오 타입의 은반사진술의 발명으로 사진은 현실생활을 반영하고 자연현상을 기록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으로 되었고, 나아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 되었다. 은반사진술의 역사가 200년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변촬영가협회의 나이가 55년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연변의 촬영 역사는 1948년 발표된 신문보도사진이 첫 시작을 고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유리에 할로겐 은을 접착시켜 노출 후의 현상과 정착액으로 영상을 잡던 사진 역사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1948년 기자 두남이 찍은 시리즈 사진 7점이 실린 것이 연변에서 광복 후 발표된 첫 신문 사진이다. 1949년 연변 사진의 선구자 김진호가 연길시에서 만여 명 청년들이 참여한 5.4 청년절 맞이 기념행사를 렌즈에 담은것이 『동북조선인민보』에 실렸다.
1954년 『동북조선인민보』 3면에 『조국의 변강, 연변의 아름다운 풍경』이란 제목으로 김진호가 찍은 백두산천지와 백두산폭포의 사진이 실렸다. 이는 연변 사진역사상 첫 예술사진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사진보도와 사진창작활동으로 기록을 남긴 이는 김진호와 김흥국이었다. 당시 신문 보도 사진들은 토지 개혁, 조선 전쟁, 조국 건설에서 한인[조선족]의 불명의 흔적을 뚜렷하게 기록하여 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5년 1월 『연변 일보』에는 『인민 미술 촬영』 특집이 설치되어 비정기적으로 사진들을 게재하였다. 당시 이는 사진가들의 유일한 전시공간이었다.
1966년 5월 연변 사진계도 문화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암흑기를 맞았다. 1969년 10월 연변 촬영사업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흥국 사진기자가 ˂˂특무˃˃로 몰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연변사진은 1978년까지 개념화, 도식화의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살벌한 와중에도 1973년 채규익의 『널뛰기』, 최정록의 『근무를 마치고』, 박동춘의 『다망한 겨울』 그리고 1976년 최정록의 『공사의 명절』 등 이런 예술사진들이 연변 사진사의 공백을 메워 주어기도 하였다.
1978년 10월 10년 동란의 해빙기를 맞아 연변의 촬영분야도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다양한 형식과 풍격의 사진작품이 우후죽순 마냥 용솟음치면서 새로운 발전국면을 형성하였다. 중국 촬영가협회 연변 분회는 제1기 대표 대회 제2차 회의를 거행하여 강찬혁을 주석으로 전창식을 부주석겸 비서장으로 하는 제2기 주석단을 출범시켰다. 1980년 전창식의 사진작품 『춤』이 네덜란드국제사진전시회에 입선되었다. 당시 이는 흔치 않는 업적으로서 중국 촬영계를 흥분시켰다.
1982년 12월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 제2차 대표 대회가 거행되면서 전창식을 주석으로 한 제3기 주석단이 결성 되었다. 중국에서 시장경제체제가 정립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중국 조선족의 촬영분야도 새로운 진흥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1982년 자치주창립 30주년을 맞으면서 연변 촬영가 사진 작품전이 중국의 수도 북경의 북해공원에서 펼쳐지면서 동시에 연변의 사진작가 41명의 촬영 작품을 수록한 대형화집 『연변』이 출간되었다. 이 화첩은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위생, 체육 등 제반 분야를 진실한 시각으로 기록하고 재현하여 전 사회적인 긍정과 절찬을 받았다.
1989년 4월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는 제3차대표대회를 거행, 전창식이 주석으로 연임하고 남룡해가 부주석 겸 비서장으로 하는 새로운 주석단을 결성하였다. 이 시기에 연변의 촬영사업은 새로운 발전기회가 도래되면서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1989년 10월 강찬혁, 황범송, 최정록이 사진생애 30년을 기리는 중국 촬영가 협회 영예증서를 수여받았다. 1991년 전창식, 안충원의 사진작품전 『조선기행』이 장춘에서 펼쳐졌다. 1992년 최주범 사진작품전도 장춘에서 거행되었다. 1994년 5월과 2001년 12월 남룡해와 김광영이 각각 한국사진작가협회 명예회원 칭호를 흭득하였다.
