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萬寶窟潭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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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등장인물 | 부역국 왕|부여국 장수|압록강신 |
| 모티프유형 | 압록강신의 금궤|금궤를 취하려는 부여국 왕의 욕심 |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0년 6월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
| 관련 지명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에서 ‘만보굴담(萬寶窟潭)’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설화.
「만보굴담」은 ‘만 가지 보물이 있던 연못’이라는 뜻을 품은 ‘만보굴담’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 전설(地名傳說)이다. 압록강 신이 자신의 금궤를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굴속에 금궤가 있다는 소문을 낸다. 그리고 여느 다른 굴 앞에 게신·자라신·조개신이 금궤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 늪에서 거북이신이 자신의 몸에 금궤를 품고 있어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는 것으로 내용이다.
압록강이 굽이치는 우산 기슭에는 아주 깊은 늪이 있는데, 이를 ‘만보굴담’이라고 한다. 먼 옛날, 만보굴담 밑에는 깊은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 끝에는 진귀한 보물이 담겨 있는 금궤가 있다고 전했는데, 여러 신(神)과 고구려 군사가 늘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소문이 인근 부여국 왕의 귀에 들어갔다. 부여국 왕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신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하면 그 금궤를 취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대신들은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기골이 장대한 어느 장수가 선뜻 나섰다. 장수는 동굴 어귀에 도착했다. 그러나 게신과 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부여국의 장수는 이들의 점심참에 수면제를 탔다. 이내 모두 곯아떨어지자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나절이나 들어갔지만, 굴속은 비어 있었다. 부여국의 장수는 낙담해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인근에 또 다른 굴이 있었다. 그 굴은 조개신과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근에 또 다른 굴이 있었다. 그 굴은 자라신과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부여국의 장수는 어느 굴에 금궤가 있는지 점을 쳤다. 그러자 자라신이 지키고 있는 굴에 금궤가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하여 돌을 들어내어 틈을 만들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굴에도 금궤는 없었다. 이에 조개신이 지키고 있는 굴속으로 천신만고 끝에 들어가 보았지만, 그곳에도 금궤는 없었다.
사실 금궤의 주인은 압록강신인데, 압록강신은 거북이신에게 금궤를 맡겨 놓았다. 그리고 여느 동굴에도 금궤가 있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거북이신은 연못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금궤를 몸속에 감춰두었기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거북이신이 있던 그 자리를 ‘만 가지 보물이 있던 연못’이라는 뜻에서 '만보굴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보굴담」의 모티프는 ‘압록강신의 금궤’와 ‘금궤를 취하려는 부여국 왕의 욕심’이다. 금궤를 지키려는 압록강신과 금궤를 취하려는 부여국 왕의 대립은 결국 압록강신의 승리로 끝이 난다. 신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갈등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여느 설화와 마찬가지로 신이 승리한다. 압록강에 의지해 삶을 살았던 당대 지역민들에게 압록강신은 재물의 신이자 지혜의 신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