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大池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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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일합사|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의열단 단원 |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10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10월 26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
| 거주|이주지 | 중국 만주 |
| 학교|수학지 | 경남 밀양 |
| 활동지 | 경남 밀양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 길림 |
| 활동지 | 중국 북경 |
| 활동지 | 길림성 영고탑 |
일제 강점기 국내와 중국에서 활동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대지는 1905년 밀양 지역의 항일 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한 후 민족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대지는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안확(安廓)·이각(李覺)·이영재·명도석(明道奭)·황상규(黃尙奎)·윤치형(尹致衡) 등과 비밀결사 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다. 일합사는 밀양 청년 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이후 풍기에서 ‘광복단’이 결성되자 동지들과 함께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김대지는 1917년 만주의 길림·봉천 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를 모색하다 체포되어 1918년 5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평양 복심 법원에서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김대지는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동삼(金東三)·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초대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5월경에 독립운동을 위한 투사 육성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책을 협의하고 황상규와 비밀 결사단체 창단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였다. 1919년 7월에 김원봉·이종암과 같이 길림을 떠나 폭탄 제조법과 그 사용법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상해로 갔다.
김대지는 1919년 11월에는 임시 정부의 조사원 자격으로 고향인 밀양에 파견되었다. 조사원은 국내 각 지방의 유력자·재산가·학교·종교 등의 실태를 조사하여 임시 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김대지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에 참여하여 조직의 구성 및 무기 구입 및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여 투쟁에 대비하였다. 그 와중에 곽재기(郭在驥)의 밀양 폭탄 의거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는 등 1920년대 의열단이 수차례 전개한 암살·파괴 운동에 사용된 무기와 폭탄 구입의 일을 전담하였다. 이후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수차례 펼쳐진 무장 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대지는 1920년 9월경 박용만·신숙·신채호·장건상, 남공선 등과 함께, 국내외를 망라한 각지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단일화를 통한, 새로운 통일 독립운동 단체를 모색코자 ‘북경 군사 통일회’를 발기하였다.
1928년에 김대지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의료업(醫療業)에 종사하면서 지하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2년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그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