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가상의 커뮤니티, 조선족 글로벌 네트워크 조글로의 탄생과 역사

한자 假象의 커뮤니티, 朝鮮族 글로벌 네트워크 조글로의 誕生과 歷史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postmaster@zoglo.net 电话号码: 0433) 251-7898 251-8178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9월 8일
민간 포털 사이트 길림성 연길시 광명가 89호 A좌 9001실
정의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인터넷 뉴스 포털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

개설 : 조선족 순수 민간 포털 조글로

‘조글로’는 ‘조선족 글로벌 네트워크’의 머리말에서 따온 조합이며, 이 미디어는 처음 중국 한인[조선족] 동포 사회에 보다 빠른 뉴스를 추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생겨난 것으로 전문 인터넷 신문사이자 뉴스 포탈 사이트인 조글로 미디어이다.

한인[조선족] 인터넷 언론은 현재 언론사의 인터넷판 16개와 뉴스 포탈 사이트 1개로 총 17개 사이트 언론이 병존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인터넷판을 낸 언론사는 흑룡강 조선어 방송국이다. 이 방송은 2001년 12월 오픈하였는데, 뒤를 이어 한인[조선족] 언론사들이 차례로 자체 인터넷판 사이트를 오픈하였다. 이런 언론사 인터넷판은 현재까지 대개 자사의 기존 뉴스를 신문에 내거나 방송으로 송출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인터넷판 사이트에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최근 들어 언론사 인터넷판 사이트들은 신문, 라디오, TV 사이트라는 소속 장르를 넘어 타 장르의 코너를 오픈하여 채널을 다양화하고 있으며 서로 파트너 관계를 수립하여 콘텐츠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요녕 조선 문보는 사이트에 뉴스 동영상을 개설하고 그 콘텐츠를 연변 위성 TV에 제공하고 있고, 흑룡강 신문은 사이트의 방향을 동영상 뉴스 중심으로 개편하고 있으며, 중국 국제 방송은 인터넷 라디오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조글로 미디어는 요녕 조선 문보와 흑룡강 신문 등과 제휴하여 한인[조선족] 언론사간의 네트워크화를 추진하고 있다.

조글로 미디어는 포탈 조글로(http://www.zoglo.net)의 뉴스 채널로서 2005년 9월 8일에 오픈됐다. 처음에는 모든 타 언론사의 뉴스를 선별적으로 받아 올리는 뉴스 종합 플랫폼의 형식을 취하다가 2009년 10월 길림성 신문 출판국의 공식 인가를 받아 자유로운 뉴스 취재와 인터넷 출판을 허가받게 됨으로써 현재 한인[조선족]의 유일한 전문 인터넷 신문사로 발돋움했다. 특히 조글로 미디어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가 아니며 순 민간 자본으로 운영되는 유일한 인터넷 언론사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연변 위성 TV 방송과 조글로 미디어는 타 언론사의 지역 사회 보도 위주의 범위를 벗어나 전체 한인[조선족] 사회를 그 보도 범위로 설정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오늘날 중국 전역 및 세계로 거주지가 분산되어 가고 있는 한인[조선족] 사회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질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변 위성 TV 방송과 조글로 미디어는 전체 한인[조선족] 사회를 잇는 정보 유통의 통합 채널로 떠오르면서 현재 이를 통한 민족 정체성 지키기와 경제 문화 교류 발전의 가장 주요한 대안 매체로 제시되고 있다.

조글로 탄생의 배경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미디어의 역할은 단순한 미디어의 기능을 넘어,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 한인[조선족]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도이자 노력의 결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니는 본래의 상업적 가치와 경제 효과를 충분히 염두에 둬야겠지만, 그 너머에 있는 한인[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라 파생된 문제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인[조선족] 사회 내부의 대응을 중심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이러한 대응 가운데 가상의 공간을 통한 새로운 커뮤니티 창출이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한인[조선족] 커뮤니티의 변천과 현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한인[조선족] 사회의 기본 특징은 지역적 안정성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성은 인구의 이동이 매우 적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중국 사회 특유의 도농(都農) 이원화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농 이원화 구조 속에서 농민들의 도시 진출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도시에서도 단위체제 중심이었기 때문에 개별적인 근무지 조정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시로 이주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인[조선족]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성장하고 교육받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생활 세계를 형성하여 왔다. 1970년대 말부터 진행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이러한 경직된 사회 구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지만, 1980년대 전반에 걸쳐 한인[조선족]의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이때까지도 지역적 안정성이라는 기존의 구조가 유지되고 있었다. 1990년의 중국 인구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한인[조선족]의 97% 이상이 중국의 동북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도시화 율은 34.6%였다.

