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와 아리랑 오케스트라

한자 中國 朝鮮族 音樂 研究會와 아리랑 오케스트라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단체 조선족 음악연구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에서 199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거주/이주지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하남가 22호
정의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유일한 민족 음악 연구 단체로서 전통 음악 분야 뿐만 아니라 서양 음악까지 아우르는 역량을 갖춘 단체.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2010년 『중국조선족음악문화사』 중문판 출판과 중국 조선족 작곡가 수상 작품 교향 음악회 개최를 통해 한인[조선족] 음악사를 넘어 중국의 전반 음악사에 두 가지 ‘최초’라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56개 민족에서 유일한 민족 음악 연구 단체로서 본 민족의 전통 음악 분야뿐만 아니라 서양 음악까지 아우르는 역량은 국내외 음악 문화계에 그 존재감을 여실히 확인시켜준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1989년 발족한 이래 1993년, 2004년 두 차례 국가 민정부에 등록하여 오늘의 우수한 전국성적인 학술 단체로 발전되기 까지 민족음악연구, 음악인재 발굴과 음악문화교류에 앞장서 왔다.

창립 24년간 활동 사항들을 돌이켜 보면 늘 묵직한 프로그램으로 역량과 영향력을 키워온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전승과 발전을 함께 하여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30여 차례에 달하는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 중국 조선족 음악의 회고와 전망 등 학술 활동을 주최하여 전통 예술에 대한 연구와 발전을 도모하는 탐구 정신과 시대적 감각을 키워 왔다.

1989년에서 1995년까지 개최된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 토론회에서는 안국민의 「우리 민족 음악의 다양화를 위하여」, 오금덕의 「음악 창작에서의 선율 발전과 화성수법에 관하여」, 신호의 「조선족 음악의 다성화에 대한 단상」등 다수의 전통음악에 대한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안국민의 발표는 한반도를 떠나 중국 변방에 이주한 한인 음악인들이 가진 민족의 전통을 고취할 뿐만 아니라 중국 여러 민족 음악의 요소들을 흡수하여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오금덕과 신호의 논문은 음악창작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음악 어법인 화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민족의 음악 전통에 대한 맥을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무게있는 연구논문은 중국 국가급 간행물인 『중국음악』 1989년 제4호에 조선족 음악 전문 칼럼을 개설하고 수록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1995년 북경 조선족 문예 협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조선족 항일 투쟁 음악 연구 토론회에는 북경, 상해, 동북 3성 30여 명의 조선족 음악분야 전문가들이 참석하여, 총 1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항일시기 한인 음악가들의 활동과 역할을 회고하면서 우리가 지녀야 할 민족 운명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확인하고, 민족 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중국 음악 발전에도 기여해야 함을 인식하는 시간이었다. 중국 동북지역의 음악 발전은 조선인의 이주역사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말 중국청나라의 파수꾼 몰래 두만강을 넘어와 불모의 이 땅에 농사를 짓던 초기 이주민들이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맘속에서 부르는 향수가로 달래였다면, 전격적인 음악의 유입은 한반도의 일제 침략을 피해 많은 양심적 애국주의 음악인들이 만주에서 항일 구국을 위해 포교 활동과 신학교설립운동을 하면서이다.

특히 1938년 조직된 ‘조선 의용대’는 모든 애국지사와 음악인들을 단합하여 항일 구국 독립운동에 나섰다. 당시 선전대 대원으로 활약했던 정율성을 포함한 모든 음악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동북지역 각 음악 단체의 기관장, 중견 간부로 배치되었다.

조선족 항일 투쟁 음악 연구 토론회에서는 1949년 건국이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한인 항일 투쟁시기 음악 활동을 연구하고 평가함으로써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인지하고 분명히 하였다.

음악 인재의 발굴과 육성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전통 예술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하는 한편 기존 중국 음악 분야에서 이미 성과를 이룩한 한인[조선족] 음악가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96년도 정준갑 작품 음악회와 작품 연구 토론회 개최를 시작으로 최삼명 음악 작품 연구 토론회, 허원식 음악 작품 연구 토론회, 허원식 선생 타계1주년 추모회, 허세록 타계 1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등을 개최하여 한인[조선족] 음악 역사에 있어서 그들의 선구자적 역할을 인정하고 후세 음악인들에게는 ‘민족 음악 역사를 어떻게 엮어 나가야할 것인가’의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민족 음악인으로서의 자세를 심사숙고하도록 하는 장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 우수가곡 콩쿠르, 우리의 꽃밭-조선족 창작 아동 가요제, 중국 조선족 어린이기악 콩쿠르, 중국조선족청소년음악제 등을 개최하여 민족의 음악 영재들을 발굴하고 나아가 청소년들에게 민족의 음악을 전수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학습장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현재 국내외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송일, 임정, 권길호, 김영철, 변영화 등 많은 음악 인재들도 연구회의 후원을 받으며 육성된 이들이다.

