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삼노인으로 유명한 화룡시문화관의 이동문화관 활동

한자 三老人으로 有名한 和龍市 文化館의 移動 文化館 活動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단체 화룡시문화관 소속 이동문화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3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년 10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10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4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최초 설립지 길림성 화룡현
현 소재지 길림성 화룡시
백년현성에서 활약하는 예술단

민족의 성산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백두산기슭에서 발원한 두만강해란강을 끼고 터를 잡은 백년현성 화룡, 백두산의 주요한 산줄기인 남강산맥 힁단 중부 지역 노란자위 화룡은 연변지역에서 한민족이 가장 일찍 개척한 고장의 하나이다. 그 옛날 삼도구, 충신장으로도 불리운 이 고장은 한민족이 일제에 맞서 싸우면서 청산리전투, 홍기하 전투, 처창즈 혁명근거지, 와룡동항일유격구 등 수많은 전설을 엮어낸 항쟁의 땅, 영광의 땅이다.

화룡 지역은 한인[조선족]이 64%이상으로 민족의 교육, 문화, 민속의 전통이 가장 훌륭하게 전승된 고장이자 민족 문화 자질이 높기로 널리 알려졌다. 1958년 3월 원 현문화관과외극단을 토대로 화룡현문공단이 설립되었다. 차례로 극작품 창작가 리룡연, 허영순, 한윤호, 김흥빈 등을 핵심으로 작곡가 김태국, 김창락, 김봉호, 김필준 등을 핵심으로 수많은 예술창작일군들이 배출되어 민족문화예술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문화예술일군들은 농촌, 공장, 변방지역에 심입하여 실생활 속에서 전통문화정수를 발굴하고 발전시키고 새로운 문예종목을 창작하면서 향토풍정과 시대의 주선률을 반영한 훌륭한 작품들을 출범시켰다.

1989년 4월 화룡현 문공단은 화룡현 예술단으로 개칭되었고, 1993년 화룡현이 화룡시로 승격하면서 동시에 화룡시예술단으로 되었다. 명칭은 바뀌었어도 오랜 전통을 계승발양하여 온돌공연대, 이동문공단 등 소분대를 무어 농촌의 시골마을들에 찾아가 그들의 특성에 알맞는 종목들을 창작하여 공연함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한윤호, 김흥빈이 창작한 늙은량주 대창 『분배받은 기쁨』은 1980년 전국 소수민족 문예콩쿠르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흭득하였다. 화룡시예술단의 가극 『장백의 진달래』도 차례로 전국, 성급 상을 받아 안았다.

화룡시예술단의 온돌공연대는 2010년까지 수십년간 온돌공연을 총 1만 1,385차 진행하였고, 누적 관중 수는 310만명에 달하였다. 인민일보, 길림일보, 연변일보 등 수 십개 보도매체를 통하여 전국에 소개되면서 1997년에는 『전국우란무치공연단』칭호를 수여 받기도 하였다.

1958년「삼로인》이 무대에 오르다

삼로인이 구연예술의 새로운 종목으로 출범하고 발전한 것은 한인[조선족] 예술발전의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김태희의 창조적인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김태희는 연변가무단 초창기에 연변가무단 단장으로서 이 예술단체를 중국 한인[조선족] 특색을 가진 정규적인 전문예술단체로 성장, 발전시켰다.  김태희 단장은 종합적이고 정규적인 전문 예술단체로의 기초적인 건설을 튼튼히 확립하였기에 1950년대 초기부터 연변가무단은 한인[조선족]의  특색을 가진 유일한 가무예술단으로, 춤과 노래의 고향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졌고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도 알고 인정하는 예술단체가 되었다.

김태희단장은 한인[조선족] 특색의 가무, 연극 예술을 개화, 한 예술단체가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단체로 되려면 남에게 없는 자기의 특색을 가진 예술작품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작품창작을 하려면 대중의 생활 원천속으로 들어가 창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중국길림성 연변지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초창기를 맞으면서 한인[조선족]을 비롯한 국민들의 건설열기가 상당히 고조되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문화 생활을 창조해가는 대중의 열망도 대단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김태희 단장은 여러 조를 나누어 화룡현 용수, 용해, 석국, 투도, 서성, 용포, 명암에서 호조합작선전과 결부하여 창작과 보도를 하는 한편 소형 공연도 하였다. 이때 김태희단장이 창작한 연극 「우리 조장동무」를 서성에서 공연하여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 연극조 최수봉, 허창석, 원주삼이 처음으로 「삼로인」으로 된 소형극 「동학으로 가는 길」을 창작공연, 그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삼로인」은 공연을 가게 되면 먼저 그 곳의 실제 상황을 조사하여 즉흥적으로 창작, 공연하였다. 그러했기에 농민들이 즐기는 새로운 문예형식으로서 그 곳의 실제와 같다면서 그 전형성과 생동성에 농민들은 놀라기도 하였으며 감화력도 아주 컸다. 이로 하여 「삼로인」은 한인[조선족] 희곡예술분야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새로운 장르가 되었다.

