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河球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만주·노령지방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신민회 회원|궁내부 주사|한인신보주필|전로한족회 중앙총회 헌장 기초위원|상해파 고려공산당|선봉 주필 |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룡암동 |
| 거주|이주지 | 일본, 만주 |
| 학교|수학지 | 일본동경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길림성 돈화현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훈춘현 대황구, 밀강 |
| 활동지 | 길림성 영안현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한말·일제 강점기 만주와 노령 지방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김하구는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에서 『한인 신보』 주필로 활동하였고 전로한족중앙총회 헌장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가 ‘12월 테제’가 결정된 이후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하구의 본적은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용암동이다. 김하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6년에는 한북학회, 1907년에는 신민회에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에서 탁지부(度支部) 대신 이용익(李容翊)의 손자 이종호(李鍾浩)와의 친분관계로 한 때 궁내부 주사로 근무하였다.
김하구는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하였고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신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8년 1월 러시아 귀화 조선인 단체인 고려족 중앙총회와 친볼세비키 조선인 단체인 노령한인회(露領韓人會)를 연합하여 전로 한족 총회(全露韓族總會)를 결성하고 헌장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때 장기영(張基永)과 함께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9년 11월 김하구는 『한인신보』를 복간하고 한인 사회당의 확대에 힘썼다. 1920년 4월 일본군의 연해주 점령으로 백위파 정권이 수립되자 신한촌을 떠나 상해로 돌아갔다.
1921년 5월 김하구는 시베리아 한인사회당, 국내 사회혁명당, 상해 한인사회당 성원들과 함께 상해파 고려 공산당을 창립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11월에는 돈화(敦化)에서 고려공산당 돈화군위원회를 건립하는 한편, 간도 대한국민회로 하여금 러시아볼세비키정권을 지지하고 고려공산당(상해파)에 가입하게 하였다. 그 후 요하(饒河)에서 고려공산당 조직을 건립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김하구는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이르쿠츠크 계열과의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상해파의 성원으로 참가하였고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봉』의 주필이 되었으며 훈춘현 대황구(大荒溝)와 밀강(密江) 지역에 특무기관을 설치해 군사·정탐·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6년 5월 길림성 주하현(珠河縣) 일면파(一面坡)에서 조봉암(曺奉岩)·윤자영(尹滋瑛)·김철훈(金哲勳)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이 결성될 때 김하구는 중앙 집행 위원이 되었고 10월 만주총국 내 화요파의 독단적 행위에 불만을 가지고 상해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탈퇴했다. 1927년 10월에는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만주총국이 와해되자 당의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주하현 하동(河東)에서 당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 참석하였다.
1928년 12월 조선 공산당 재건에 관한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를 접수하고 상해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설에 관해 협의했으며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 후원 사업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