1997년 4월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는 제4차대표대회를 거행, 남룡해를 주석으로 하는 제4기 지도부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협회의 명칭도 연변촬영가협회로 정식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새 출발을 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1998년 4월 남룡해가 중국 촬영가 협회 『덕예겸비』우수사진작가칭호를 수여받고 전창식의 사진전시회가 연변박물관에서 펼쳐지였다. 2002년 최주범, 한영, 김광영, 김홍석, 조종철, 오인철, 리종걸, 리충, 허선행, 방태호 등이 『사진10걸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12월 남룡해가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의 신분으로 중국 촬영가 협회 제6차 대표대회에 출석하고 2007년 이종걸이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었다. 현재 연변촬영가협회에는 회원이 총 445명, 그중 중국 촬영가 협회 회원이 42명으로서 중국 내 소수민족 촬영계에서 국가급 회원이 가장 많은 협회가 되었다.
2003년 9월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는 제5차 대표대회를 거행, 한영을 주석으로 류병, 허선행, 리충, 리종걸, 오인철, 김광영, 김홍석, 최주범을 부주석으로 김광영을 비서장으로 한 제5기주석단을 출범시키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과업을 출중하게 수행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2004년 동근용의 작품 『렬화속의 금강』이 동북 3성 사진작품평의에서 1등상을, 길림성 제17차 사진예술콩쿠르에서 은파의 작품 『붉에 물든 장백산』이 금상을 수상했다. 허선행의 작품 『가을』, 『불을 훔치는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하쎌 국제사진전에 전시되고 『아침에 겨울강을 건너다』는 슬로벤스코 국제사진전에 입선하였다. 2004년 김광영의 사진 2점이 『한국 2004년 사진년감』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2006년과 2009년 허성이 두 차례에 거쳐 『중국우수사진기자 100인』에 선정되었다.
2008년 12월 중국 촬영가 협회 연변 분회는 연변촬영가협회로 정식 개칭하였다. 연변촬영가협회는 뒤이어 제6차 대표대회를 거행, 박철을 주석으로 하고 리종걸을 상무부주석 겸 비서장으로 하고 류병, 최주범, 김광영, 김홍석, 허선행, 박경호, 차광범, 두유지, 황홍을 부주석으로 한 제6기주석단을 출범시켰다.
2014년 1월 26일, 연변촬영가협회가 주최한 《빙설세계·연길풍정》 촬영 작품 전시회가 연길시에서 개최되었다. 지난해 12월 15일에 시작되어 40여 일간 진행된 《빙설세계·연길풍정》 촬영작품 공모전에는 580폭의 촬영 작품들이 응모하였는데 그중 미적 감각과 예술작품성이 뛰어난 100폭의 촬영작품이 이날 전시대에 올랐다. 이번 공모에서 총 73폭의 작품들이 입상했는데 그중에는 1등상 1폭, 2등상 2폭, 3등상 4폭, 우수상 20폭의 촬영 작품이 포함되었다.
전시장을 찾은 연변민속촬영가 협회리정영(56세) 여사는 민간촬영가로 활동한지 5년째 되는 전직 교원이다. 올겨울 들어 신체상황이 좋지 않아 빙설축제현장에 나가보지 못했다는 그녀는 동료들의 작품으로나마 축제를 만끽해 보고 싶다며 한달음에 전시장을 찾았다. 리여사는 공모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내비추면서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꼭 겨울풍경을 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연변촬영가협회는 협회설립 55년간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수많은 축제와 행사에 주동적으로 참가하고 역사의 기록자로서 시대적사명감을 안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도 감내하면서 생생한 현장을 그대로 남겨 주었다. 이런 기록들로 해마다 사진촬영전시회를 펼치고 신문, 방송, TV 등 매체들을 통하여 널리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기록역할, 선도역할, 인도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조선족 사진작가들은 지난 55년간 중국이란 이 광활한 대지위에서 자기 특유의 철학적 자질, 높은 촬영 기술, 조선 민족의 남다른 민족적 특성으로 수많은 빛나는 형상을 기록하였다.
1, 귀중한 력사적 순간의 기록자___황범송
저명한 촬영가 황범송은 백두산에만 하여도 300여차 올라 천지사진만 해도 100장 찍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장백산천지』는 국가 교육부, 수리부에서 지정한 《천지표준상》으로서 초중고 교과서에 올랐다 1959년 8월부터 연변을 시찰한 중국의 중앙급 지도자들을 촬영하였는데, 주은래, 주덕, 동필무,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만리, 팽진, 교석, 주용기 등 부총리 이상 지도일군 50여 명을 촬영하여 귀중한 역사자료를 남겼다. 해외 인사들의 촬영에서도 조선김일성 주석, 캄보디아시하누크왕, 네팔아지카리 공산당 총서기 등을 렌즈에 옮겼다.
