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덕태

한자 王德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연길현 반제동맹|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정치위원|동북 항일 연군군장
출생 시기/일시 1908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35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36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36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36년 8월 이후
몰년 시기/일시 1936년 11월
출생지 산동성
활동지 길림성 연길
활동지 길림성 연길
활동지 길림성 반석현
활동지 길림성 일대
정의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개설

왕덕태는 1931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연길현 유격대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동북 인민 혁명군 제 2군 독립사 정치위원 및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 위원을 지냈다. 1935년에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군장을 역임하였고, 1936년에는 동북 항일 연군 제2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 남만성위 위원, 항일연군 제1로군 부사령 겸 제2군 군장 등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가계

왕덕태는 1908년 산동성의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인해 10여 살 때 연변의 자초구일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왕덕태는 1931년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가 주도한 추수 투쟁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2년 봄에 춘황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당의 지시를 받고 연길현 반제동맹 조직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그 해 여름 왕덕태는 당의 지시로 삼도만에 가서 삼림대를 쟁취하는 사업을 하였다. 삼림부대 가운데 ‘장강호’부대에 들어가 정치공작을 실시하여 30여 명의 삼림대 병사들을 이끌고 나와 연길유격대에 참가시켰다. 이 때 왕덕태는 연길유격대에서 소대장·중대장·대대참모장 및 정치위원 등을 맡았다.

1934년 3월 연길, 왕청, 화룡, 훈춘유격대를 토대로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조직하였다. 이 때 왕덕태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치위원 및 중공동만특위 위원으로 있었다. 같은 해 7월 독립사의 일부 대오, 의용군·삼림대와 함께 안도현 대전자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처창즈 항일유격 근거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1935년 3월 왕덕태는 제2군 독립사 사장이 되었다. 1935년 5월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으로 재편성되었는데 이 때 병력은 약 1,200명이었다. 왕덕태는 군장을 맡아 할바령·양병태·황송진 등지에서 적의 기차를 습격하는 전투를 펼쳤다.

1935년 11월 안도현내두산 항일 유격 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이 항일유격지는 백두산기슭의 안도현 이도백하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내두산촌에 위치하였다. 1936년 2월에 액목에서 왕덕태는 여러 항일부대의 지도자들과 회견하고 연합하여 공동으로 항일할 것을 호소하였다. 1936년 초에는 영안현 5군 근거지에서 주보중과 만났다. 같은 해 3월 미흔진회의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왕덕태는 군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장백·무송·임강·안도·돈화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6년 7월 금천현 하리회의에서 제1로군 부총지휘 겸 제2군 군장을 맡았다. 또한 남만성 위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36년 8월 17일 무송현성을 기습하였고, 9월 무송현 탕하 일대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10월 10일 돈화현 남쪽의 동청구에서도 전투를 지휘하였다.

활발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왕덕태는 1936년 11월 하순 임강과 몽강 접경지대 소탕하(지금의 훈강시 송수진공사 대안대대)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 신주백,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론 연구II : 만주 항일무장 투쟁 자료편』(새길, 1990)
  • 『동아일보』(1935. 3. 28, 10. 15)
  • 『조선중앙일보』(1935. 3. 28,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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