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沈得龍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관직|경력 | 중국 공산당 당원|동북 인민 혁명군 소대장|소련군 참모본부정보 요원 |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5월 29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대 |
| 출생지 | 동안성(지금의 흑룡강성) 요하현 |
| 거주|이주지 | 하얼빈, 대련 |
일제 강점기 하얼빈과 대련에서 중국과 소련의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소련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1938년 소련군 참모본부에서 무전에 관한 정보 교육을 받았다.
1911년 5월 29일 중국동안성(지금의 흑룡강성) 요하현에서 출생했다. 9세 때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 심금룡과 지냈다. 이후 하얼빈, 대련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가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심득룡은 중국과 소련이 일본 침략에 투쟁하기 위해 1941년 공동으로 거점을 만들었을 당시 중국과 소련의 정보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3년 4월 장춘에 위치한 관동군 86부대 헌병대가 운영하는 무선통신 수색반에게 무전으로 교신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심득룡은 왕요선, 왕학련, 이충선과 함께 1944년 대련 헌병대에 압송되어 731 부대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1929년 4월, 삼촌 심일성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에는 만주지역 항일인민유격대의 연합조직인 동북 인민 혁명군 소대장 겸 청년단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생 심금룡이 일본 침략군 토벌대에 의해 체포, 살해되었다. 이후 심득룡은 동북 인민 혁명군 정치부 이두문의 추천으로 소련 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심득룡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고, 1938년 소련군 참모본부에서 무전에 관한 정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1940년 3월 27일, 심득룡은 모스크바를 떠나 아라본토(지금의 카자흐스탄)와 신강을 거쳐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란주 팔로군 사무소에서 수속을 밟은 이후 팔로군 군관 신분으로 연안에 가서 중공 중앙당 사회부 상보진 부장과 소련 공산당 기관 진리보 책임자를 만나기도 하였다. 이후 심득룡은 현재 하북성 근처의 기중구로 갔다. 당시 중공 기증구 사회부상보진 부장은 그를 천진으로 데려가 왕요헌이라는 사람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심득룡을 공장에 취업시켜 공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상보진과 심득룡은 대련으로 갈 수 있는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마련하여 하얼빈, 대련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가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왕요헌이 모든 재정을 지원하기로 하고 대련에 있는 흑석조에 흥아 사진관과 남산지구에 부흥 문구점을 세워 운영하였다. 이 때 심득룡은 왕요헌의 친척인 이진성에게 사진 기술을 배웠다. 심득룡은 이곳을 정보 활동을 할 수 있는 정보거점으로 발전시켰다. 심양, 본시, 천진, 북경에도 정보 거점을 점차 넓혀 나갔다. 당시 심득룡은 진원, 이경춘, 이성화라는 별명으로 활동하였다. 심득룡이 중국과 소련의 정보 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공 중앙당 사회부와 소련군 참모본부의 전략이 있었다. 중국과 소련은 당시 일본 침략에 투쟁하기 위해 1941년 공동으로 거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1943년 4월 장춘에 위치한 관동군 86부대 헌병대가 운영하는 무선통신 수색반에게 무전으로 교신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일본 헌병들은 심득룡을 조사하여 그가 모스크바에서 무선 통신 교육을 받았고 연안을 거쳐 천진에서 대련으로 들어오게 된 것을 알아냈다. 결국 1943년 10월 1일 86부대의 대련 헌병대와 정찰부대, 과학수사반 70여 명이 심득룡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심양, 본시, 천진, 북경에 있던 나머지 무전공작을 위한 위장 정보 거점들도 발각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대련 헌병대에 체포된 무전공작원은 7명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심득룡, 왕확련, 이진성, 이충선, 류만회, 양학례 등이었다. 심득룡은 왕요선, 왕학련, 이충선과 함께 1944년 대련 헌병대에 압송되어 731 부대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이후 소식은 끊겨져 알 수 없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