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哲漢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삼도구 청년총연맹회 간부|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당원|간도 5.30 봉기 |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함경북도 부령 |
| 활동지 |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
| 활동지 | 영안현 영고탑 |
| 활동지 | 길림성 연변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철한은 일제 강점기 중국길림성에 거주하면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화요파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간도 5·30봉기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일제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철한은 1927년 7월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년총연맹회에서 간부생활을 하였다. 이후 1929년 8월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일명 화요파(火曜派)의 당원이 되었다.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은 조선 공산당의 국외조직으로서 1926년 만주 영안현 영고탑에서 조봉암·최원택·김동명·윤자영·김하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비서부·조직부·선전부를 두고, 초대 책임비서에 조봉암이 취임하였다. 만주총국은 화요파·ML파·서울-상해파 세 파벌이 서로 대립했는데, 결성 초기에는 화요파를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따라 화요파는 1930년 6월 조직을 해체하였다.
코민테른의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1930년 이후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에서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 조직에 가입해야 하였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간도를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대중폭동, 토지개혁, 소비에트 건설 등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 첫 시도가 1930년 5월 ‘간도 5·30 봉기’였다. 일제는 조선군 75연대를 투입하여 한인을 대량 검거하고 85명을 서울까지 압송하였다. 간도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철한은 1930년 3월 전동만 폭동 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아 사회주의 사상 전파 및 동지 규합 등에 힘썼다. 그리고 ‘간도 5·30봉기’에 가담하였다가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85명 가운데 그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철한은 1932년 5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