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東根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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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자 |
| 대표경력 | 군산 3.1만세 운동 |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10월 14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6일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 |
| 활동지 | 전라북도 군산 |
일제 강점기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이명은 동근(洞根)이며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전북 군산에서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전북 군산(群山)에서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군산의 만세 시위는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200여 매의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고 군산에서 활동하던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醫學專門學校) 학생인 김병수가 서울의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전해 주면서부터 계획되었다.
1919년 3월 1일 김병수(金秉洙)가 영명 학교(永明學校) 교사인 이두열(李斗悅), 박연세(朴淵世), 김수영(金洙榮)에게 독립운동 선언서를 전하였다. 이두열과 박연세는 같은 학교 교사인 고석주(高錫柱)와 군산시 예수교도인 김성은(金聖恩), 유희순(兪熙淳), 개정면(開井面) 예수교 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 유한종(劉漢鍾), 양성도(楊成道) 등과 협의하여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목탄상을 하고 있던 박동근은 김성은과 유희순으로 부터 이 계획을 전해 듣고 동참 하기로 결심하였다. 주도자들은 3월 1일부터 4일까지 영명 학교에서 수천 매의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5일 오전 수업이 끝날 무렵, 군산 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 10명이 영명 학교에 나타나서 이두열, 박연세, 김수영을 연행해 갔다. 일본 경찰이 운동 계획을 탐지하였음을 눈치 챈 주도자들은 긴급 회의를 연 끝에 지금 당장 거사를 하지 않으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영명 학교의 김윤실 교사와 학생 양기철, 김영후, 전세종, 송기옥, 이도준, 홍천교, 고준명,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은 즉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같은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 학생들도 함께 나섰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그리고 구암 교회 교인들과 예수 병원 사무원 양기준, 이준명, 유한종, 양성도, 김창윤, 송경태, 이진규, 김준관, 이재근 등과 시민 정문선, 김영상, 문채봉, 홍종억, 박동근 등은 시위 대열이 평화동(平和洞)과 영동(榮洞)을 거쳐 본정(本町)[현재 동광동] 큰 거리에 이르는 동안 군중은 5백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경찰서 앞에 이르러는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경에 의해 주도자들이 체포되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이날의 시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동근은 1919년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 6월 12일 고등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5년 대통령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