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 예술의 사령탑, 연변 군중 예술관

한자 延邊朝鮮族自治州 文化 藝術의 司令塔, 延邊 群衆 藝術館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기관 군중 예술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7월 12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6월 16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12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9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현 소재지 연길시 애단로 1587호
정의

연변 지역은 물론 한인[조선족] 대중적 문화 예술 사업의 사령탑 역할을 해 온 연변 군중 예술관에 대한 이야기.

설립 목적

연변 군중 예술관연변 지역에서 한인[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발굴, 계승, 발전시키며 대중적인 문화 예술 사업을 주도하고 보급하고 대중들의 문화 예술 이론을 탐구하고 우수한 문화 예술 인재를 양성하고 사회적 문화 예술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외 교류를 전개하는 등을 기본 취지로 설립되었다.

변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변 지역에서는 대중적인 문화 예술 붐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고조되었다. 도시와 변방 지역은 물론이고 광활한 산간 지역에 까지 크고 작은 문예 공연대가 나타나 활약하였다. 그러나 과외 문예의 근간이 부족하고 공연 자료가 전무한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활동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문화 사업을 지도하고 보급하는 주도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연변 군중 문화관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1960년 7월 12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도시 연길에서 출범하였다. 당시 임직원은 총 5명에 불과하였다.

1961년 사회 수요가 급증하면서 임직원은 14명으로 불어나고 이두암 부관장이 일상 사업을 주관하였다. 이들은 단칸집에서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대외 문예보도와 민간 문학 자료의 수집, 정리 사업을 펼쳐나가면서 「새로운 이야기」, 「채색무지개」등 문예 공연 자료, 민간 이야기 특집 등을 출간하였다.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연변 군중 문화관도 해체되어 일부는 농촌으로 하방되었고, 일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혁명 위원회 정치부 모택동 사상 선전 문화조로 탈바꿈하였다. 당시 사업 기관은 연변 노동자 문화궁이었다.

1973년 6월 16일 연변 군중 문화관이 회복되면서 편제가 16명으로 정해지고 판공실, 보도부, 편집부[조문, 한문]를 설치하였다. 당시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농촌 문화 발전의 근거지를 건설하고 농촌문예의 근간을 양성하여 발전시켰다.

1978년 연변 군중 예술관으로 개칭, 1985년에 이르러 임직원이 29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중 한인[조선족]이 19명, 한족이 9명, 만족이 1명이었다. 음악부, 미술부, 촬영부, 소년부, 희극부, 편집부, 판공실 등 부서를 설치하여 비교적 완벽한 대중 예술 지도 단체로 발전하였다.

1985년 중국국가 문화부와 지방 재정의 지원으로 새로 지은 건축 면적이 960㎡에 달하는 4층 건물에 입주하였다. 당관은 부현급 단위로 부상하고 임직원은 43명, 대학 전문 학교 이상 학력이 61%를 차지하였다. 1988년부터 문화 체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관장책임제를 실시하면서 2009년 12월까지 현 체제를 유지하였다.

2011년 연변 군중 예술관은 연길시 애단로 1587호로 이사하면서 건축 면적이 6,003㎡에 달하는 현대화한 빌딩에 입주하였다. 내부 기구를 새롭게 조절하여 7부 1실을 두었다.

대중 문화 보급의 코기러기, 사령탑으로 맹활약

두만강변에서 「두만강 아가씨」를 펴내면서 연변 군중 예술관에서는 현장 창작 활동을 실시하였다. 1990년 여름 연변 군중 예술관에서 화룡현 숭선향에서 대중 가요 창작 학습반을 꾸리게 되었다. 당시 연길시 문화관 음악부 음악보도원 김경애 작곡가는 연변 군중 예술관 창작실 유영호 창작원과 함께 가서 진행을 맡았다. 전용차로 숭선향 어구에 도착한 이들은 삼삼오오 오솔길에 늘어서서 웃고 떠들며 천천히 마을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숭선 아가씨로 보이는 젊은 처녀 두 명이 그들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빨강과 파란 치마를 각각 입은 그 두 처녀는 얼굴피부가 말쑥하고 키가 늘씬한 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김경애 작곡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유영호 선생에게 한마디 했다.

