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中國 東北 最大의 朝鮮族 老人 協會, 金星村 老人 協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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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생활·민속/생활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길림시 서란시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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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
| 노인 협회 | 길림성 서란시 평안진 금성촌 |
1984년에 길림성 길림시 서란시 금성촌에서 발족된 노인 협회에 대한 이야기.
금성촌은 중국길림성 길림시 서란시 평안진(吉林省吉林市舒蘭市平安鎭)에 위치하는데, 길림성 영길현(永吉縣)에 있는 아라디촌과 함께 중국 동북 3성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조선족 마을로 손꼽힌다.
금성촌은 서란시(현급시) 평안진 일대에 있는 한인[조선족] 최대의 민족 마을이다. 금성촌은 무엇보다 한인[조선족] 인구가 가장 많고, 넓은 토지와 산업 분야 등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길림역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두어 시간 가다 보면 서란현에 당도하고, 다시 평안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 못 미치면 평안진에 닿는다. 금성촌은 평안진 소재지에서 가까워 진(鎭) 소재지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바로 찾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아예 금성촌을 ‘평안’이라 부르기도 한다.
금성촌이 위치한 평안진 자체가 금성촌 역사와 맞닿아 있기에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근 한인[조선족]뿐만 아니라 한족들에게도 금성촌은 단순한 자연부락이 아닌 거대한 행정촌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이는 ‘평안은 조선족이다’라는 명제로 귀결되고 있다.
물물론 여기에는 마을을 건설하고 일궈왔던 대규모의 금성촌 주민들의 피땀이 서려 있다. 개척 1·2세대들은 한때 중국 연해 도시와 한국으로 떠나거나 가끔 정착도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다시 평안으로 돌아와 삶을 유희하면서 노인들의 천국을 만들고 민족 마을 유지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 인구와 규모도 당연히 중국 동북 지역에서 최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조선족 마을 대부분이 그러하듯 금성촌도 노인들만 거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노인들은 여전히 마을 지킴이로서 마을의 대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노인들은 한인[조선족] 사회의 버팀목이라는 위상은 변함이 없다. 그 중심에는 자발적 결사체인 노인 협회가 있다.
노인 협회는 중국 인민공사 체제 시기에도 형식상 존재하였는데, 여성은 만 54세, 남성은 만 56세 이상의 촌민들로 구성되었다. 당시는 조직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을뿐더러, 나이 60세가 된 사람들까지도 집체 노동에 참여하였기에 노인들만 별도로 활동할 시간도 없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노인 협회는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몇몇 노인들이 개인 집에 모여 한사람이 신문을 읽어주고, 이후 질의응답과 토론하는 방식으로 학습하였는데, 이를 ‘독보조(讀報組)’라고 하였다. 이것이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노인 협회를 독보조라 부르는 이유이다. 노인 협회가 본격적으로 단체로서 활동을 전개한 것은 인민공사가 해체된 이후 1984년의 일이다.
금성촌 노인 협회는 1984년에 성립되어서 2014년 현재까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금성촌 노인 협회는 병중이거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인 대부분이 참가하고 있다. 현재 평안진 금성촌 한인[조선족] 인구는 869명[2000년 인구보사]이다. 그 가운데 60세 이상의 노인 인구는 167명이며, 노인 협회의 회원은 112명이다. 본 통계는 실제 거주 인구를 반영한 것으로 호구상의 인구와는 다르다. 그 가운데 60~69세가 32명, 70~79세 57명, 80~90세의 노인은 23명이다. 남자 회원은 48명이며, 여자 회원은 64명이다.
운영 경비 내원과 운영은 금성촌 위원회가 증여한 공유지 7무(畝)[연평균 수입 7,000위안 정도]와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 회비는 농민회원은 20원이고, 퇴직한 간부는 30원이다. 금성촌 노인 협회는 2006년을 기준으로 5만 위안의 적립금을 돌파했다. 이후 지속해서 회원이 늘어나고 또 한국과 연해 도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일부 특별비를 내어 기금을 축적하고 있는 까닭에 액수는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금성촌 노인 협회는 독립된 활동 공간이 있다. 대강당 면적이 300㎡이고, 소강당은 150평, 회의실은 30평이다. 이 밖에도 도서실과 당구장, 탁구장 및 3개의 게이트볼 장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촌민위원회가 신농촌 건설의 경비에서 일부를 출연하여 건설한 것이다.
금성촌 노인 협회의 주요 활동으로는 먼저 학습이 있다. 이는 1명의 보도원(輔導員)이 한 달에 두 차례의 학습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주로 신문과 노년보, 노년 세계 등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국내외 사건과 시사, 그리고 중국의 정책과 법규, 보건 등 다방면의 지식을 전달하고 학습한다.
