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南陵山과 女陵山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경신진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 |
|---|---|
| 주요등장인물 | 성모|성모 딸|나무꾼 |
| 모티프유형 | 성모 딸과 나무꾼의 사랑 |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3년 9월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
| 관련 지명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경신진 |
| 관련 지명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혼춘시 경신진 |
길림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혼춘시(琿春市) 경신진(敬信鎭)에서 ‘남릉산(南陵山), 여릉산(女陵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설화.
「남릉산과 여릉산」은 두만강 하류에 소재한 남릉산과 여릉산의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 전설(地名傳說)이면서 신과 인간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성모의 딸이 뱃놀이를 나왔다가 배가 뒤집히고, 나무꾼은 그런 성모 딸을 구해주면서 서로 사랑하게 된다. 성모는 양반집 도령을 사위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모의 딸이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랑이와 구렁이가 인간으로 변해 성모를 찾아가지만, 성모가 낸 문제를 맞히지 못한다. 나무꾼도 성모 딸의 도움으로 성모가 내민 함에 흰쥐 한 마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맞힌다. 그러나 흰쥐 배 속에 있던 새끼까지는 맞히지 못한다.
성모 딸은 몰래 나무꾼을 만났고, 이러한 사실을 호랑이와 구렁이가 성모에게 일러바친다. 화가 난 성모는 나무꾼과 딸을 각각 가두었고, 나무꾼과 성모의 딸은 죽어서 각각 ‘남릉산’과 ‘여릉산’이 되었다고 한다.
1983년 9월, 한정춘[1953년 길림성 혼춘시 출생, 『연변 일보』 향토 문학상, 연변인민출판사 이영식 아동 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 문학상 등 수상]이 혼춘시 경신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박태종에게서 채록했다. 2010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한 『두만강 유역 전설집』에 관련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성모’라 부르는 여 신선이 살았다. 성모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 봄날, 성모의 딸이 답답해서 뱃놀이를 나왔다가 배가 뒤집혔다. 이때 나무꾼이 지나가다가 성모의 딸을 건져주었다.
나무꾼은 어머니에게 되돌아가야 한다는 성모의 딸을 남쪽 기슭까지 배로 태워다 주었다. 이때부터 나무꾼과 성모의 딸은 정이 들고 사랑에 빠졌다. 이 무렵, 성모는 양반집 도령을 사위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성모의 딸이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총각으로 변해 청혼하러 성모를 찾아갔다. 성모는 작은 함을 내놓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맞히라고 하였다. 호랑이는 머리만 가로젓다가 물러나왔다. 또한 구렁이도 총각으로 변해 찾아왔지만 맞히지 못했다.
성모의 딸은 하인을 시켜 나무꾼에게 청혼하러 오라고 하였다. 성모 딸은 그 함에 흰쥐 한 마리가 들어있다고 나무꾼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흰쥐의 배 속에는 세 마리의 새끼 쥐가 들어 있어서 마릿수는 맞히지 못했다.
성모 딸은 집을 몰래 나와 나무꾼을 만났고, 이러한 사실을 호랑이와 구렁이가 성모에게 일러바쳤다. 화가 난 성모는 나무꾼의 집으로 가서 나무꾼을 바위 밑 철창에 가두고 딸만 끌고 갔다.
시간이 흐른 후, 철창에 갇혀 죽은 총각이 있던 자리에서 산이 솟아올라 ‘남릉산’이라고 불렀고, 처녀가 갇혀 있다가 죽은 자리에서도 산이 솟아올랐는데, 이를 ‘여릉산’이라고 불렀다.
「남릉산과 여릉산」의 주요 모티프는 ‘성모 딸과 나무꾼의 사랑’이다. 곧 신과 인간의 이룰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꾼이 호랑이와 구렁이 등과의 경쟁에서는 성모 딸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결국 신분적인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두 남녀는 각각 남릉산과 여릉산이 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