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族 口演 藝術, 唱談의 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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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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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6년 12월 2일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0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0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3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5년 12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한인[조선족]의 구연예술 장르.
구연예술(口演藝術)은 언어로 기존에 있었던 이야기 혹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들려주는 활동으로써 내용 속 인물의 감정이나 생각 그리고 이야기 줄거리를 표정, 감정, 소리, 몸짓으로 현실감 있게 표현하는 예술이라 하겠다. 언어의 예술이라는 용이성 때문에 구연예술은 타 예술 형식보다 인간의 삶과 좀 더 밀접한 연관을 두고 발전되어 왔다. 이런 맥락에서 한인(조선족) 구연 예술은 조선족의 이민 역사와 함께 이주민의 기쁨과 슬픔을 반영하여 기록하고 있다.
중국 한인[조선족] 집거지에서 볼 수 있는 구연 공연에 관한 첫 문헌적 기록은 1936년 12월 2일 『간도신문』에 ‘新富劇場에서 朝鮮唯一劇團의 공연’이라고 실렸던 광고로 보인다. 모두 5개의 극작품이 공연되었는데, 사랑에 관한 애상적인 단막극 등 짧은 형태의 연극 작품들이었다. 또 하나의 기록은 1930년대 판소리 명창 이동백이 30여 명의 판소리 가수들을 거느리고 동북 3성을 순회 공연한 내용이다. 당시 동북 3성이 일제 통치하에 있었기에 정식 공연장이 아닌 술집이나 민간 놀이마당 등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창 중 분위기 조성을 위해 가끔 해학적인 풍자나 사설을 곁들여 공연하였다고 한다. 이외 한민족의 전통 구연예술인 재담, 만담에 대한 기록은 이주민 1세대들을 통해 구비(口碑) 전승되어 온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이주민 1세대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렸을 때 봄이 되면 동네 주민들이 모여 산천제를 지내고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으면 저마다 나와 장기 자랑을 하는데, 춤과 노래, 만담 그리고 2인으로 이루어진 즉흥적인 재담 등을 했다. 재담 중간에는 타령 혹은 춘향가, 심청전 등의 판소리 한가락을 부르기도 했다. 이런 놀이마당은 추석, 단오 등 명절 때뿐만 아니라 학교 졸업식 등에서도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춤, 노래, 만담, 재담 등이 섞인 유희 형태의 표현 방식은 이주민들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일제 통치하에서 대본의 내용, 인원 구성, 장소 등의 제한을 받았던 연극보다 더 쉽게 이주민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고달픈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는 훗날 ‘창담’이라는 예술 형식을 탄생케 하는 모태가 되었고 또 이를 정착시키는 토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한인[조선족]의 역사는 늘 혁명과 더불어 쓰여 왔으며, 구연 예술은 혁명가와 대중들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였다. 한인의 이주는 본래 단순히 농사의 풍작을 위해 중국청나라의 파수꾼들의 눈을 피해 변경을 드나들면서 농사를 지으며 시작되었다.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로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거나 항일 구국을 위해 대거 이주하였다.
무엇보다도 항일 구국은 모든 이주민이 수행해야 할 첫 번째 과제였다. 특히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대중들의 항일 운동을 이끄는 것은 모든 한인 지성인들의 사명이었다. 이런 과업의 수행과정에서 구연 예술 활동은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해 늘 선두 역할을 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평안도 출생으로 1949년 이후 연변예술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치적 박해 속에 생을 마감했던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임만호는 1920년대 항일 선전극으로 화룡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임만호의 선전극은 지성인의 자발적인 혁명 예술 활동이었다. 당시 동북 3성의 조선 의용군 제3지대는 전문적인 선전대를 조직하여 항일 혁명 활동을 펼쳤었다. 당시 많은 선전대의 예술인은 훗날 동북 3성 예술 분야에서 중견 역할을 하였다. 또한 광복 후 선전대 예술인들은 중국 해방군 각 부대에 재편성되면서 해방 전쟁 및 이후의 중국 해방 초기 토지 개혁 등의 정책을 선전하는 데 힘써 왔다. 이는 중국 한인의 구연 예술 활동이 늘 중국 혁명과 공산당 정책 선전 활동과 불가피한 관계로 발전해 왔음을 입증한다. 연변 창담의 탄생도 이런 배경과 연관이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창담(唱談)은 1970년대에 등장하여 동북 3성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큰 반응을 일으킨 예술 형식이다. 1970년대는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큰 파동이 일어났던 문화대혁명의 시기로 불린다. 여느 나라의 역사와 다를 바 없이 정치적 파동에는 꼭 개인의 정치적 야심이 발단된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모택동 부인 강청이 자신의 개인적 정치권력 야망을 이루기 위해 발단되었다. 영화배우 출신인 그녀로서 정치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장악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새로운 기상을 불어 넣는다는 명분으로 진행한 문화혁명운동은 중국의 문화예술계 전반에 대한 정리 정돈을 목적으로 전 국민에 극좌(極左)적인 정치사상 교육했던 혼란 시기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사구’(四旧-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사상의 복귀를 경계하고 중국 공산당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욕구는 문화예술 형식에서 전통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발전적으로 전승해야 하며, 중국 공산당의 영도 하에 당대 인민의 행복한 삶을 반영해야 하는 취지로 표출되었다. 강청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그러하여 그녀의 주도하에 등장한 것이 이른바 ‘혁명 본보기극’이다. 이 극은 중국 경극의 형식을 빌려 당과 영수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등장 초기 '혁명본보기극'은 형식과 내용이 참신하여 전문가와 대중들의 일정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을 얻어 강청은 모든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를 따라 하고 전국에서 '혁명본보기극'만 상영, 관람하기를 강요하였다. 이외의 모든 예술형식은 금기시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변방지역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런 정치적 과제를 수용할 것인가는 당시 한인[조선족] 예술가들의 고민거리였다.