…화룡이 물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아가씨들이 저렇게 예쁠 수가요. 이참에 차라리 숭선아가씨를 노래하는 가사를 써 보는게 어떨가요? 예쁜 처녀들을 눈앞에 두니 유선생도 기분이 금시 더 좋아져서 “그래, 알았다”하고 시원스레 대답하더니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벌써 가사를 김경애 작곡가 앞에 내어 놓는 것이었다. 유영호 선생은 존대말에 익숙치 않고 말을 놓기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그와는 초면이든 구면이든 스스럼없고 편한 관계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다음은 유영호 창작원이 쓴 가사로, 제목은 「두만강 아가씨」이다.

산천이 수려해 살결이 맑나

강물이 맑아서 목청도 곱나

두만강 푸른 물에 발목 잠그고

미역감는 아가씨 어여쁘구나

아 두만강 아가씨

물처럼 깨끗한 두만강 아가씨

김경애 작곡가는 숭선 땅에 발이 닿은 순간부터 왠지 마음이 즐거워져서 기분이 붕떴다. 그래서인지 가사를 읽어보니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길에서 조금 피곤했던 그는 가사를 머리맡에 놓고 음미하면서 잠부터 청했다. 시골의 밤이란 말 그대로 불빛 한 점 없는 까만 나라 풍경인데 두만강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귀전에 들려왔다. 그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편안한 꿈나라로 들어갔다. 이튿날 새벽, 김경애 작곡가는 일어나자 바람으로 가사와 볼펜 및 원고지를 챙겨가지고 두만강변에 나갔다. 안개 자옥한 산봉우리며 멀리 산굽이를 에돌아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물을 바라보며 청신한 새벽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고 나서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 그는 가사 「두만강 아가씨」를 조용히 읊으면서 선율을 더듬어보았다. 가사 내용이 두만강에서 미역을 감는 처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한 만큼 선율의 정서도 되도록 출렁이며 흐르는 물에 대한 감각을 많이 고려했다. 다 쓰고 나서 숙소에 돌아온 이튿날 아침 다시 그 곡을 갖고 두만강 가에 나가서 온몸의 열정을 다 담아 한바탕 불러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확신이 서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다시 수정을 할 곳이 없는 듯해서 악보지에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 창작 회의에서 여러 작곡가들이 내놓은 작품은 200여수 되었다. 당시 작곡가들의 창작 열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김경애 자신도 총 5수의 가요 작품을 내놓았다. 시창(試唱) 회의 때 김경애와 박위철이 전자 오르간 반주를 맡았고, 연변 군중 예술관의 리순옥 가수가 「두만강 아가씨」를 불렀다. 시창회가 끝나자 유영호 선생이 신이 나서 말했다. “야, 말도 말라. 노래를 척 들으니까 벌써 알 것 같다. 성공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평가 회의에서 「두만강 아가씨」가 1등의 영예를 받았다.

연변 군중 예술관은 1975년부터 대중적인 노래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해 연길현 노두구진에서 문화 대혁명 후 처음으로 가곡 창작 학원을 개강하였다. 이번 가곡 창작 학원에서 50여 명을 양성하였는데 그들의 우수한 창작 작품을 편집 출판하고 방송과 각종 행사를 통하여 보급하여 훌륭한 사회적 효과성을 창출하였다. 그때부터 대중적 가곡 창작 사업은 군중 문화 예술 사업의 주요한 과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2013년까지 38년간 줄곧 견지하여 왔다.

그 결과 수백 명에 달하는 대중적 과외 창작 일군을 양성하였다. 1989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주년을 맞으면서 주내 8개 시, 현과 공장, 광산, 대형 기업과 임업 분야의 과외 창작 일군 18명이 우수한 가요 37수를 창작, 그중 10수는 연변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급한 가운데서 가장 즐겨 부르는 대중 가요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전국적인 우수 가요 평의에서 총 72건이 우수 작품으로 평가되었는데 그중 중국 국가급 우수 작품이 11건, 길림성 성급 우수 작품이 15건에 달한다.