1983년 8월 11일 아침, 중국의 최고지도자의 백두산 등산을 찍으러 갈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황범송은 미리 해발 2,600m의 산정에서 대기하였다. 9시가 좀 지나자 100여m되는 곳에 승용차들이 정거하더니 등소평이 승용차에서 내렸다. 새하얀 와이셔츠에 군복바지를 입은 등소평은 조남기의 안내 하에 온건한 걸음으로 올라 오고 있었다. 황범송은 등소평의 신변 2m 거리에 접근해 천지를 배경으로 그의 풍채를 렌즈에 옮겼다. 얼마 후 등소평은 백두산천지를 굽어보고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때 등소평의 뒤를 따르던 조남기가 등소평 동지에 접근하여 백두산 개황을 소개하였다. 황범송은 즉시 그 장면을 얼른 렌즈에 옮겼다. 이 사진은 전국20여 개의 간행물에 발표되었고 후에는 『등소평선문집』에 수록되었다.
황범송 촬영가는 이후 1997년에 화첩 『연변조선족력사』, 『장백산유람』 등 6부를 출간한데 이어 2007년에는 화첩 『장덕강』,『조남기』,『리덕수』,『주덕해』 등 6부 출간하였다. 그는 현재 중국 촬영가 협회 회원으로서 연변촬영가협회 고문이기도 하다.
2, 장정길을 다시 걸은 리완빈 촬영가
지난 세기 30년대 중기 중국의 대지 위에서 2만 5,000리 장정으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거창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후 그 장정 길을 다시 걷는 조선족 사나이가 있어서 다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가족과 함께 그 옛날 중국공농홍군이 걸은 2만 5천리 장정길을 각 방면군의 노정으로 다시 한번 걸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그가 바로 올해 47세인 리완빈 촬영가이다.
길림성방주무역유한화사에 근무하는 리완빈은 연변촬영가협회 회원, 길림성연변태권도협회 회원, 세계태권도련맹 공인 6단의 유단자로서 1961년에 왕청진에서 출생하였다. 2004년 10월 10일 그는 남다른 각오를 지니고 아들과 함께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다시 걸어보는 장정길』 에 나섰다. 리완빈은 아들 리휘와 함께 장정의 첫걸음을 시작하여 일년 후인 2005년 10월 19일에 제1방면군이 걸었던 장정길을 완주하였고 그해 11월 19일에 다시 홀몸으로 제2방면군이 걸었던 장정길에 올라 2006년 10월 22일에 완주하였다. 2006년 11월 16일에 아내와 함께 홍군 25군의 장정길에 올라 2007년 9월 16일에 완주하고서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리완빈은 가파로운 설산과 허벅지까지 빠지는 초지를 지나면서 가냘픈 아내가 군소리 없이 따라주고, 길가에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무명 홍군의 무덤 곁에서도 자기 집 안방같이 편히 잠자는 아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모든 소지품과 옷 그리고 말잔등에 걸친 짐주머니에까지 모두 『다시 걸어보는 장정길』이란 글을 써놓아 길에서 만난 많은 주민들과 길손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주었으며 그에게 면비로 숙박도 제공해주고 음료수와 과일들을 안겨주기도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직접 길안내에 나서서 몇 십리길을 인도해주기도 하더란다. 그들의 방조와 따뜻한 배려, 관심이 없었더라면 이번 장정길이 훨씬 더 힘들었을 거라고 하면서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장정길을 걸으면서 가장 큰 고난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물음에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였다고 대답한다. 어느날 갑자기 의지를 상실할 까 두려웠다는 그의 말에서 장정길이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알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떳떳한 모습으로 다시금 사회에 나서려는 마음을 굳혔더니 그것 역시 별거 아니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2007년 11월 16일, 다시 아내와 함께 제4방면 홍군의 마지막 장정 길을 다그치어 성공한 후 『다시 걸어보는 장정길』이 나에게 새로운 인생길을 찾아주었다고 말한다.