평일에는 낮에 노인들이 자연스레 ‘금성촌 문화 대원(金星村文化大院)’이라는 노인 협회 건물에 모여 자유로운 여가 활동을 즐긴다. 남자들은 거의 문구[門求; 게이트볼]를 치고, 여자들은 마작 등 유희를 즐긴다.
한편 금성촌 노인 협회 회원들은 건강 체조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일정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하며 경연 대회를 준비하기도 한다. 단오절(음력 5월 5일)과 3·8부녀절, 노인절(8월 15일) 등에 각종 문체 활동을 진행하거나 서란현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 매년 봄가을에는 야유회를 진행하거나 북경, 백두산, 경박호 등 명승 고적지를 유람하는 등 노년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도록 돕고 있다.
금성촌 노인 협회는 일부 회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 방문 고찰단을 접대하는 등의 사업을 담당하기도 한다. 특히 현(縣) 혹은 진(鎭)의 민족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는 막중한 임무도 맡고 있으며, 일정한 시간을 두고 회원들에게 단체 회식을 제공하여 단합과 연대를 더욱 드높이고 있다.
금성촌 노인 협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웠던 기억은 2006년으로, 그해 3월 평균연령 62.5세의 금성촌 노인 협회의 노년 예술단은 중국의 중앙 방송국[中央電視臺]의 ‘동일수가(同一首歌)’라는 코너에 초청받아 출연한 경험이다. 이어서 중국 인민 정치협상 회의와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에도 초청받아 조선족 전통 가무인 ‘경풍수[慶豊收; 풍년가]’를 성공적으로 공연하여 당 중앙과 각계 매체로부터 지극한 호평을 받아 민족 전통 문화를 발양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금성촌은 평안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자 진의 중심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1987년 발간된 『평안진지(平安鎭志)』에서도 평안의 변천 역사에서 금성촌 부분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서사적 기술을 담고 있다.
“금성촌은 진의 경내에 위치하여 진정부와 마주하고 있다. 촌민은 절대 다수가 한인[조선족]으로 극히 일부의 한족만이 있을 뿐이다. 평안에 정주한 이래 60년이 지나고 있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평안에는 한인이 없었다.
금성촌에 거주하는 78세 오충학에 따르면, 그는 18세 때[1927년경] 평안에 와서 정착했는데, 그가 평안에 오기 전에는 한인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반도 남쪽 경상도에서 생활하다 중국 동북으로 도망쳐 왔다. 우선 교하에 도착하였고 이후 평안으로 오게 되었는데, 당시에 그와 3호의 한인만이 있었다. 그 뒤 강덕 3년(1936년)에 77호의 한인들이 건너왔는데, 이들은 만몽 회사의 개척에 참여하였고 이후 안가(安家)로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평안진지(平安鎭志)』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만주국 초에 평안에는 300여 쌍(垧)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 소(초)육(肖六) 과부가 있었다. 당시 평안의 대부분 토지는 한전(旱田)이었는데, 1937년부터 한인 이곡삼이 한전을 수전으로 개간하였다고 한다.
얼마 뒤 일본의 이민단이 와서 위만(僞滿) 정부[만주국]의 지원 속에 이곡삼이 개간한 땅을 헐값에 빼앗아 버렸다. 이때 한반도에서 평안으로 이주해온 한인들이 많이 늘어나 1939년에는 60~70호가 되었다. 당시 한인들의 유일한 생계는 농사였지만, 토지가 없어 일본개척단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성촌의 개척과 변천 과정은 곧 평안의 변천 과정이다. 또한 대부분의 조선족 마을이 그러하듯, 곧 수전 개척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자연부락들이 현대적 의미의 행정구역으로 발전되어 금성촌으로 정비된 것이다.
한편, 일제하에서 이중 삼중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한인 촌민들은 해방 이후에서야 토지를 분배받고 안정적인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인의 민족촌 개척과 건설 과정이 일시에 중단된 것이 아니며 시작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것은 촌민들에게서 더욱 고통스런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촌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금성촌의 개척 역사를 쓰고 새 지평을 열었던 한 촌 간부의 삶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금성촌의 개척 과정과 관련하여 “김옥만은 평안진 금성촌 원당지부 서기였다. 1956년에 금성촌 농업 초급사와 고급사 주임을 역임했다. 1947년부터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이래로 20년을 하루와 같이 당의 말에 충실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일은 잊었다. 일찍이 금성촌의 광대한 한인[조선족] 군중을 이끌고 농업기본건설을 크게 일구면서 관개수로도 넓히고 각종 자연재해와 싸워서 너끈히 극복하였다. 이는 수도작을 안정적으로 높은 수준의 생산 단계로 이르게 했다. 그 결과 1956년에 금성촌을 곧 평안진 제1의 만근사(萬斤社)로 만들었다.
1956년 7월 김옥만은 전국 만근사의 농업 노동 모범으로 선발되어 당의 중앙 영도인 모택동, 유소기 주석, 주은래 총리, 등소평과 팽진 등 주요 당과 국가의 영도들을 만나서 사진도 촬영하였다.
