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紅光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재만 농민 동맹회|반석 노농 의용군|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11월 |
| 몰년 시기/일시 | 1935년 6월 |
| 출생지 | 경기도 용인군 단삼동 |
| 활동지 | 길림성 반석현 |
일제 강점기 남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홍광은 1927년 재만 농민 동맹회에 가입하여 농민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1930년에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2년 1월에는 적위대를 반석 노농 의용군(磐石勞農義勇軍)으로 개편하여 장(長)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반석 항일 유격대는 1933년 1월 중국 노농 홍군(中國勞農紅軍)의 남만 유격대로 개편되었다. 이 때, 이홍광은 정치위원으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8월에는 호란진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하였으며 그해 9월 18일 남만 유격대가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재편되자 양정우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11월에는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제1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 5월과 12월에 평안북도 동흥진과 하성읍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9년 고향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학생과 싸운 연유로 인하여 1년 만에 퇴학당하였다. 1926년 그의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 및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중국길림성(吉林省) 반석현(磐石縣)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이통현(伊通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7년에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산하의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에 참여하였고, 청년 동맹에도 가입하였다. 이후 1930년 말 이통현 삼도구(三道溝)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1년 이롱·쌍양 특별지부의 조직원이 되었고, 그 후에 반석 중심현 위원회(磐石中心縣委員會) 위원을 맡아 농민운동을 하였다. 이홍광은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일본의 앞잡이에게 타격을 주는 타구대(打狗隊) 즉 적위대를 조직하고 장(長)이 되었다. 이것이 남만에서의 동북 인민 혁명군의 전신이고 무장 투쟁의 시작이다. 1932년 2월 곽과점에 연행된 동지탈환투쟁을 3일간 전개하여 성공시켰다. 1932년 4월 2일 양군무(적위대 정치위원)와 함께 적위대와 대중을 조직·동원하여 곽과점어구에서 괴뢰만주국 1개 연을 습격하고 체포된 동지를 구출하였다. 1932년 4월 4일 반석현의 합마하자 (蛤蟆河子) 일대 5간방에서 조·중 농민의 반일 봉기를 조직하였다. 이홍광은 5월 7일 합마하자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는데, 농민봉기의 정치역량과 무장역량 강화를 위해 타구대에 양림이 파견되어 정치위원이 되고 이홍광은 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이홍광은 30여 명의 대원을 2개의 소대로 나누고 반석 노농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32년 11월 양정우의 지도하에 반석 노농 의용군을 중국노농홍군 제32군 남만 유격대로 개편하였으며 이 때 이홍광은 교도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8월 초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본명 馬尙德)와 함께 호란진 전투를 지휘하여 고희갑을 사살하였다. 1933년 9월 18일 근거지인 버리하투에서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창건하였으며, 이홍광은 참모장이 되었다. 이홍광은 1933년 1월부터 11월까지 휘남·금천·유하·몽강·통화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소본량의 거점인 유하현 삼원포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1934년 11월 7일에는 임강현 판석구에서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창건을 선포하였고 이홍광은 제1사 사장이 되었다. 이홍광은 1935년 초까지 주로 반석현 남부 지역과 압록강 상류 지역 사이에서 일제 및 만주국 관헌에 맞서 싸웠다. 특히 동흥 점령 전투에서 10여 명의 일본인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통치시설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5년 3월 15일 양정우와 함께 유하현 타요령에서 통화현 서현장이 탄 자동차를 습격하고 그를 생포하여 처단하였다. 1935년 6월 노령에서 휴식 중인 일본군 200여 명과 조우하여 전투하였다. 이 때 이홍광은 머리에 총을 맞고 흑할자 밀영에서 치료받던 중에 2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중국 요령성 신빈현(新賓縣) 홍묘자향(紅廟子鄕)흑할자망(黑瞎子望) 마을 뒷산에 있는 묘가 이홍광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