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朱健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북로독군부 부관|봉오동, 청산리전투 참전|조선 공산당 만주총국|간도 5·30봉기주도|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한족위원회 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10월-1931년 9월까지 |
| 활동 시기/일시 | 1831년 3월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함경남도 북청군 |
| 거주|이주지 | 동만주 일대 |
| 활동지 | 연길현 숭신향 장흥동 |
| 활동지 | 연길현 용정 |
| 활동지 | 연길현 |
| 활동지 | 봉오동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 활동지 | 연길현 옹성랍자 |
| 활동지 | 용정 |
| 활동지 | 길림성 영안현 |
| 활동지 | 용정 |
| 활동지 | 돈화현 |
| 활동지 | 용정 |
| 활동지 | 용정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주건은 1913년 연길현(延吉縣) 숭신향(崇信鄕) 장흥동(張興洞)에 있는 흥동학교(興東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철혈 광복단(鐵血光復團)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만주 지방의 대표적인 무장단체였던 대한국민회 무장부대인 대한국민회군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대한 국민회는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함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1920년 5월 대한국민회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조직하였다. 주건은 이 단체에 가담하여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대한 북로 독군부 부장 최진동(崔振東), 부관 안무,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 홍범도(洪範圖), 참모 이병채(李秉埰), 향관 안위동(安危同), 군무과장 이원, 군무과 구자익(具子益), 회계과장 최종하(崔鍾夏), 검사과장 박시원(朴施源), 통신과장 박영(朴英)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주건은 1920년 6월 봉오동(鳳梧洞) 전투, 10월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참전하여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고,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를 이루었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제19사단의 ‘간도출병’을 피해 소련 영내로 퇴각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 사변을 겪은 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주건은 1921년 10월 서간도군비단과 대한국민회군이 대한의용군사회로 통합될 때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후 소련의 시베리아 내전에 참가해 백위군(白衛軍)과 싸웠다.
주건은 1923년 해삼위 신한촌백산학교에서 46명의 청년들이 모여 적기단(赤旗團)을 결성할 때 여기에 참가하고, 북만주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적기단은 1923년 2월초 만주 닝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서 대한국민회 간부 최웅렬(崔雄烈)·한상오(韓尙五), 의열단원 오성륜(吳成崙)·김강(金剛)·이열(李烈)·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모여 일제 관공서의 파괴, 일제관리 처단, 친일부호의 재물 탈취 등을 목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결성과 동시에 「적화운동결의 赤化運動決議」를 발표했는데, 내용은 적색혁명을 위해 불완전한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무장행동과 문화운동을 병행하며, 특히 게릴라전의 전개가 당면한 중요 임무라는 것 등이었다. 이념적으로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적 지향도 보이지만, 민족혁명이든 공산혁명이든 한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가리지 않겠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가 기본이었다. 따라서 같은 해 6월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국민회(國民會)·의군단(義軍團) 등 우익 민족주의 단체들과 연합회의를 갖기도 했다
주건은 1923년 8월 연길현 옹성랍자(甕聲磖子)에서 상해 콤그룹(고려공산동맹)의 만주 지역 지도조직인 고려 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24년 8월 용정(龍井)의 영신중학(永新中學) 교사로 재직하며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주건은 1926년 5월에 결성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입당하였다. 한때 동만구역국 옹성랍자 야체이카의 책임자로 활동했으나, 만주 고려공산 청년회와의 합동 문제 등으로 만주 총국 내 화요회 그룹과 갈등이 일어나는 등 불협화음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상해 콤그룹원들이 만주총국을 이탈, 1927년 용정에서 만주 공산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였다. 주건은 이 때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의 특별 결정에 의해 조선 공산당의 지부승인이 취소되었다. 이에 상해 콤그룹은 서울 콤그룹의 구파와 연합, 1929년 3월 조선 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주비회, 곧 재건그룹을 결성하였다. 1929년 1월 공산당 재건을 위하여 만주의 둔화(敦化)에 있는 주건(朱建)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는 김철수·김영만·윤자영·김영식·김규열·김일수·오이세·강문수·안상훈 등이 참가하였다. 여기서 조선 공산당 재건설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으로 김철수를 선출하였다. 주건은 1929년 9월에 재건설그룹의 만주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은 ‘1국 1당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에 중국 공산당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한 재건설그룹은 내부에서 만주에 거주하는 사람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국내에 들어가 활동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30년 6월 만주부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주건은 이보다 앞선 4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 중국 공산당 연변(延邊)특별지부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5·1 투쟁 행동 위원회에 참가해 동만주 지방에서 반제 반봉건운동을 지도하며, 그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던 1930년 5월 30, 31일에 일어난 ‘간도 5·30봉기’를 지도하였다. 간도 5·30봉기로 일제의 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 출장소 등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조선인 지주의 가옥을 방화하고 철도·교량 등을 파괴했다. 그 해 10월부터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 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1931년 9월까지 활동하였다.
주건은 1930년 가을경 동만 특별 위원회 산하 조선국내공작 위원회가 결성되자 위원에 임명되어, 과거 재건설 그룹이나 이 그룹이 1931년 3월 이름을 바꾼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를 통해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였다. 1931년 3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산하의 한족(韓族)위원회 위원도 겸직하였다.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난 후에는 항일 유격대를 세우는 데 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