1958년 3월 화룡현문공단이 건립되면서 “삼로인”은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점차 화룡현 문공단의 고정종목으로 지금까지 자리를 굳혀왔다. 삼로인에는 정면인물, 반면인물, 중간인물이 등장한다. 부동한 성격의 소유자인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앞두고 모순에 빠지게 되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상이 낙후한 반면, 인물과 입장이 확고하지 못한 중간인물은 정면인물과 함께 긍정적인 길을 선택하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세 사람은 방언과 표준어를 엇갈아 사용하고 해학적인 표현예술로 관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웃음이 끓기지 않는 효자종목

일전에 우리는 다년간 화룡시문화관에서 삼로인을 공연해왔고 또한 퇴직 후에도 6년째 하향공연에 참가하다가 지난해에 퇴직한 허상권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다소 긴장됐는지 표정이 엄숙해보였지만 삼로인의 공연시절을 되돌려보면서 점차 무대에서의 특유의 억양과 다양한 표정으로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농촌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 삼로인을 감상하면서 관중들은 “저 영감은 우리 동네의 아무개와 같다”, “조사하고 온 것이 아니냐” 며 배꼽을 잡고 웃더라고 허상권 은 하향공연할 때의 상황을 회고하였다.

삼로인이 창작되어 지금까지 수 십년을 이어 오면서 고유의 특색을 살리는 한편 시대의 발전에 맞춰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그중에서 “경로원의 기쁨”을 계기로 삼로인은 남자 셋, 혹은 여자 셋이 한 무대에 등장하던 것으로 부터 남녀조합으로 발전하기도 했고, 또한 내용면에서도 노년의 사랑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허상권은 말을 이었다.

1983년쯤인가, 하향공연을 앞두고 한 배우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어 여배우로 교체하게 되었다. 그때 작품이 「경로원의 기쁨」이었다. 작품은 귀가 먼 한 할아버지가 보청기를 반도체로 오해하고 다른 두 할아버지와 빚어낸 오해와 웃음 그리고 나중에는 보청기를 끼고 잘 들려 기뻐하는 내용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배우 교체로 할머니가 등장하게 되면서 라디오에 대한 오해와, 또한 귀가 먼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간의 관계를 오해하고 질투하는 내용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더욱 재미나게 전개되었다.

그 외에도 복장이나 소품 등 면에서 시대에 알맞게 발전되었는바, 고유의 콧수염, 중절모, 한복 등으로부터 지금 시대에 걸맞는 차림새를 보여주고 있다.

삼로인, 중국국가급무형문화재로 등재

2008년 『삼로인』은 장고춤, 퉁소 등을 포함한 8가지 현지 한인들의 전통항목이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허상권, 최중철, 홍미옥 세 사람은 1996년부터 무대에서 찰떡궁합이 되어 삼로인을 공연하면서 많은 관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이들은 바로 화룡시문화관의 배우이면서도 국가급 무형문화재인 삼로인의 전승인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 한인[조선족]의 문화유산 보호와 민족정신 발양, 그리고 사회문화흡인력과 응집력을 강화하는데 대해 중대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한인[조선족] 구연형식의 하나이며 또한 중국 소수민족 구연예술의 구성부분인 삼로인은 후계자가 부족한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 있다. 화룡시문화관에서는 지난해부터 후계자양성을 중시하여 구연양성반을 만들고 “삼로인”이나 “늙은 량주 대창”에 흥취를 가지는 젊은 세대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두 명의 청년배우가 전승인으로 부터 삼로인의 공연과 창작을 배우고 있으며, 공연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해란강변의 화룡특색문화 창출

화룡시 문화관은 건립된 이후 산하의 화룡예술단을 선두로 하여 화룡 특색의 대중적인 문화정품을 창출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문화관의 전문 창작일군들과 전문직 예술일군들은 경상적으로 기층에 심임하고 실제 생활속에 몸을 담고서 대중들이 즐기고 갈망하는 문예작품들을 창작하였다. 화룡은 이미 문화혁명 전부터 수많은 창작일군들이 배출되었다. 리룡영, 마상욱, 리동춘, 김태국, 조대경, 노윤관 등은 그중의 걸출한 대표들이다. 1964년 조대길, 노윤관이 창작한 가곡 『적비가』는 주은래 총리의 찬양을 받았고 레코드판으로 제작되어 전국에 발행되었는바 성급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정세봉의 소설 『하고싶은 말』은 전국 소수 민족 우수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3년 2월 현규동의 시 『두 어머님』은 국가급간행물 『민족문학』에 발표되었고, 하태열의 소설, 『전화』, 강호권의 소설 『대가』는 1995년 중국 작가 협회 연변 분회의 창작2등상을 수상하고 1995년 10월 화룡문화관에서 창작한 무용 『쌀 빻기』는 제6기 전국 군중광장 무용콩쿠르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1990년대 이후부터 화룡에서는 특색 문화창출에 더욱 노력하여 종합성 문체오락활동을 적극 조직하였다. 향진을 단위로 대중적인 문화인협회가 설립되면서 투도진은 『소년예술교육선진진』으로 길림성 문화청으로부터 『특색문화의 고향』으로 명명되었다. 덕화의 청년시회, 용수농민촬영가협회, 용문기타협회, 토산자의 문학사, 동성의 민속무 공연 등 대중적인 문화활동이 전반을 이끌었다. 2007년부터 『한개 향진에 하나의 문화정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문화사업의 진흥과 번영을 촉진하였다. 서성진의 진달래민속원은 이미 4회에 거쳐 진달래문화축제를 펼치고 동성진은 3회에 거쳐 유기입쌀 민속문화축제를 거행하여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진 상태이다.

참고문헌
  • 『연변문화지』,(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국 ,2012)
  • 「김태희―민족예술발전의 탁월한 지도자」(『길림신문』2008. 3. 17)
  • 「삼로인 등 국가급 빗물질문화유산으로」(『길림신문』2008. 6. 13)
  • 「‘삼로인’의 전승인을 찾아서 허국화」(『연변일보』, 201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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