또한 중국 조선족 국제·국내콩쿠르 수상자 음악회, 조선족 아리랑의 봄-음악회 등 연주회를 조직하여 전국 순회 공연을 함으로써 한인[조선족] 음악인들의 기량을 널리 알리는데 힘써 왔다.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20세기 후반, 개혁개방의 심층 발전에 잇따라 다국간의 경제 문화 교류도 빈번하게 되었다. 연구회의 활동도 이런 새로운 시대 흐름에 맞추어 발 빠르게 움직이었다.

75명의 연변 연주가들로 이루어진 연변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에서 조직한 오케스트라이다. 오케스트라는 제10회 한국교향악축제에 참가하였는데, 서울예술의 전당에서 울러 퍼진 「내가 살던 고향은」의 멜로디는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지나온 세월의 민족 슬픔과 희망을 함께 공유하고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메아리가 되었다.

그 후 한국 KBS 교향악단과의 협연, 중한 예술 가곡 교류 음악회, 국제 클라리넷 교학 연주회 등 국제 문화교류 활동을 주최하면서 연구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연변대학, 연변가무단과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 클라리넷 교학 연주회는 국제클라리넷 협회 회장 로버트.스프링(Robert Spring), 전 국제 클라리넷 협회 회장 제라도 이란트 , 클라리넷 연주가 조나단. 코러 등 대가들의 현란한 연주를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다. 또한 중국 클라리넷협회 회장 도순효(陶純孝) 교수를 초빙하여 개설한 마스터 클래스는 연변, 북경, 상해, 심양, 서안, 남경, 길림 등 지역 음악 대학의 클라리넷 음악 학도들의 대잔치였으며 국내, 국제에서 연구회의 입지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가 민족 음악사상, 또 중국 음악사상 첫 번째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결과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모든 활동이 국가의 별도 지원금이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기업 후원 제도가 활성화되지 않은 중국내에서 많은 부분을 연구회 회원들의 사회적인 인맥과 자원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개최하였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했던 중국 조선족 작곡가 수상 작품 교향 음악회를 조직하던 초기, 활동 경비를 조달하지 못하여 음악회가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박장수 부회장은 자신의 집을 팔아서라도 경비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는 민족 음악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가 오늘날의 성취를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한인[조선족] 음악인들이 노심초사하였는지 언급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앞날을 위하여

2012년 6월,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북경에서 제5차 대표대회를 가지고, 중국 국가 일급 작곡가, 현 중국 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예술 총감독으로 있는 장천일을 새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장회장은 취임사에서 “조선족 음악가로써 중국 조선족 음악 사업을 전면적으로 추진할 뿐만 아니라 중국 새로운 시기 문화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공헌해야 한다.”라고 하며 더 큰 비약을 약속하였다.

자고로 ‘빙동삼척 비일일지한’(冰凍三尺, 非一日之寒)이라 연구회의 창립 초기부터 사단 법인 및 상임 부회장을 줄곧 역임하고 실질적으로 연구회를 이끈 박장수 부회장은 지나온 시간을 돌이키면서 “현재까지 이 모든 성과는 연구회가 창립 전 이 땅에서 피와 땀을 흘려온 수많은 선배들과 지금도 민족 음악의 발전을 위해 사심 없는 성원을 마다하지 않는 조선족 음악인들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인[조선족] 음악인들이 걸어 온 삶의 험난함과 민족 음악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그들의 강인한 의지에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아리랑 오케스트라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여타의 다민족 국가들이 그렇듯이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국가 안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중국은 소수민족에 대해 많은 우혜(優惠) 정책이 있는 반면 정책적인 제한도 있다.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는 민족 학술단체이기에 정부 규정에 의해 전국 타 지역에 지회, 분회 같은 기관을 설치하지 못한다. 때문에 연구회의 많은 활동은 각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들의 개인적 의지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행사 때마다 각 지역의 기관 단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고 경제적인 후원과 협동을 이루어 내는 것은 오롯이 회원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오히려 한인[조선족] 음악인들의 더욱 뚜렷한 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북경아리랑 오케스트라 결성은 이런 민족적 자각의 결실이라 하겠다.

