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松雲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동북 인민혁명군|보천보전투|조선 노동당 최고 인민 회의 상임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195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출생지 | 함경북도 성진 |
| 거주|이주지 | 동만주 |
| 활동지 | 길림성 훈춘현, 연길현 |
| 활동지 | 장백현 |
| 활동지 |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 |
| 활동지 | 평양 |
| 활동지 | 평양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정치인.
이송운은 1935년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제3군단 대원으로 입대하여 길림성 훈춘현(渾春縣)과 연길현(延吉縣)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송운은 1937년 1월 장백현의 산중에서 김일성과 박달 등과 회견하여 갑산 공작 위원회라는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박금철·박달·허석선·김왈룡·허학송·이효순 등 함경남도 북부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송운은 1937년 6월 보천보(普天堡)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후 ‘혜산 사건’이라 불리는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관련자로 지목되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송운은 1942년 2월 함흥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혜산사건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측이 김일성(金日成) 부대의 보천보(普天堡) 습격작전 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이 기소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종료된 후 함경남도 국경지방 항일 조직과 만주 항일 무장 투쟁 세력과의 연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편 이송운과 함께 이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박금철·허학송(許鶴松)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북한체제 건설과정에 중요한 자원으로 참여하였으나, 1967년 이른바 ‘갑산계 사건(甲山系事件)’으로 대부분 숙청되었다.
이송운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출감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 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부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중반부터 1956년 초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검찰소 검사총장직에 있으면서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朴憲永)과 이승엽(李承燁) 에 대한 비공개 숙청재판에 가담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송운을 비롯한 김일성의 ‘빨치산파’들은 1956년 제3차 당 대회에서 대거 등장하여 크게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위원 현황을 보면 중앙 위원회의 정위원에는 11명이, 후보 위원에는 6명이 선출되었고, 6명의 최고위급 중앙 위원 가운데서는 4명이 그와 같은 빨치산 출신이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인 11명의 빨치산은 서열 순으로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광협, 최현, 유경수, 김경석, 이영호, 김창덕, 이송운 등이며, 중앙 위원회 후보 위원인 6명의 빨치산 출신은 석산, 오진우, 최광, 최용진, 김창봉, 서철 등이었다.
이후 이송운은 조선 노동당 평양시 위원장,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조선노동당 최고 인민 회의 상임위원, 주소(住蘇)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