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福地萬里 |
|---|---|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영화 |
|---|---|
| 작가 | 전창근 |
| 감독 | 전창근 |
| 출연자 | 전창근|유계선|전옥|전택이|주인규|진훈|심영|박창환 |
| 주요등장인물 | 강(姜)[강홍식 분]|주(朱)[주인규 분]|심(沈)[심영 분]|박(朴)[박창환 분] |
| 공연시간 | 규격 10권 |
| 창작|발표 시기/일시 | 1941년 3월 |
| 초연|시연장 | 성보극장 |
1938년 제작에 들어가서 1941년 3월에 발표된 고려 영화 협회의 대표작으로 유랑민의 삶을 다룬 영화.
영화 「복지만리」는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전창근이 귀국하여 만든 영화이다. 이창용이 제작과 기획을 맡았고, 고려 영화 협회가 제공했으며, 전창근이 감독과 각본 그리고 편집을 담당했다. 촬영 이명우, 조명 최진, 녹음 최인규, 미술 원의정, 현상은 경성 현상소가 담당했다. 강홍식·주인규·윤봉춘·박창환·전옥·유계선·심영·이규설·서일성·송창관·전택이·류현·진진중·왕은파·왕미운·기타 극단 고협 단원과 동양 극장 전속 단원 총출연하였다. 친일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영화이다.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민의 시각으로 1940년대 동북 아시아 일대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 「복지만리」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대강의 개요를 설명한 글이 있어, 그 글을 통해 대략적인 장면 구성을 재구성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유리 표랑하는 창맹(蒼氓)들의 생활행장을 읊어 서술’한다는 주제 의식 하에 제작되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당시 일본의 대외 정책과 관련지어 그 친일성 여부를 따져 보아야 할 사안이지만, 일단 외부 자료에 제시된 영화의 목표는 그러하다.
이를 위해 적어도 네 명의 자유노동자가 설정되었다. 성씨로 표기되었는데, 강(姜)·주(朱)·심(沈)·박(朴) 등이 ‘그들’이다. 강은 강홍식을, 주는 주인규를, 심은 심영을, 박은 박창환을 가리킨다. 다른 자료를 참조하면 심영 본인이 이 작품에서 자유노동자 역할을 했으며, 그 역할에 매진한 결과 다른 사람들이 심영 자신을 실제 노동자로 착각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영화의 앞 장면[반드시 첫 장면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은 동경에서 벌어지는 이별연(離別宴)이다. 이별하는 사람 중에서 강[강홍식]은 동경을 떠나야겠다고 말하며, 돈을 벌기 위해 동경에 왔지만 예상과는 달리 돈만 낭비했다고 한탄하고 있다.
이후 술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풍경이 제시된다. 그 와중에 이별연에 참석한 한 사람이 떠나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들이 가겠다는 무산에는 맹수[곰이나 늑대]가 나오는 험한 곳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이주를 만류하는 권고였지만, 이주를 꿈꾸는 이들은 ‘돈벌이’가 좋다고 소문난 무산에 대해 맹목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동경에서의 이별연은 무산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전후 맥락으로 보았을 때, 자유 노동자 네 사람은 무산에서 벌목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의 일부[혹은 전부]는 애초 동경에 돈을 벌기 위해 왔지만 곧 실패하고, 무산으로 새로운 직업을 찾아 떠나려는 계획에 젖어 있는 셈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러한 그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다음 장면은 그들의 이동 장면이다. ‘정붙인 풍경’을 밖으로 떠나보내며 이동하고 있다. 그 다음 장면이 ‘무산의 봄’인 것과 전날 대화 내용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무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다음 장면인 ‘무산의 봄’은 무산의 풍경을 먼저 보여준 이후,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준다. 봄이 되자 그들은 한가해졌고, 다시 무산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의 일거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자료를 보면, 그들이 무산을 떠나게 된 것은 적은 수입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허리가 휠 정도로 일하고 난 벌이는 함지박 죽 값도 되지 못하는 형편 없는 것 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낙토라고 소문 난 만주 배경이 이야기에 틈입한다.
주연 배우 중 한 사람이었던 심영은 「국경 촬영기」에서 무산에서 겨울을 나며 촬영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명춘(明春)까지 촬영이 계속될 것이라는 언질도 남기고 있다. 따라서 무산에서의 벌목 장면을 주로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위의 장면 구성대로 봄이 되면 ‘그들’은 무산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들’이 무산을 떠나 다시 이주한 곳은 만주이다. 그것은 무산을 떠날 무렵 주[인규]가 “만주에는 집도 밭도 있다는 군요. 제 땅을 부쳐 먹고 제집을 쓰구 산다면 나는 더 바랄게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다음 장면 중 하나가 ‘마을 주막집’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장면도 만주 이주에 관한 것이다. 무산으로 보이는 마을 주막집에 심[영]이 앉아 있고, 옥이라는 작부가 마주 앉아 있다. 옥이는 만주 노잣돈을 내밀며 함께 만주로 이주하자고 제의한다. 농사짓는 것에 자신 있느냐는 심의 물음에, 옥이는 자신 있다고 대답하면서 이주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옥이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며 옥이를 괴롭히는 아버지가 있었다. 영화에서는 만주로 이주하면, 옥이와 그 부친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부친에게 야속함을 호소하는 옥이 옆으로 나이 어린 작부의 모습도 보인다. 그 작부 역할은 유계선[전창근의 처]이 맡았다.
가족들을 부양할 돈을 구하기 위해서 동경으로 무산으로 떠돌던 노동자들, 술집 작부로 고생하면서 부친에게마저 구박받던 여인 옥이, 그리고 나이 어린 작부로 인생의 고난을 일찍 맛본 계선은 모두 민중의 일원이다. 영화 「복지만리」는 고단한 민중의 모습을 이주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고단했던 민중이 평화롭게 안착하는 내용이다. “눈녹은 만주벌판의 살진 땅 일망 무제로 개방한 처녀지대가 흙의 아들들인 이들을 불너디리”면서 그들은 자신의 땅을 할당받게 된다. 혼사가 이루어지고 아이가 새롭게 태어나고 생산이 풍족해졌다. 한 마디로 만주는 가난한 이들의 이상향이 된 셈이다.
동아시아 배급을 꿈꾸며 조선의 프로듀서로 활약했던 이창용이 설립한 고려 영화 협회의 대표작으로, 만주와 일본 그리고 조선에서 촬영된 대작 영화이다. 북방으로의 이주를 다룬 점도 주목되지만, 거대한 스케일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배급 체계를 꿈꾸었던 프로듀서의 역량도 주목되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