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光民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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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동화학교 교원|정의부 중앙 집행 위원|법무위원장|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대표 |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5월 |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10월 18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도곡 |
| 거주|이주지 | 봉천성 |
| 학교|수학지 | 통화현 합니하 |
| 활동지 | 통화현 삼도구 |
| 활동지 | 만주 길림성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길림성 반석현 |
| 활동지 | 길림성 반석현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광민은 1915년 백부(伯父) 이상룡(李相龍)을 따라 중국봉천성(奉天省)으로 망명하였다. 유하현(柳河縣)의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를 수료한 후, 1916년 통화현(通化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동화 학교(東華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에 주력하였다.
1923년 국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적 기관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다. 당시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와 창조파로 양분되어 결렬되고, 창조파에서는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정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령 내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추방당하게 되고, 중국동삼성(東三省)에 진출한 신숙(申肅)·윤해(尹海)·양기탁(梁起鐸)·편강렬(片康烈) 등은 박관해(朴觀海)·이장녕(李章寧)·이청천(李靑天)을 설득하여 전만주통일의회주비회(全滿洲統一議會籌備會) 발기회(發起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이광민은 군정서(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협의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에서는 군자금 모금을 위해 동삼성(東三省)과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10월 24일 이광민은 정의부 중앙위원과 법무위원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을 위해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3부 통합 논의가 열릴 때, 이광민은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정의부 대표가 되어 길림성(吉林省)신안둔(新安屯)에서 열린 각 단체 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또 그해 5월 길림성 반석현(盤石縣)의 한족 노동당(韓族勞動黨)에서 한인보호를 위하여 보호회(保護會)를 조직할 때에 참여해, 김상덕(金尙德)·김응섭(金應燮)과 함께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광민은 1928년 5월에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인 여족 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