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佳木斯市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 지역 | 중국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행정 구역 |
|---|---|
| 인구[남/여] | 255만명 |
중국흑룡강성 동부, 송화강(松花江) 하류 연안에 있는 지급시.
가목사시는 송화강과 우수리강의 남쪽 하안을 따라 좁고 길게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하얼빈시가 있고 동쪽은 러시아와 맞닿는다. 1937년에 처음으로 시가 되었다. 청나라 말기까지 변경의 미개발지에 속했지만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 들면서 철도가 부설되면서 송화강 상류 최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농업 이외에 공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가목사시는 2016년 현재 4개 시구, 3개 현, 3개 현급시로 행정구역이 구분되어 있다. 인구는 2010년 통계 기준으로 약 255만명에 이른다.
가목사는 과거 문헌에 ‘갑모극사(甲母克寺)’, 가목사(嘉木寺)로 표기되어 있다. 또 가목사의 한자 표기도 嘉木寺 이외에, 佳穆斯, 贾木司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모두 만주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원래 만주어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역참’을 뜻하는 만주어 ‘giya-musai’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지금의 가목사시 시구 서쪽에 금나라·원나라때 묘지들이 있었는데 ‘시체’를 뜻하는 만주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 1888년 이곳에 살던 한족 사람이 아름다운 나무가 울창하다고 해서 일부러 붙인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시정부 홈페이지에는 역참을 뜻하는 만주말에서 시의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8년 현재의 가목사시 시구에 동흥진(東興鎭)이 설치되었다. 이후 청말까지 의란부(依蘭府) 혹은 화천현(樺川縣) 관할에 속했다. 1930년에 동흥진은 가목사진으로 개칭되었다. 1937년에 가목사시가 설치되었다. 가목사시는 신해 혁명(辛亥革命) 이후 한족들이 대거 유입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여러 철도 노선들이 건설되었고 이로 인해 송화강 상류의 최대 도시로 발전하였다. 가목사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더욱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즉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 당시로서는 전국 최대 제지공장과 전기기계 공장이 가목사시에 설립되었다. 또 1958년부터 중국정부는 퇴역군인을 이주시켜 삼강평원 일대를 본격적으로 개간하기 시작하였는데, 개간사업을 총괄하는 동북농간총국(東北農墾總局)이 가목사시에 설치되었고, 이로 인해 송화강 상류 일대 거점도시로서의 성격을 더욱 강화되었다.
가목사시 인구의 약 4% 정도가 소수민족인데, 조선족은 소수민족 인구 중에 만주족 다음으로 많다. 2008년 조사자료에 의하면, 시 전체 조선족 숫자는 26,558명에 이르고 조선족향이 화천현과 탕원현에 각각 1곳이 있다. 또 조선족 집단거주촌은 모두 35개 마을이 있는데 대부분 2개 민족향 지역에 있지만 시구에도 4개다. 조선족 인구 및 집단거추촌의 수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통계에 따르면 지금의 가목사시 지역에 조선족 인구는 약 35,000명에 이르고 조선족 집단거주촌도 44곳이나 있었다.
한편 가목사시에는 조선족 학교가 13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고등과정까지 운영하는 학교가 5개소, 중학과정까지 운영하는 학교가 2개소, 초등과정만을 운영하는 학교가 6개소이다. 조선족 학교는 탕원현에 8개나 될 정도로 집중되어 있다. 가목사시 시구에는 중학교 1개소[고등과정까지 운영], 초등과정만 운영하는 학교 2개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