연길시 공원가두 원휘 사회 구역리해숙 할머니(77세)는 촬영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연변 군중 예술관에서 조직하는 사진 촬영 학원에 다니면서 사진 기술을 익히고서 여생을 뜻깊게 보내고 있다. 리해숙 할머니는 2006년 4월 일본 유학을 갔던 손녀가 사진기를 다루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면서부터 촬영 기술을 배우려고 결심했다. 당시 연변 군중 예술관 산하의 연길시 촬영가 협회가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는 곧장 찾아 갔다. “아니 연세도 많으신데 어떻게 촬영을…쉬운 일이 아닌데” 셔터 한번 눌러보지 못했다는 얘기에 협회 책임자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협회 회원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그녀처럼 나이가 많은 문외한은 더구나 없었다. “나이가 많다 해서 안된다는 법이야 없지 않아유. 꼭 배워 낼테니 이 늙은 학생을 받아 주시유.” “그럼 먼저 한동안 협회로 나와서 시험 삼아 배워보십시오.” 간청에 못 이겨 협회책임자는 동의했다. 리해숙 할머니는 촬영 강습반에 참가해 강의를 명심해 들었고 중요한 것은 필기도 했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체면불구하고 교원과 연하 회원들한테 묻기도 했다. 또 틈만 있으면 촬영 연습을 하면서 촬영 기술을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협회에서는 매주 1차씩 야외 촬영을 조직하였다. 회원으로는 최고령자인 리해숙 할머니는 3년 동안 감기에 걸려 한번 빠지고는 120여 차례나 참가하였다. 왕청현의 만천성, 화룡시의 선경대, 돈화시정각사 등 주내 각지 풍경구에 그의 발자취가 찍혀 있으며 화룡시의 진달래 꽃축제, 용정시의 사과배 축제, 훈춘시의 사과절 등 주내의 큰 행사때 마다 셔터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3년간 리해숙 할머니는 2000여 장에 달하는 사진작품을 냈는데 그중 300여 장이 협회의 사진 작품 평의회에 전시되었으며, 지난해 8월에 있은 연변 촬영가 협회와 화룡시 문학 예술 연합회에서 공동 주최한 북경 올림픽 맞이, 석천동컵 풍경 촬영 시합에서 그의 작품 「폭포수」가 3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촬영가 할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2013년 12월말 협회에서는 연도 총화 모임을 가졌는데 리해숙 할머니는 작년에 이어 2번째로 우수 회원으로 표창을 받았다. “변화된 도시모습과 아름다운 산천수목을 렌즈에 담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라구요. 하기에 난 항상 유쾌한 기분으로 산다우. 촬영을 하려면 자주 야외로, 외지로 나가야 하고 또 자주 움직여야 하니 신체건강에 좋지유. 여생에 이젠 촬영을 떠날 수 없게 되었지유” 이렇게 촬영 감수를 말하는 리해숙 할머니의 얼굴에는 긍지에 넘치는 미소가 다분히 어려 있었다.

연변 군중 예술관에서는 1960년부터 연변 지역 나아가 동북 3성 한인[조선족] 전업 혹은 과외 미술 촬영인들을 위하여 사진 촬영 학원을 꾸리고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91년 왕청현 춘향진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촬영 학원 강습생들을 모집하여 현지 창작 활동을 진행, 140점에 달하는 창작품을 내놓았다. 1985년부터 해마다 연길에서 촬영 애호가들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85년부터 해마다 전국 농촌 촬영 콩쿠르에 참가하고 장백산-부산 국제 아동 예술 교류회를 조직하였다.

대중적인 민간 문화 축제를 활발하게 조직

1985년부터 집체 소유제 성질의 해란강 구연단을 조직하고 김남호가 단장, 한성후가 예술 지도, 강동춘이 부예술지도를 맡았다. 이들은 재담, 만담, 「삼로인」 등 구연 종목을 창작하고 구연 인재도 적시에 발견하고 양성하여서 구연 예술의 발전을 추동하였다. 차례로 김영식, 강룡선, 주미옥, 허련옥, 김영철, 김홍옥, 강동춘 등 우수한 구연 배우들이 용솟음쳐 나왔다. 「질투병」, 「전화걸기」, 「로인들의 연분」 등 종목은 연변 지역은 물론이고 흑룡강, 길림, 요령의 심양 등지의 한인[조선족] 거주 지역에 가 순회 공연을 차례로 300여 차 공연하여 환영을 받았다.

연변 정부와 중국 국가 문화부는 1992년부터 두만강 천리 문화 주랑 사업을 활발하게 시행하였다. 백두산 기슭의 두만강 발원지로부터 동해에 흘러드는 방천의 출구까지 4개시 1개 현의 2,000㎞에 달하는 두만강연선을 답사하면서 17개 향진에는 문화 센터를 설립하고 30여 개 촌에는 문화실을 설립하도록 도와 주었다. 주적으로 「상모춤의 고향」, 「농민화의 고향」, 「퉁소의 고향」, 「장고무의 고향」등 14개 항목을 정액 관리하고 향진마다 특징적인 예술 종목을 전면 보급하였다.

