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한자 金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평양 만세운동|북로 군정서|사관 연성소 구대장(區隊長)|백운평전투|어랑촌전투|황포군관학교 집훈처 교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0월 21일
활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몰년 시기/일시 1938년
출생지 평안북도
학교|수학지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학교|수학지 곤명
활동지 왕청현 십리평
활동지 화룡현 삼도구
활동지 상해
활동지 광동성 황포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와 노령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훈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춘식(春植)·양림·양주평·양녕(楊寧)·베스티(弼士第)·주(周) 등 다양한 이명을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 만주 및 노령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로,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 산하 사관 연성소 구대장, 황포 군관 학교 집훈처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김훈은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양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늦가을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성(吉林省)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 1920년 5월 졸업하였다. 그 후 김훈북간도로 가 북로 군정서에 참여하였다. 북로 군정서는 1919년 10월 만주북간도 지역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서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군정부(軍政府)가 모태가 되었다. 이 조직의 중심 인물은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朴性泰)·정신(鄭信)·박영희(朴寧熙)·이홍래(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성(金星) 등 이었다.

1919년 12월 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로 군정서로 개편되었는데, 북로 군정서의 명칭은 서간도 지역의 서로 군정서와 함께 서간도와 북간도 방면의 군정(軍政)을 분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로 군정서의 조직 당시 주요 간부를 보면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 경리 계화, 길림분서 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현(梁玄) 등이었다. 북로군정서에는 대종교(大倧敎) 신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은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배양하여 일제를 물리치고 이상국가인 배달국(倍達國)을 지상에 재건하고자 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1920년 2월초에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十里坪)에 사관 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5세 이상 40세까지의 청장년을 대상으로 사관생도를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 연성소에서는 사령관인 김좌진이 연성소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교수부장에는 나중소, 교관에는 이장녕·이범석·김규식 등이 활동하였으며 이 때 김훈은 구대장(區隊長)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9월 9일 왕청현 십리평에서 제1회 사관 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들 졸업생 중 200명을 중심으로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였을 때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대장 나중소, 부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 이범석, 소대장 이민화(李敏華)·남익(南益)·이탁(李鐸) 등을 들 수 있다.

1920년 10월 16일 만주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서 북로군정서 사령부와 홍범도(洪範圖)·안무(安武)·최진동(崔振東) 등의 부대가 청산리 전투를 앞두고 연합작전회의를 개최하였을 때, 김훈은 북로군정서 사령부에 소속되어 제2연대 종군장교로 이민화·백종열(白鍾烈)·한건원(韓建源) 등과 함께 편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21일 만주 화룡현 삼도구 백운평(白雲坪)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소좌 안천(安川)이 이끄는 부대와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이 때 일본군의 전사자는 1천여 명이라고 하며,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0명, 중상 3명, 경상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22일 화룡현 삼도구에서 제2지대 소속인 김훈은 그의 중대원들과 함께 동쪽의 만록구(萬鹿溝) 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일본군 중대장 도전(島田)이 지휘하는 부대와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또한 어랑촌(漁郞村)에서도 일본군과 전투 중 김훈은 중대원과 한건원 중대를 지휘하여 후방에서 본대의 철수를 엄호, 부대를 무사히 철수하도록 하였다.

김훈은 1921년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상해로 가 동년 2월 20일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석하여 청산리 전투 당시 독립군의 용감성에 대하여 선전하고 무기와 인원이 부족하여 퇴각한 것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1921년 5월 10일 상해 임시정부 내 무장 투쟁파인 이동휘파(李東輝派)에 가담하여 노태연(盧泰然)·도인권(都寅權) 등과 함께 군사력 양성과 외교 문제를 담당하면서 활동하였다.

1921년 이후 김훈은 곤명으로 가 이름을 양주평이라고 고치고, 운남 강무 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학하여 제6대 제1구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23년 말 이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황포군관학교에서 집훈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북만으로 옮겨가 계속 항일전에 참가하였다가 1938년경에 전사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 民族 運動 年鑑』(駐上海 日本 總領事館, 1946)
  • 채근식, 『무장 독립운동 비사(武裝 獨立 運動 秘史)』(대한민국 공보처, 1949)
  • 『한국 독립운동사(韓國 獨立 運動史)』(애국 동지 원호회, 1956)
  • 『한국 민족 운동 사료(韓國 民族 運動 史料)-중국편-』(국회 도서관, 1976)
  •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 공훈록(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12 (국가 보훈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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