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東明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만주지방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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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관직|경력 |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총국의 책임자 |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함경남도 북청군 |
| 수학|강학지 | 러시아모스코바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동명은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을 졸업하고 고려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을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김동명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지종(金知宗)이며, 이명으로는 김황(金晃), 김광(金光)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고,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화요회 계열의 단체인 한양 청년 연맹 상무 집행위원, 혁청당(革淸黨) 당원, 신흥 청년 동맹 상무 집 행위원장, 조선 기근 구제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김동명은 1925년 4월 고려공산 청년회가 결성되자 참가하여 중앙 검사위원이 되었다. 1925년 12월 ‘제1차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신의주 사건)’에서 벗어난 이후 김동명은 권오설(權五卨)을 책임비서로 선출하여 고려공산 청년회를 재건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6년 초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일본을 거쳐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후 고려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받고 당 전권위원인 조봉암(曺奉岩)과 함께 5월에 만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김철훈, 윤자영, 김하구와 함께 길림성 주하현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결성을 결성했다. 김동명은 고려공산 청년회 만주총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8월 용정에서 김동명은 박윤서(朴允瑞)를 만나 고려공산 청년회 만주총국과 만주고려공산 청년회와 공동 활동을 이끌어 냈으며 조선 공산당과 고려공산 청년회의 만주총국 개편 때 당 선전부를 담당하였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1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1933년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