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沈茹秋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언론인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용정3.13만세운동|대동일보기자|고려청년|무정부주의운동|민성보|연변조사실록 연재 |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6월 1일 |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 수학 시기/일시 | 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4월 4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6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
| 학교|수학지 | 길림성 연길현 |
| 학교|수학지 | 북경 |
| 활동지 | 길림성 연길현 용정 |
| 활동지 | 길림성 장춘현 |
| 활동지 | 북경 |
| 활동지 | 북경 |
| 활동지 | 길림성 연길현 용정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심여추는 1919년 고향을 떠나 친척의 도움으로 연길(延吉)도립이중(道立二中)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이 간도지역으로 전해지자, 그는 간도지역에 있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곧 3월 13일 독립축하회가 끝나자 명동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충렬대가 앞장서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가운데 시위행진에 들어가자, 유서(柳絮)·박관해(朴觀海) 등과 함께 충렬대에 참가하여 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심여추는 1923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장춘(長春)의 대동 일보(大同日報) 기자가 되었다. 1924년에는 북경(北京)으로 가서 무정부주의 계열의 신문인 「국풍 일보(國風日報)」의 편집자가 되어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북경민국대학(北京民國大學)에서 중국인 무정부주의자 향배양(向培良)·고장홍(高長虹)·이패감(李伂甘)등과 함께 학생들을 규합하여 무정부주의를 연구하고 선전하였다.
1925년 경 심여추는 무정부주의자인 유서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 후 북경법정대학(法政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1926년 3월 27일 여군서(呂君瑞)와 함께 무정부주의 계열 잡지 「고려 청년」을 발행하여 무정부주의를 고취하였다.
심여추는 1928년 여름 간도 한인사회의 실태를 조사하여 「민성보(民聲報)」에 ‘연변조사실록(延邊調査實錄)’을 연재하였다. 이 책에서 연변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민족특별자치구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족의식과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심여추는 1929년 가을 활동 거점을 만주로 옮겨 연길의 도태부(道台府)에 근무하면서 김좌진(金佐鎭) 등과 교류하였고, 중국어 양성소를 만들어 한인들에게 중국어를 교육시켰다. 또한 만주에 거주하는 가난한 동포들을 도와주었으며, 토지소송에 대하여 상담해 주기도 하였다. 1930년 4월 4일 용정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암살되었다.
『연변조사실록』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