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元默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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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관직|경력 | 고려 공산 청년회 간도총국 선전부 담당 집행위원|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5월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미상 |
| 수학|강학지 | 러시아모스크바 |
일제 강점기 만주와 노령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고려공산 청년회 간도총국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제2차 테러 사건’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원묵은 1908년생이며, 이명으로 김해일(金海一)을 사용하였다. 1921년 간도에서 등사판으로 발행되었던 『애국 신보(愛國申報)』를 발행하던 인물이 김원묵이라는 『동아 일보』의 보도로 보아 김원묵은 10대 후반부터 이미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12월 고려공산 청년회 간도총국 대회에 참가하여 선전부 담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 5월, 김동명(金東明)·이주화(李周和)·강우(姜宇)·홍원석(洪源錫)·한진(韓震)·전승우(田承雨)·최동욱(崔東旭)·김훈(金勳)과 함께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총국위원이 되었다.
1929년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 본과에 들어가 4년제 과정을 2년에 마쳤고 1932년 3월 태평양 노동 조합 블라디보스토크 사무국 간부로서 적색 노동 조합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제2차 테러 검거 사건’ 당시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며 『노동자 신문』 발간 책임을 맡았다.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9월 고문으로 인해 함흥 도립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던 중 탈출했으나 2주일 만에 함흥 경찰서에 체포되어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