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相卨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대한제국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법부협판|대한협동회|서전 서숙|헤이그 밀사|성명회|13도의군|권업회 의사부의장|대한광복군 정부 정통령 |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12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3월 2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
| 거주|이주지 | 한성 |
| 거주|이주지 | 블라디보스토크, 연길현 용정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연길현 용정촌 |
| 활동지 | 네덜란드헤이그 |
| 활동지 | 콜로라도주 덴버시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묘소 | 충청북도 진천군 산척리 |
한말과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며, 7세 때 전 이조참판 이용우(李龍雨)의 양자로 입양 되었다.
이상설은 어린 시절 서울로 이주하여 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교유하였고, 영어·수학·국제법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894년 이상설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성균관관장, 한성사범교관, 탁지부재무관,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부터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와 친교를 맺고 영어 등 외국어와 국제법·경제학·수학·물리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04년 일본의 조선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인 대한 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1905년 법부협판(法部協辦)·학부협판(學部協辦)·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을 지냈다.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이상설은 대신회의 실무자인 참찬이었지만 일본의 제지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에 이상설은 을사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는 상소를 올려 이를 찬성한 이완용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 등과 협의하여, 백관이 조약의 무효 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다. 이 해 11월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이상설은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서 김우용(金禹鏞)·박정서(朴禎瑞)·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민족의 독립사상 고취를 위하여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학교 건물은 이상설 사재로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매입하여 개수하였으며, 교사의 월급·교재비·학생 학용품 등 경비 일체를 이상설이 부담하였다.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국제공법·헌법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또 함경도 온성·종성·회령 등을 방문하여 서전 서숙의 설립목적과 민족교육 및 신학문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며 자제들을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정치문제로 제기하고 열국의 후원을 받고자 했지만,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상설은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 등을 순방하면서 계속 일제의 침략상을 연설하였다.
1908년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제국의 독립지원을 호소하였으며, 그 해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김학만(金學萬)·이승희(李承熙)·정순만 등과 함께 노령 국경지대인 밀산현(密山縣)봉밀산(蜂密山) 부근에 황무지 45방(方)을 구입하여 한인 100여 가구를 정착시키고,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이성설은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 등과 연해주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8월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였다.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해 각국에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연해주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
1911년 5월 이상설은 이종호(李鍾浩)·엄인섭(嚴仁燮)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의사부(議事部)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 이동휘(李東輝)·이종호 등과 길림성(吉林省) 동녕현(東寧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웠다. 1914년 이상설은 이동휘·이동녕·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미주에 퍼져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때 이상설은 정통령(正統領)에 취임하였지만, 그 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내에서 한국인의 모든 정치·사회 활동이 금지되었다. 또 9월 정부 수립의 모체가 된 권업회가 해산 당하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이상설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다.
니콜리스크에서 사망 후 이상설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서 화장하고, 그 재는 북해 바다에 뿌려졌다. 1972년 충청북도 진천군 산척리 134-2(이상설안길 10)에 이상설의 사당 숭렬사(崇烈祠)를 세웠는데, 사당 옆에 묘를 조성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