하늘 높고 바람 시원한 입추의 절기에 들어서면서 연변 군중 예술관은 연변 민간 문예가 협회, 중국 조선족 민속원과 손잡고 2013년 8월 29일, 모아산 자락에 자리 잡은 중국 조선족 민속원에서 중국 조선족 제6차 길산 동력컵 퉁소 예술 축제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퉁소 예술 축제는 2008년 조선족 퉁소가 중국 국가급 무형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이래 퉁소 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추진하고 보다 광범위한 범위에서 보급하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수준을 제고하기 위한데 목적을 두었다. 연변 장수 협회 300명으로 구성된 북장구 연주자들의 열띤 축하 공연에 이어 중국조선족 민속원 대표팀의 신나는 퉁소 합주 「풍년든 마을」, 연길시 신흥가 대표팀의 구성진 퉁소 합주 「농부가」, 연변의 유일한 여성 퉁소팀 혼춘 부녀 퉁소팀의 이채로운 표현, 지게 멘 농사군, 감주독을 인 아기 엄마, 떡함지를 든 아들,가족 행렬이 관중석에 올라 감주를 권하고 떡, 사탕을 나누며 농가 인심 표현한 연길시 북산가 대표팀의 「아리랑 변주곡」등 18개 프로들로 불꽃 튀는 열연을 펼쳤다. 한국의 퉁소 예술 애호가들도 동참하여 특색 있는 퉁소곡 「신 뱃노래」를 연주하였고, 연변 민간 예술단에서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한 「농악무」를 다채롭게 표현하였다. 퉁소 연주를 위주로 북, 장구, 새납, 가야금 각종 민간 악기들이 총동원되어 신나는 우리 가락을 연주하니, 흥을 이기지 못한 관중들이 어깨춤 덩실덩실, 노래 소리와 웃음소리가 모아산 자락을 떠나 갈 듯 하였다.

소년 아동 예술 학원, 민족 예술 꿈나무의 요람

1970년대부터 연변 군중 예술관은 화룡, 용정, 왕청 등지에서 소년 아동 과외 예술학원을 설립하고 예술 지도를 진행하였다. 1983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의 8개 시현에서 소년 아동 유아 교원 학원 8기를 조직하여 신향, 황경옥, 리화춘, 정춘자 등 우수한 한패의 소년 아동 예술 교원을 양성하였다. 1984년부터 소년 아동 예술부를 설치하고 40여기에 달하는 소년 아동 예술 교원 학원을 꾸려 400여 명에 달하는 유아, 아동, 소년 무용 교원을 양성하였다. 이 해에 전국 소년 아동 가무 공연 콩쿠르에 참가하여 「비기기」등 4개 종목이 전국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여 「사물놀이」등 민족 종목을 널리 보급하고 주적으로 50개 활동 장소를 설치하고 악기 200여 조를 기층에 기증하였다. 2009년 연변조선족자치주 향촌, 도시의 사회 구역, 각종 기업의 수용에 부응하여 37개 단위의 창작과 보급을 지도, 연인수로 4,700여 명을 양성하였다.

연변 군중 예술관은 민간 문예 단체에 대한 조직, 지도 사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기 예술관 산하의 연변 아리랑 예술단은 2002년 6월에 설립되었는데 연변 가무단에서 정년 직한 전업 연예 일군, 기타 문예 단체나 공장, 기업의 과외 연예 골간들로 조직되어 그 차원이 비교적 높은 한인[조선족] 중노년 문화 예술 단체가 되었다.

연변 아리랑 예술단은 설립된 후 960만㎢의 대지를 누비면서 차례로 각종 공연 410여 차례 진행하여 큰 환영을 받았다. 이들의 인기 종목 무용 「아리랑」, 「장백송」, 「행복한 명절」, 「장고무」, 「풍수의 희열」, 「동이춤」, 「나의 고향」 등 허다한 종목들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성 중창, 남녀 독창 등도 인기 종목이었다. 연변 아리랑 예술단은 차례로 「중화의 꿈」 등 전국 중노년 무용 콩쿠르, 「성세의 노래」등 전국 중노년 문예 콩쿠르에 참가하여 「풍수의 희열」, 「유쾌한 하루」 등 4개 종목이 금상, 은상을 수상하였다.

우리 민족 무용수들이 여기서 자라났다

연변 군중 예술관연변 지역은 물론이고 한인[조선족]이 집거하는 구역에서 요청이 오면 대부분 책임지고 사업을 펼쳐나갔다. 이를테면 흑룡강성의 목단강, 계서, 오상, 계동, 길림성의 장춘, 길림, 집안, 장백, 휘남, 유하, 서란, 요령성의 심양, 대련, 무순 등지의 문화관들은 대부분 당관의 지지와 강습을 받았다. 무용종목만 하더라도 손북춤, 화동무, 동이춤, 접시춤 장고춤, 칼춤, 도라지, 노들강변 등 기본 기능강습을 시켰다. 「어머님 장수하세요」 등 종목과 성악, 기악, 창작 등 수많은 작품들을 전수하고 보도하였다.

