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겸

한자 池喜謙
분야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남자
대표관직|경력 동만 청년 총 동맹 집행 위원|연변대학 역사 학부 부교수
출생 시기/일시 1903년 11월 1일
활동 시기/일시 1928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78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80년 7월
몰년 시기/일시 1983년 6월 30일
거주|이주지 길림성
거주|이주지 길림성
거주|이주지 흑룡강성
거주|이주지 길림성
수학|강학지 영안(寧安)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개설

지희겸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로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조선 국내 의병 운동에 참가 하였던 아버지 지장회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할 때,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연길 하남으로 건너왔다. 그곳에서 지희겸은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이후 지희겸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활동 사항

지희겸은 1910년 9월 가족과 함께 연길(延吉)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1922년 1월 영안(寧安)에 있던 길림성립(吉林省立) 제4 중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6월까지 수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1925년 7월 강동주(姜東柱)의 소개로 만주고려 공산 청년회에 가입하고, 1927년 7월 이창희(李昌熙)의 소개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입당하였다.

지희겸은 1927년 10월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에서 벗어난 이후, 1928년 3월 연변조선 공산당[ML파]이 소집한 연변 각지 청년 대표 대회에서 지희겸동만 청년 총동맹 위원, 연길현 연맹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1928년에 연길현 청년 연맹 집행위원장, 고려 공산 청년회국자가(局子街)의 조직부장을 역임하였다.

1928년 8월 동만 청년 총동맹의 중앙 집행위원장에는 최영근(崔榮根)이 선임되었고, 지희겸은 김두용(金斗容), 김하정(金河晶), 김진택(金振鐸), 조숙정(曺淑貞), 전빈(田斌), 장병호(張炳鎬), 문일파(文一波), 조희열(趙喜烈), 김종철(金鍾哲), 원봉희(元鳳熙) 등과 함께 중앙 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1928년 9월 2일 국제 청년 데이를 기념한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같은 달 ‘제2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72명의 조직원들이 검거될 때 지희겸은 영안현으로 피신하였다.

영안현에서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의 제8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8년 10월 ML그룹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북만주 제2도(道) 책임자가 되었다. 1929년 3월에는 길림성 쌍하진(雙河鎭)에서 열린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 제2차 대표자 대회에 참가하였다.

1930년 9월 영안에서 황기범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 10월 밀산현(密山縣) 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여 서기가 되었다. 1930년 12월 밀산현에서 중국 공산당의 좌경적인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무장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잠시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3월 목릉(穆陵)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 조직을 세우기 위한 준비 활동에 종사하다 변절자의 신고로 일제 경찰에 체포, 하얼빈 제3 감옥에 투옥되었다.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하얼빈 총공회(總工會) 내 당 조직 서기가 되었다. 1931년 12월 주하현에서 중국 공산당 주하 특별 지부를 건립하고 서기가 되었다.

지희겸은 주하현에서 반일회와 자위대를 조직, 철도를 파괴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인 민회를 박멸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3월 중국 공산당 주하 중심 현위원회(珠河中心縣委員會)가 결성될 때, 서기가 되어 5개 현(縣)의 당 사업을 담당하였다. 1932년 9월 ‘홍창회(紅昌會) 사건’으로 조직원 중 몇 명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것이 문제가 되어, 주하 중심 현위원회 서기직에서 해임 당하고, 비서처 사업을 담당하였다.

1933년 4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신의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6년 1월 만기 출옥 후, 연길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때 중국 공산당 조직과의 연계가 끊어졌다. 1944년 9월 다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구금되었다가 1945년 4월 석방되었다.

1945년 9월 연길에서 연변 노농청 총동맹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45년 10월 중국 공산당에 다시 입당하여 연변 위원회 선전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연변 노농청 총동맹의 제3차 확대회의를 계기로, 이 조직을 연변 인민 민주 대동맹(延邊人民民主大同盟)으로 개조하였는데, 이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연변 철도국장이 되었다.

1946년 3월 중국 공산당 길동분성위(吉東分省委) 산하 연길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7월 연길현 춘흥구(春興溝) 토지 개혁 공작대 대장으로서 춘흥구에서 토지개혁을 주도하였다. 1947년 5월 군정 대학(軍政大學) 길림 분교 고급 연구반에 입교했으나, 과거 경력이 문제가 되어 당적에서 제명되었다. 1948년 2월 연변일보사 번역부 기자, 1948년 10월 연변 의과 전문 대학 교도 주임을 맡았다.

1949년 4월 연변대학 의학부 교무 과장, 사범 학원 역사 강좌 강사를 지냈다. 1961년 7월부터 1년간 북경(北京) 사회주의 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78년 7월 연변대학 역사학부 부교수로서 조선사를 강의하였다. 1980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 협상 회의 부주석,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길림성 위원회 상무 위원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연변 당사 사건과 인물』 (연변인민출판사, 1988)
  • 『한국 공산 주의 운동사』 3~4권(김준엽·김창순 편, 청계 연구소, 1973~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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