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全在一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용정 3.1 운동|임시정부 함경북도 연통제|동흥중학교 후원회장 |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5월 1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이후 |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9월 3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경성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연길현 용정 |
| 활동지 | 연길현 용정 |
| 활동지 | 함경북도 경성 |
| 활동지 | 길림성 용정 |
| 활동지 | 길림성 용정 |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전재일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모든 가족을 이끌고 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문화 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에 용정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전재일은 시신 매장 및 부상자 위문 등의 활동을 펴다가 재류금지(在留禁止) 처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설치하였는데, 이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지방행정기관으로서 임시정부의 군자금 수집과 함께 통신업무도 관장하고 있었다.
전재일은 1919년 8월 송윤섭(宋允燮)·이상호(李相鎬)·박두환(朴斗煥) 등과 함께 함북 연통제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동지 47인과 함께 체포되어 청진(靑津) 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전재일은 용정으로 돌아가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23년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3·1 운동 당시 희생자 13명의 가매장자를 발굴하여 공동 묘지를 마련하여주고 매년 성묘와 제를 지내 애국정신을 기렸다. 그곳에서 일제의 탄압대상인 동흥 중학교(東興中學校)의 후원회장을 역임하면서 후진에게 애국독립정신을 심어주었다.
광복 후 전재일은 간도 용정 일대의 자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반공민주전선 구축에 앞장서서 공산당과 투쟁하다가 월남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