1973년 연변 군중 예술관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최수봉, 김남호, 허보선, 김필준 등 구연예술 전문가들이 중국북경, 상해, 천진, 절강성 등의 지역들에 파견되어 한족 집거지의 지방 구연 음악예술을 고찰하고 학습하였다. 이후 이들 파견단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왕청대대 마을에 다녀가 직접 현장 지도를 하면서 실험적으로 ‘혁명 본보기극’인 「두견산(杜鵑山)」과 「업현을 다스린 서문표」 중 일부 단락을 선택하여 창사(唱詞)를 집필하고 민족의 가락과 장단을 더해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다.
1973년 6월 ‘혁명본보기극’ 작품 중의 하나인 경극 「룡강송(龍江頌)」을 한인[조선족] 사회에 보급하고자 정부 기관의 주도하에 김진, 최수봉, 진용하, 허원식, 정준갑, 고자성 등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전담팀을 조직하여 창작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회에서 경극의 특징을 고려하여 서술성이 강한 조선족의 판소리와 접목하여 창극으로 만드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73년 11월 허원식의 예술지도하에 경극 「룡강송」 중 가장 중요한 파트인 8장을 개편하여 연변 문예 창작회의에 참가한 전문가들께 선보였다. 그 후 길림성 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의 관계자들 그리고 연길시 장백향 신풍촌 마을 주민들에게 공연하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보완 수정을 거쳐 1975년 12월 「룡강송」 전 작품을 공식적인 공연 무대에 올렸다.
경극 「룡강송」을 창담 형식으로 전부 개편하고 완성되기까지는 거의 2년이 걸렸다. 경극의 구조와 형식에 판소리의 노랫가락을 밑바탕으로 경극의 판식(板式-경극의 여러 종류의 장단에 대한 총칭)과 20여 종에 가까운 민족의 장단을 사용하였다. 작품에서 각각의 다른 민족의 장단이 서로 어울려져 머리판(頭板), 흐름판(散板), 느림판(慢板) 등으로 명명된 새로운 장단도 선보였다.
1975년 이후 위의 작품들을 계기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경극을 개편한 작품뿐만 아니라 「양돈어머니」, 「유람기」, 「약초 캐는 처녀들」, 「길타령」, 「웃음꽃타령」 등 보통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 기쁨을 반영한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었다.
이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창담은 동북 3성에 널리 보급되었고, 전국 공연 무대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1976년 전국 구연 예술 경연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중국의 『광명일보』, 『인민일보』 등 주요 관영 언론 매체에서 ‘연변 창담’이 새로운 민족적 음악 형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창담은 포괄적으로 ‘연변 창담’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좀 더 세분화하면 다음의 4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연변창담
‘창사(唱詞)’라고도 일컫는 창담의 가사는 산문체와 운문체를 결합하여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표현이 자유롭다. 또한 작품에서 설(말)이 창(노래)보다 더 많은 비중을 갖는다.
(2) 평고(平鼓) 엮음
노래를 위주로 일인다역의 형식으로 창과 설(해설과 대화), 무용이 결합되어 있다. 연기자는 평고를 치며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사는 일정한 운율이 있어야 하고 독창과 합창을 결합한다.
(3) 북타령
북장단에 맞춰 창으로 이야기를 엮어 내려가는 형식이다. 「북타령」의 전신은 「북병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한 민족 「장타령」, 「풀무타령」, 「장단타령」 등의 음악을 밑바탕으로 구상한 것이다.
(4) 노래엮음
노래를 위주로 이야기를 엮어 내려가는 형식이다. 이야기 줄거리에 등장하는 인물에 따라 1인 혹은 2인이 여러 인물의 역할을 담당하고, 다양한 성우, 표정, 액션 등으로 표현한다.
모든 창담은 형식이 어떻든 창사 내용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혁명본보기극'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말과 장단에 맞게 개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연변 창담 「백계연에서의 희사」 1곡의 「영용한 로농자제병」 창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인민해방군 붉은기 휘날리며 남정북전하여 갈제
그 기세 질풍인가 장비군은 벌벌 떨고 전과를 환호하여 인민들은 노래하누나..........(생략)
같은 ˂백계연에서의 희사˃ 11곡의 창사 내용이다.
(창)신호로 달아 놓은 네귀의 등불, 섣달이라 그믐날 밤하늘이 붉게 타네
전우들을 기다리는 내 마음 초조한데 어찌하여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가
이내 가슴 들먹이나 긴요한 이관두에 (말) 저 비밀갱도 굳게 (창) 지키리라
두 번째는 조선족 이주민의 일상생활을 반영한 것이다. 아래는 북타령 「장마당구경」의 창사 내용이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장마당에 쑥 들어가 이쪽저쪽 바라보니 구변좋은 큰 애기
구성진 넉두리에 황소같은 대장부도 애간장이 녹아 난다,
어히여 좋구나 좋네 . 파릇파릇 마늘싹은 국수취미가 제재기요
허여멀쑥 채갑이는 술안주에만 제재기라 이것저것 많은 물건 어느 것부터 사야 하나............(생략)
창사로 볼 수 있는바, 창담이 청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정부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대중들의 일상생활을 반영하고 삶에서 우러나온 한인 이주민들의 낙관적인 천성을 그려내어 듣는 이의 공감을 이룬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담의 등장 배경에 어떠한 정치적 연관과는 별개로 창담의 탄생은 중국 한인[조선족] 예술인들의 삶의 지혜와 예술적 안목을 보여주는 결실이라 하겠다. 이는 이주민 역사이든 민족의 역사이든 민족의 전통을 전승, 발전시킨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