한인[조선족]의 이러한 지역적 안정성은 집거지 형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농민들은 한인[조선족]으로 구성된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거주하는 많은 한인[조선족]들도 연변 지역의 도시와 같은 집거 지역의 도시에서 주로 생활하여 왔다. 집거지에서 벗어나 타민족 지역에서 생활하는 한인[조선족]의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인[조선족] 사회의 지역적 안정성은 급격히 변화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해동되기 시작한 한중 관계가 1992년의 수교로 이어지면서, 양국의 교류가 급속히 증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조선족]은 자신의 언어 사용에서 우세를 이용하여 고립적인 생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곧 대규모의 노동력 이동이며, 그들의 목적지는 한국과 한국 기업이 집중된 중국내 연해 지역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들은 한인[조선족] 사회 내의 집거 구조 해체를 초래했다. 즉 수전과 농사를 매개로 집단적으로 거주해왔던 한인[조선족]들이 이제 보다 나은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요구를 실천하기 위해 대규모로 농촌 지역을 벗어나 도시와 해외로 이주하게 됨으로써 한인[조선족]의 요람이었던 농촌의 급격한 공동화 현상과 농촌 마을의 붕괴를 가져왔다.

아래 흑룡강성 해림(海林)시 KS촌은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KS촌에도 1992년 이후 친척 방문과 경제 활동을 위한 인구 이동이 시작되었는데, 2003년 1월의 마을 상황을 보면, 호적에 등록된 159호 가운데 본촌 거주자 가구가 110호로 49호는 가족 구성원이 모두 이주하였다. 가구원이 전부 본촌에 거주하는 가족은 33가구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 동북 지역에 분포한 한인[조선족] 전 마을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인 것이며 어느 한 마을도 빗겨갈 수 없는 관심사다. 한편 이처럼 공동화된 조선족마을의 공간에는 한족들이 속속들이 들어옴으로써 민족 마을의 모습은 점점 그 실체를 잃어가고 있으며, 생기를 잃은 조선족 마을은 이제 여생을 보내는 공간으로, 또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에겐 다음 일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휴식의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 한인[조선족]에서 농촌마을은 하나의 완전한 소수 민족의 커뮤니티 단위였다. 사회 문화적으로 조선족 마을은 먼저 끊임없이 인구를 공급했다. 청년들의 통혼권역이 대부분 특정 지역에 국한되고 또 혼인 이후의 삶 또한 마을에서 이뤄짐으로써 출생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지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조선족 마을은 집단 노동에 의한 생산 분배와 재생산이라는 공동체적 경제 구조의 산실이었다. 수전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 전통의 경제 구조와 중국 공산주의 정책이 결합되어 공동 생산 공동 분배라는 경제 커뮤니티를 유지해왔다.

한편, 1980년대 초까지 번성했던 조선족 마을 기업은 중국의 초기 공장 기업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으며 높은 생산성과 기술로 마을 재부 창출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아래 홍신촌의 예를 보면, 또 여기서 기술자가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마을기업 해체 이후에도 인근의 도시와 한국으로 나가서 기술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한 조선족 마을은 그 구성원의 교육과 문화적 욕구를 충실히 실현하는 기능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교육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한인[조선족]은 어느 곳에서나 학교를 세워 교육과 문화적 자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신중국 건립 이후에는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2~3개의 마을 단위를 해서는 중학교까지 운영하면서 ‘교육은 조선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중국에서 그 지위를 확고히 해 온 과정이었다.