1982년 연변 군중 예술관은 중국국가 문화부 국가 민족 문화사의 위탁을 받고 동북 3성 조선족 문화관 무용 간부 학원을 모집하였다. 연변 무용계의 유명 교원들이 직접 가르친 이 무용 학원에서는 차례로 37명이 참가하여 37일간 거행, 이후 한인[조선족] 무용수들을 양성하는데 훌륭한 인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81년 후부터 총 20기에 거쳐 자체로 창작한 집체 무용 「도라지」, 「노들강변」, 「옹헤야」, 「명월구산천가」등을 먼저 보급하였다. 1992년부터 2차에 거쳐 돈화, 혼춘에서 무용 기본 학원을 개설하고, 1993년에는 두만강 유역 문화 주랑 공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2008년 3월에는 연변, 나아가 동북 3성 문화관 간부 조선족 무용 학원을 개설하였다.

연변 군중 예술관은 대중 문화 예술 사업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승화를 이루고자 대중 문화 이론 탐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3년 10월 돈화현 대산주자에서 「문화관학」학술 세미나를 개최, 25편의 논문을 교류하고 그중 14편을 선택하여 「군중 문화 학술 연구」라는 제목으로 학술 논문집을 묶었다. 1985년 4월 연변 문화관 학회를 설립하고 김창호가 학회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1991년 연변 군중 문학회와 연변 군중 예술관은 연합으로 「연변 군중 문화보」를 창간, 한 분기에 한권씩 출간하여 연변 지역은 물론이고 동북 3성 한인[조선족] 산재 지역의 대중 문화 사업을 선도하였다. 1999년 연변 제14기 군중 문화 학술 세미나를 거행, 30여 편의 논문을 교류하고 그중 20편의 우수 논문을 평의하였다. 2002년 동북 3성 제10기 군중 문화 학술 세미나를 주최하여, 동북 3성의 군중 문화 전문가, 학자 50여 명이 참가하여 45편의 논문이 발표되어 논문집으로 출판하였다.

타지역 문화 정수 받아들이며 대외 교류 활발

연변 군중 예술관은 중국내의 한족, 장족, 몽골족, 만족 등 형제 민족들과의 예술 문화 교류도 활발하게 펼쳤다. 1978년 8월 10일 사천성 대표단을 접대하고 교류를 진행하였다. 1980년 10월 5일 영하회족 자치주 문화 대표단을 초대하여 연변 지역에서 한인[조선족] 군중들과 함께 광범위한 문화 활동을 하였다. 2010년 전후로 심양시 조선족 문화 대표단, 귀주성 금동남 문화 대표단, 신강카스 대표단 등 수많은 문화 교류 대표단을 영접하고 연변의 경험과 진수를 전수하였다.

한중 수교후 연변 군중 예술관은 1994년부터 한국 강연 협회 서울 분회와 제휴하고 광범위한 교류와 합작을 펼쳤다. 2002년에는 한국 언어 문화 촉진회와 중국 조선족 언어 문화 연구회가 협조하여 왕청현 등지에서 「사물놀이」악기 19조를 증정하고 학원을 조직하여 문예 기교를 전수하고 보급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2003년, 2005년에도 혼춘, 도문 등지에서 「사물놀이」악기를 증정하고 보급 활동을 펼쳤다. 연변 한인[조선족] 인기종목들을 조직하여 한국의 서울, 마산 등지에 가서 공연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2005년 연변 군중 예술관은 중국 국가 문화부 국가 인사부로부터 전국 문화 선진 집단으로 평의되었고, 2011년에는 국가 문화부로부터 전국 1급관의 칭호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연변 문화지』(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국편, 2012)
  • 「‘무지개 인생’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길림 신문』, 2012. 10. 16.)
  • 「퉁소 가락에 모아산 자락 들썩」(『길림 신문』, 2013. 8. 30.)
  • 「대형 가무 ‘노래하노라 장백산’ 문화상 수상」(『연변 일보』, 2013. 10. 30.)
  • 「산재 지역 무용 지도들 연변 군중 예술관에서 조선족 농악무 연수」(『길림 신문』, 201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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