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鄭玄英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당원|항일 농민 시위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10월 |
| 활동시기/일시 | 1930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
| 거주|이주지 | 간도 |
| 활동지 | 길림성 연변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정현영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살다가 1927년 3월 간도로 이주하였다.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의 당원으로서 항일 농민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정현영은 1928년 10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당원이 되어 활동했다.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은 조선 공산당의 국외조직으로서 1926년 만주 영안현 영고탑에서 조봉암·최원택·김동명·윤자영·김하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비서부·조직부·선전부를 두고, 초대 책임비서에 조봉암이 취임하였다. 만주총국은 화요파·ML파·서울-상해파 세 파벌이 서로 대립했는데, 결성 초기에는 화요파를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해 1국 1당 원칙에 따라 재만 한인들은 조선 공산당을 해체하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정현영은 1930년 3·1 운동 11주년 기념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 위해 조직한 전동만(全東滿)폭동위원회 회원이 되어 항일 농민 시위에 동참하였다가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31년 1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