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한자 朝鮮族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정의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

분포

중국의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한인[조선족] 인구는 1,923,842명으로 주요 분포지는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요령성(遼寧省) 등 동북지방이다. 이들은 길림성 1,145,688명, 흑룡강성 388,458명, 요령성 241,052명 등으로 분포한다. 나머지 148,000여 명은 산동성(山東省), 내몽고(内蒙古), 북경(北京), 하북(河北), 천진(天津), 청도(靑島) 등지에 분포하여 살고 있다. 이 통계는 중국 정부의 공식통계이며, 1990년대 이후 한인[조선족] 인구는 한국, 일본, 러시아 등 국외지역으로, 중국 국내로는 산동성 등 연해지역, 북경 등 대도시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기원과 역사

조선족은 1860년대 한반도 북부에서 자연재해를 피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만주지역에 정착한 한인이 그 기원이다. 중국 학계에 따르면,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비교적 최근 시기에 국경을 넘어 중국에 정착하게 된 과계(跨界) 혹은 과경(跨境) 민족이다.

조선족의 기원을 언제로 잡을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다. 원(元)나라 말기 또는 명말청초(明末淸初) 등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한반도에서 만주지방으로의 인구이동이 빈발하였다. 현재 중국 조선족은 구한말[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1870년 압록강 연안 남만주 지역에는 128개의 한인부락이 있었으며, 1881년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에 1만 여명의 한인 이민자가 살았다고 한다.

일제의 강점기(1910-1945) 동안 만주의 한인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다. 1910년 20만명이었던 한인 인구는 1940년 약 145만명으로 증가하고, 1945년에는 170만명에 이르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약 80만명의 한인이 한반도로 귀환하였다. 만주의 한인들은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서서 싸우는 한편, 1945년 이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여하여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수립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920-1930년대 만주는 한인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다.

초기 한인의 이주는 생계를 위한 경제적인 이유에 의한 자유로운 이동이었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만주국 건설 야욕에 따른 강요된 이주(강제이주)가 있었다. 또한 1931년 이후에는 일본 식민정부에 의해 조직된 계획이민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인은 만주에서 벼농사를 개척함으로써 벼농사의 북방 한계선을 흑룡강성 북부까지 끌어 올렸다.

조선족 명명과 민족 정체성 유지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주어진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년 10월 1일) 이후이다. 중국정부는 1950년대 변방에 있는 소수집단에 대한 조사 식별사업을 진행하고 50여 개의 소수민족을 지정하였다. 조선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와 개혁·개방 시기 온건한 소수민족정책의 혜택을 보았다. 연변조선족자치구(1952년 9월 3일)가 건립되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자치정책이 시행되었다.

조선족의 많은 인사들은 1950-1960년대 반우파 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조선족이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을 중심으로 집거지역을 형성하여 조선어를 사용하고 민족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을 시행한 덕택이다.

조선족은 중국 건국 이후 사회·경제의 발전 정도가 가장 앞서는 ‘모범소수민족’으로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의 모범사례로 꼽혔다. 조선족은 중국의 다른 어느 민족 집단 보다 높은 교육 수준과 문자 해독율을 보여 왔다. 특히 전통무용 등 조선족의 예술 및 문화 능력은 전국무대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았다. 연변의 조선족가무단은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단 중의 하나로 꼽혀왔다. 민족학교에서의 교육과 민족문화예술관에서의 활동은 조선족 정체성 유지의 중요한 부분이다. 조선족 예술인으로 정률성(鄭律成)은 중국인민해방군가 등을 작곡하였다. 한낙연(韓樂然)은 화가로서, 김염(金焰)은 영화배우로서 명성을 날렸다.

1950년대 반우파 투쟁 시기와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 등 정정(政情)이 불안할 때 조선족은 ‘주변집단’으로 핍박을 받았다. 공산당은 안정기에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격변기에는 민족융합을 강조하면서 동화정책을 폈다. 조선족 지도자들은 대약진운동 시기에는 ‘자본주의 우파’로,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지방민족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州長)이었던 주덕해(朱德海) 등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 박해로 인해 사망하였다.

조선족 사회의 변화

중국의 개혁·개방(1978년) 시기 이후, 또 한중 수교(1992년) 이후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는 사라지고 있으며, 농촌인구가 대거 도시로, 해외로 이주하였다. 2013년 말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인구가 50만을 넘었으며, 산동성 등 국내의 연해지방 및 대도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인구도 그보다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

지구화,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을 맞아 중국의 조선족 사회는 다시 한 번 이산의 격랑을 맞고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에서 만주로 움직였던 한인들은 조선족이 되었다. 이들이 이제는 20세기 말∼21세기 초 중국 동북에서 중국 전역으로, 다시 한반도로, 그리고 동아시아 및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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