아울러 마을에서는 청장년층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화 체육 관련 ‘구락부(俱樂部)’가 만들어져 힘겨운 노동이 끝나면 부문별로 모여서 춤과 노래 그리고 악기 결합한 민족 문화의 맥을 유지시켰다. 길림성 서란(舒蘭)에 있는 금성촌(金星村) 지부서기 김종권(2010년)에 따르면, 봄·가을로 조선족 체육 대회뿐만 아니라 하얼빈 지역 문화 예술 경연 대회가 열렸으며, 이는 인근에서는 오직 한인[조선족]만이 가졌던 전통으로 이웃의 한족과 만주족에게서 한인[조선족]은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커뮤니티로서 조선족 마을의 기능 가운데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바로 정보의 소통과 교류의 장이다. 그야말로 한인[조선족]이 세상과 통하는 문은 바로 자신이 발 딛고 있던 그 마을 자체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폐쇄된 공간이었지만 한인[조선족]의 역동적인 삶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간부들의 추천으로 도시 대학에 가거나, 기술자로 파견되는 경우도 상당수 발견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직 ‘마을’에서 살아야 했던 한인[조선족]들은 마을에서 세상소식을 듣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통로는 마을 자체가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모든 평론과 토론이 진행되고 정치적 사회경제적, 그리고 물적 인적 교류가 통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민족 공동체를 위한 조선족의 노력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집거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커뮤니티는 이제 해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원래 민족끼리 단결을 강조해왔던 한인[조선족]은 커뮤니티 자체를 포기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현재의 조건에서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인[조선족]은 부단히 노력해왔던 바, 새로운 집거지로 부각되고 있는 중국의 연해도시와 한국 등 외국에서의 커뮤니티 형성이 바로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중국내 연해 도시의 경우 청도(靑島)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1978년 당시 138명에 불과했던 한인[조선족]이 현재는 20만 명을 웃돌고 있으며 여기에 한국인 12만 명이 상주하고 있어, 과히 중국 속의 한국이라 불릴 만한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조선족 기업은 이미 1천여 개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 기업도 6천여 개로 한인[조선족]의 경제 활동이 매우 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청도에서는 1997년 3월에 처음으로 청도 조선족 기업 협회를 만들었으며, 이어서 청도 조선족 여성 협회, 청도 조선족 노인 협회, 청도 조선족 골프 협회, 청도 조선족 축구 협회, 세계 해외 한인 무역 협회, 청도 조선족 과학 문화인 협회 등 무게감 있는 단체를 여럿 건설했으며, 현재까지 유익한 사업과 행사들을 성황리에 이끌어내고 있다. 한편, 이들 단체를 통해 진행되는 각종 활동은 한인[조선족]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미치는 한편, 한국인과의 밀접한 연계를 통해 한인[조선족]의 단결과 단합, 연대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져 한국 문화가 지역에서 꽃 피는데 커다란 공헌을 함으로써 커뮤니티가 가진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한국에 진출한 한인[조선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한국은 중국과는 달리 별도의 명칭이 부여된 단체나 이를 통한 활동이 미진하다. 그에 대해서는 이들이 취업과 경제 활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부양 가족을 동반하지 않을뿐더러, 대부분이 비정규적 관련 노동에 종사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통한 사회 관계 형성이 어렵고, 또 한국에서 외국인 신분을 갖기 때문에 공식적인 조직이나 단체를 결성하기 어려운 조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인[조선족]은 취업에 따라 교통과 이동이 편한 수도권 지역에 모여 살면서 상시적인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면서 혈연과 지연을 키워나가는 방식으로 내적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 진출한 한인[조선족]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관계는 지연에 기초한 친구 관계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이 일당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에 종사하는 한인[조선족]에게 일자리에 대한 정보나, 새로운 일터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요소이다. 이처럼 한인[조선족]은 비록 중국에서와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동포사회 내부에서의 단결을 강화하는 동시에 정보의 교류와 소통의 장으로써 커뮤니티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조글로는 민족 정체성 강화와 대중 문화 창달의 공간

한인[조선족]의 커뮤니티에 대한 요구는 결국 민족의 정체성 형성과 보장 및 경제 활동의 모색, 문화와 교육의 창달, 그리고 이를 통해 민족의 지속적으로 활로를 찾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새로운 집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다양한 경제화 생활의 패턴은 면대면의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지역적 환경의 차이는 무엇보다 직접저인 교류를 어렵게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과는 달리 전 중국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인[조선족]은 기존의 지역 중심의 커뮤니티 활성화를 넘어선 전 중국 차원에서 새로운 소통과 교류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나아가 이미 중국을 넘어 한국, 일본, 미국, 호주, 유럽 등 세계 각지로 초국적 이동 현상을 보이고 있는 한인[조선족]으로서는 이제 지역과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의 커뮤니티를 요구하고 있는 단계 즉, 가상의 커뮤니티 창출로 그 요구가 모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러한 요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지부식 간에 글로벌화 단계로 접어 든 한인[조선족]의 특성이 충분히 반영된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초기 조선족 마을의 집거지에 머물러 있던 한인[조선족]이 개방의 바람을 타고 내디딘 곳은 중국 각지를 넘어서 1980년대부터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는 것이며,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동포사회를 형성해왔고 발전시켜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가상의 커뮤니티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단순히 오늘날 IT기술에 비롯된 단기간의 모습이 아니며 역사적인 과정과 민족의 요구가 서려 있다는 것을 환시시켜야 한다.

