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孫元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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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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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자 |
| 대표경력 | 중국 공산당 금곡촌 당지부 서기|문화 선전 활동 |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
| 출생지 | 길림성 화룡현 금곡촌 |
| 학교|수학지 | 길림성 화룡현 |
| 활동지 | 길림성 화룡현 금곡촌 |
| 활동지 | 화룡현 어랑촌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중국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금곡촌(金谷村)이다. 화룡면원동 학교에서 수학한 후 길림성 연길현의 직업 학교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1928년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해 조선 공산당과 조공 만주 총국이 해체되자,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1국 1당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의 정세가 불리해지자 만주성 위원회는 일제와 장학량 군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총동원할 목적으로 투쟁이 끝나면 중국 공산당에 가입시켜 주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많은 조선인 공산 당원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손원금도 1930년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어 당산구역과 노동자 구역에서 비밀 활동을 전개하였다. 11월 중국 공산당 금곡촌 당지부 서기가 되자, 야학을 개설하고 조직한 문예 선전대를 통해 반일 선전 활동에 전념하였다.
1931년 5월 금곡촌 야산에서 무장 투쟁을 위한 칼, 창 등을 만들었다. 같은 해 가을 반제 동맹, 농민 협회, 부녀회, 소년 선봉대 등을 규합하여 소작료와 이자율 인하 등을 내세우며 지주들의 가옥을 습격하였다. 겨울엔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비밀리에 무기 공장을 만들고, 연길 폭탄, 쇠조각 폭탄, 고춧가루 폭탄 등을 만들어 중국 공산당에 보급하였다.
1932년 폭탄을 제조하던 중 일어난 폭발 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네 손가락을 잃자, 화룡현 어랑촌 항일 유격 근거지로 거주지를 옮긴 후 문화 선전 활동에 힘썼다.
1935년 1월 어랑촌 항일 유격 근거지가 안도현(安圖縣) 차창자(車廠子)로 옮겨가자 따라가서 차창자 주민들을 위한 문화 선전 활동을 펼쳤다. 1936년 차창자 항일 유격 근거지가 해체되자 다시 금곡촌으로 가서 비밀 조직에 종사하였다. 1937년 팔도하자(八道河自)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용정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에서 취조당한 후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