아리랑 오케스트라 는 북경에 거주하고 있는 각 음악 단체의 한인[조선족] 음악인으로 구성되었다. 저명한 한인[조선족]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가 김정평이 발의하고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았다.

북경은 아마도 동북3성을 제외하고 한인이 가장 많이 집결된 곳이라 하겠다. 1949년 공화국 건립을 계기로 항일운동시기 군부대에서 활약하던 한인 지식인들이 대거 중앙 정부 소속 기관 단체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이다. 또한 공화국 건립 이후, 대학 입시 교육 제도를 회복한 이래 많은 동북 3성의 한인 후손들이 대학 교육을 받고 북경의 각 기관 단체에 안배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특히 모든 음악 단체에는 한인 음악인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한인이 ‘교육수준이 높고 가무에 능하다’는 중국내의 이미지도 이런 배경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1991년 1월 6일, 북경 중앙 민족 가무단 예당에서 펼쳐진 아리랑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은 이런 이미지의 집대성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다.

거의 2시간 가량의 프로그램은 모두 한인[조선족] 작곡가 작품, 한인[조선족] 연주가들의 연주로 구성되었다.

북한 교향악 「피바다 」 제2악장, 관현악곡 「청산리 벌에 풍년이 왔네 」[김옥성 작곡, 김영규 편곡], 최삼명과 김재청이 공동작곡한 「C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연주 백옥], 「그리운 금강산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 소프라노 이경춘], 「연안송 」[막야 작사, 정율성 작곡, 테너 김영철], 차이코프스키「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연주 김휘], 「장백산 나의 고향 」[송일 작사 작곡] 등 민족적 음악특색이 다분한 작품을 무대에 올려 북경에 있는 한인뿐만 아니라 기타 민족 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에 힘을 얻어 그 해 6월 23일에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사, 중국 교향 음악 애호가 협회, 북경 음악가 협회, 북경 인민 방송국의 후원과 협조를 이끌어내 북경 음악홀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더 많은 한인[조선족]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제1교향곡 」[김정평 작곡], 음악시 「눈보라 」[방하찬 작곡],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희열 」[권길호 작곡, 바이올린 연주 김명], 「피아노와 오케스트라-한수의 피아노시 」[장천일 작곡, 피아노 연주 최민혁], 관현악곡-「라질리 」[안국민 작곡],「밀양 아리랑」[김희조 편곡], 「사념(思念) 」[김정평 작곡] 등 작품을 더해 전통 민족 음악장르부터 서양 현대 음악장르까지 아우르는 중국 한인[조선족] 음악인들의 진수를 나타냈다.

또한 아리랑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한인 이주민의 2, 3세 음악인들의 눈부신 활약이 돋보인다. 오케스트라의 구성원은 북경 각 전문음악단체의 젊은 한인[조선족] 중견 연주가들과 각 음악 대학의 한인[조선족] 재학생들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독주도 국제 콩쿠르 혹은 국내 콩쿠르에서 수상한 한인[조선족] 젊은 연주가들이 맡은 것이다.

당시 피아노 독주를 맡은 최민혁 교수는 뙤약볕이 강한 북경 6월의 더운 날씨에 불구하고 그 누구도 불평 불만없이 연습에 최선을 다했고 모든 연주가들이 무보수로 공연을 하였다고 밝혔다. 모두들 공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기며, 민족의 음악 발전 그리고 나아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모름지기 맡아야 할 책임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아리랑 오케스트라 공연은 모든 관람객들의 호평과 중국 음악계의 전문가들의 절찬을 받았다. 중국의 저명한 지휘자 변조선(卞祖善)[중국국가교향악단, 중국 음악가 협회 교향악 학회 회장]은 『음악주보』에 「아리랑 오케스트라의 성공적인 공연에 환호하다」라는 글을 올려 ‘이번 음악회는 높은 음악적 수준과 민족특색이 뚜렷한 공연이었다. 우리는 김정평의 「제1교향곡 」에서 한인[조선족] 인민들이 겪어 온 고난의 역사가 지닌 그 슬픔과 더불어 불굴의 의지를 느꼈다. 장천일의 「피아노와 관현악-한수의 피아노시 」는 충만한 시적인 정서와 음악이 어울려져 양식이 세련되고 참신하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김휘, 피아니스트 최민혁, 테너 김영철의 연주는 듣는 이에게 큰 감동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극찬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http://yanbian01851.11467.com)
  • 中音在线(http://www.musice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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