따라서 조선족 글로벌 네트워크 ‘조글로’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과 민족적 요구의 결정체이다. 서두에도 밝혔듯이 상업과 경제활동이 오늘의 기술과 결합된 단순한 포털사이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조글로가 어떠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탄생했는가에 대해서는 대표를 맡고 있는 김삼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조글로는 2005년 한인[조선족] 정체성을 지키면서 잘살자는 취지로 설립되었습니다. 그간 조글로는 연변 및 세계 각지 한인[조선족] 사회를 온·오프라인 상에서 경제와 문화라는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작업을 추진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동참 하에 조글로는 한인[조선족] 최대 언론 포털로 성장했으며 인터넷 온라인 배경 하에 언론인 클럽, 포럼 공동체, CEO 클럽, 작가 네트워크 협회 등 오프라인 모임 결성으로 그 활동 범위와 영향력을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글로벌한 경제 문화 네트워크로 민족 정체성을 지키면서 성공하여 현지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글로벌한 이주와 정보화가 주도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대 사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조글로는 전세계를 활동 무대로 폭넓고 심도 있는 경제 문화 교류와 활동을 추진하고자 하며 한인[조선족] 사회 리더 클럽을 출범시켜 한인[조선족] 사회 문제를 진맥하고 발전 좌표와 비전을 제시하며 현장 실천을 주도하고자 합니다. 또한 조글로는 ‘건강한 조선족 사회 만들기’에 동조하는 모든 기관 단체 및 경제계·문화계·교육계 등의 인사들과 손잡고 뭉친 하나가 되고자 노력하며, 민족 발전 기금을 조성하여 한인[조선족]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합니다.(이하 생략)”

글로벌한 경제 문화 네트워크를 통한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방점을 둔다고 해서 조글로가 결코 지식인들과 경제인들의 무미건조한 토론의 장이 아니라는 것은 이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변화된 환경에서 한인[조선족]은 과연 누구인가 라는 자성 섞인 질문에서부터 한인[조선족]의 궁벽한 시골 소학교의 소식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행보와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세심함이 엿보인다. 섣부른 한국 바람에 빼앗긴 땅을 되찾고, 한국에서 사기 당한 사람의 억울한 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 현대적 법률 지식을 동원하여 그 해결을 호소하고 있다. 고등 교육의 힘든 관문을 통과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취업의 문을 열어주고 있으며, 비록 2부 리그이긴 하지만 예부터 중국에서 ‘볼 잘 차는’ 민족으로 소문난 한인[조선족]의 연변팀이 겨울철에도 땀 양동이를 받아 놓고 훈련한다는 소식이 동포의 자부심을 더 느끼게 한다.

중국과 중국 한인[조선족]이 우리에게도 성큼 다가 선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한인[조선족]의 민족과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습관이 있어왔다. 아직도 이에 대해 쉽게 결론을 못 내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인[조선족] 문화는 한인[조선족]이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그리고 현대 각양 각처에서 한인[조선족]이 만들어 내는 문화라는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교류와 일정한 전파와 수용이라는 과정은 거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한인[조선족]이 행하는 것이며, 그 결과 또한 한인[조선족]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글로도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미약하지만 곳곳에 흩어진 한인[조선족]의 삶의 진실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노력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전 과정을 통해서 조글로가 한층 더 성숙한 한인[조선족]의 커뮤니티로 성장하여 민족의 대중 문화 창달 공간으로 나아갈 것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 남용해, 「청도 조선족 집거지의 현황과 전망」(『개혁개방 30주년 조선족의 변화와 발전』, 2008)
  • 박광성, 『세계화 시대 중국 조선족의 초국적 이동과 사회 변화』(한국 학술 정보, 2008)
  • 황유복, 『글로벌 코리안 경제 문화 네트워크』(민족 출판사, 2008)
  • 이정찬, 「흑룡강성 서북 지구 조선족 마을 역사에 관한 민족학적 고찰」(중앙 민족대학 박사 학위 논문, 2012)
  • 이정찬, 「금성촌 조선족 마을 주민의 생활 경험과 역사 인식 연구」(중앙 민족 대학 석사 학위 논문, 2009)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8-신문· 출판사-』민족 출판사, 1999
  • 조선족 글로벌 네트워크(http://www.zogl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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