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姜錫俊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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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 구역국 선전부장|3차 간도 공산당 사건 |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경성(鏡城) |
| 거주|이주지 | 간도, 러시아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
| 학교|수학지 | 동흥 중학 |
| 활동지 | 흑룡강성 영안현 |
| 활동지 |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東京城) |
| 활동지 | 연길현 수신향 |
일제 강점기 만주·노령 지방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길림성 용정의 동흥 중학을 졸업하고 영안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강석준은 1905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출생하였다.
강석준은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서 간도(間島)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길림성 용정(龍井)의 동흥 중학(東興中學)에서 수학하고 졸업하였다. 이후 사립 학교 교직 생활을 하며 반일사상을 가르친 혐의로 일본의 검거망에 오르자, 1926년 3월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27년 7월 강석준은 다시 간도로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하였다. 1928년 6월 조봉암(曺奉岩)·최원택(崔元澤),·김동명(金東明)·윤자영(尹滋瑛)·김철훈(金哲勳)·김하구(金河球) 등이 조직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당원으로 가입하고 영안현(寧安縣) 철령하(鐵嶺河) 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동만구역국 선전부장을 지내다가 병을 얻어 선전부장을 내놓고 유하현(柳河縣)에서 휴양하였다.
1929년 국민부(國民府) 우파와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 간에 대립 격화로 유혈사태까지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강석준은 북만주(北滿洲)로 몸을 피하였다. 1929년 10월 다시 강석준은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동만도 구역국 선전 부장에 취임하였다. 11월에는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주도의 ‘3·1 운동 11주년 기념 준비 위원회’에도 참석하였다. 영안현 동경성(東京城) 정치 이론 학습반에서 사회주의 사상 연구에 힘썼으며, 1930년 2월 조선 공산당 열성자 대회에 참가하여 3·1 운동 11주년을 대중투쟁 시기로 활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강석준은 1930년 3월 전동만 폭동 위원회 결성식에 참석하여 책임자 겸 조직부장 자리를 맡아 활동하던 중 ‘제3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일본 영사관 소속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1년 1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