3, 대홍수 앞에 나선 촬영가들의 풍채
2010년 여름 연변지역에는 사살 유례없는 대홍수가 발생하였다. 이 대자연 재해는 연변 인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연변촬영가협회 주석 박철, 부주석 최주범, 상무이사 오준길 등 촬영가들은 7월 28일 연변에 대홍수가 발생한 바로 이튿날부터 홍수재해현장으로 출발하였다. 평소 차로 몇 분이면 당도할 수 있었던 14리길을 교통이 끊겨 돌아가다보니 140리도 더 달렸다. 앞길이 끊겨 차를 뒤로 몇 바퀴 굴리는데 정차했던 자리가 떨어져나가 손에 땀을 쥐기도 하였다. 목숨 걸고 찾아간 곳들은 페허가 되어 있었다. 있는 정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그들은 진흙탕 속을 가르며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 렌즈를 들이 댔다. 멀리 전반정경을 촬영하기 위해 그들은 높은 산으로 올라야 했다. 전기도 물도 먹을 거리도 끊긴 고장에서 그들은 쓰린 창자를 어루만지며 의지로 버텨야 했다. 8월 염천에 죽은 가축들이 썩어가는 고약한 냄새에 숨조차 쉴수 없어 현기증으로 그만 풀썩 물앉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도 손맥이 풀려 울고 앉아있는 재난민들을 만나면 정부가 있고 공산당이 있는 한 살 길은 있을 거라며 선전고동사업도 하였다. 그들이 재해구조현장에서 찍어낸 사진작품들은 매체를 타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전반 홍수대처사업의 역도를 강화하는데 현실적 근거를 제공하였고 사회 여러 분야의 지원의 손길을 모으는데 직접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번 대홍수가 닥친 이후 부터 재해복구사업이 기본상 마무리단계에 진입한 11월 중순까지 재해가 극심한 연변의 7개 향진의 12개 촌을 돌면서 각자 7,000장에서 8,000장에 달하는 사진들을 촬영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홍수와의 박투, 재해후의 자체구조, 새로운 고향건설, 사면팔방의 지원 등 4개 부분으로 전시되었는데 그토록 진실하고 감동적이었다.
사진작품을 통해 자연재해의 참혹성, 생명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연변인민들의 정신풍모, 당과 정부의 인민에 대한 지극한 관심 배려, 한곳에 고난이 있으면 팔방에서 도와나서는 고귀한 기풍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한 연변 촬영가들의 헌신적인 희생정신과 고상한 풍모를 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촬영기를 무기로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고생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한 3명 촬영가, 그들이야말로 홍수와의 전장의 손색없는 무명공신들이었다.
2010년11월 27일, 연길 국제전시예술센터에서 개막되어 7일간 전시되는 연변홍수대처사업 촬영작품 사진전에서는 연변촬영가협회 3명 촬영가들이 4개월 간에 걸쳐 홍수전장의 전반 과정을 담은 수만폭의 작품중 가장 진실하고 감동적인 150폭 작품을 선정하여 전시하고 있다.
4, 풍격이 독특한 자연예술사진작가---이종걸
2013년 대한민국 국제포토페스티벌에서 중국의 조선족 사진 작가 이종걸의 '차간어부'가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인기를 끌었다. 2013년 12월 11일 서울 인사동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2013년 대한민국 국제포토페스티벌(조직위원장 은효진)의 첫 전시에는 중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미국 등 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숙지광(북경영화대학 교수), 이종걸(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 등 유명작가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다양한 주제로 개성 있는 작업을 전개하는 한국누드사진이론을 정립한 은효진작가, 대한민국 사진대전 초대작가인 김완기 작가, 고원재한국리얼다큐사진가회 초대회장 등 80여 명의 작가들이 참가해서 자존심을 건 사진축제를 펼쳤다. 이종걸 사진작가는 이처럼 자연예술사진작가로 중국 촬영계는 물론이고 지구촌의 사진 작가들 가운데 널리 알려져 있다.
이종걸은 누드예술사진작가로도 유명하다. 2006년 7월 27일 부터 서울 충무로포토랜드 갤러리에서는 이종걸 누드사진초대전 '꿈의 여울3'이 펼쳐졌다. 이종걸 작가는 당시 중국연변촬영가협회 상무 부주석이었다. 그는 지난 1988년 천진 남개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면서부터 '인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누드사진작품을 제작해 왔다고 한다.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운 누드의 피사체를 사진예술로 표현하고자 많은 노력과 실패를 거듭했다"는 작가는 폐쇄적 문화에서 개방적문화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이종걸 작가는 1989년 제1차 중국 청년작가 콩쿠르에서 '강자의 길' 수상을 계기로 시작한 사진작가의 길을 걸으며 2002년 누드사진집 '꿈의 여울1'을 출판하며 연길에서 누드사진개인전을 펼쳐 누드사진작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종걸은 2005년 제1회 연변 국제사진문화주간을 총기획하고 집행위원회 부주임을 맡아 연변의 사진문화 발전에도 앞장서고 있다.
중국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 연변촬영가협회상무부주석 이종걸 작가의 개인전 '자연의 정취'가 2008년 11월 5일부터 용산녹사평역 전시관에서 펼쳐지였다. 이종걸 작가의 사진작업은 평소에는 주로 우리민족의 성산 백두산과 한민족의 삶의 모습을 기록하며 한인[조선족]의 뿌리를 찾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작가로서 성망이 높다는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