1958년 땅을 깊게 파는 정책에 반발하여 우경으로 몰렸으며, 1966년에는 사회주의교육대에 의해 금성 대대 지부 서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김옥만은 사업하던 중 군중의 폭발적인 지지와 존경, 그리고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철직 이후에 금성촌 군중은 극도의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68년에는 금성촌 당지부로부터 금성 대대가 운영하는 벽돌·기와공장에 내려가 노동 개조를 받았다.
김옥만은 불행히도 노동개조 중에 벽돌기와를 나르던 중 불의의 사고로 1958년 7월 사망하였다. 이때 금성대대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천 명이 넘는 군중이 자발적으로 모여 추도대회를 개최했다. 모든 참가자는 슬픈 얼굴로 소리 없는 흐느낌으로 마치 자기의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김옥만을 애도 했다. 장례식에 금성촌의 애도 음악대를 조직하여 앞장서고, 군중이 1천여 명이 자발적으로 상여를 뒤따라 긴 장례 행렬이 묘지까지 이어졌다. 군중들은 매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서야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처럼 김옥만과 함께했던 한인[조선족]들은 한몸 한뜻으로 금성촌의 면모를 창조하고 일신시켰다. 곧 그들이 오늘날 금성촌의 일등공신이자 원로들인 셈이다. 세상이 급변하기 전까지 이들은 2세대와 함께 민족 전통과 영광을 지켜냈다. 바로 그들이 오늘날 금성촌 노인 협회의 1세대이자 버팀목인 셈이다.
조선족의 대부분 노인 협회가 그러하듯, 금성촌의 노인 협회는 1984년에 성립되었다. 현재 형식적으로는 자발적 결사체이지만, 실질적으로 마을의 공식적 행정 조직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 회원 자격에 대한 명시적 기준, 단체를 이끌어 가는 간부진, 그리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지속해서 행해지는 단체 활동 등은 조직체로서의 성격을 갖춘 자발적 결사체로 조선족 사회에서 노인 협회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인 협회가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것은 아니다. 노인 협회는 일정한 문화 수준이 있지 않고서는 성립되기 어렵고 독자적인 운영도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인 협회의 목적이 단순히 유희와 오락의 목적이 아니라, 노인들이 앞장서서 교양을 높이는 가운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건전한 심신 수양을 통한 행복 추구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토대로 국가와 사회의 모범을 창출하는 것이 노인 협회의 핵심적 목표와 사명이다. 따라서 노인 협회라는 결사체 혹은 조직 건설은 반드시 높은 수준의 문화를 동반해야 하며, 각성되고 자발적인 노인들에 의해서만 창조와 계승적 발전이 가능하다.
금성촌 노인 협회 창립에는 누구보다 문종린의 공이 크다. 그는 한국의 통일 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당숙 되는 사람으로 문익환 목사 부친인 문재린과는 4촌지간이다. 어릴 적 용정일대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평안으로 들어온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의 전통이 있었다. 문종린 또한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었다.
문종린은 교육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다. 과정에서 문화혁명 시기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헌신은 촌민들이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내 사면되었다. 그는 은퇴한 후 당시 시대적 소명이었던 노인들의 자발적 결사체 금성촌 노인 협회 창립을 동료들에게 제안하고 조직하였다.
“그때 문종린이가 고생 마이 했어요. 그 사람이 인제 퇴역하고 머 별 할 일이 없어. 그런데 하루는 ‘우리가 그냥 이래 살아가 되겠는가. 우리도 머 하나 만들어 보까?’ 그래. 그래 내가 ”뭔데?“ 하니까, ‘노인 협회’라 카더라고. 그래가 문종린 하고 내하고 저 저 이영철, 이종석 이래 몇몇이 해가지고 만들었는 기라. … 처음에는 머 요새 저기 저 문화 대원 있잖습니까. 그 독보조. 거기 없지 머. 그냥 누구누구 집에 모여서 얘기하고 신문도 잃고 그기 다라. 그러다가 이제 점점 사람들이 늙어가다 보니까네 이래 회원도 늘어나고. 참 그때는 돈이 없어가지고, 처음에 대대(촌정부)에서 몇 원 주고 했는데. 이래가 안되겠다 싶어 ‘고마 논 얼마를 우리가 운영하도록 하께’ 이래가지고 몇 무 얻어가지고 농사짓고 그 쌀 내다 팔아가 돈 내고 그랬지 머. 고생은 좀 해도 그때가 재미있었어. 인제는 나이 들어가 머 총회할 때나 한번 씩 나가까.”[김흥보, 1930년생]
이렇게 시작하여 발전해온 금성촌 노인 협회는 서두에서 밝혔듯이, 회원 수와 규모 면에서 과히 최고의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실제 중국 동북 지역 조선족 마을 어디에도 금성촌처럼 독립된 공간으로서 노인 협회 건물이 넓게 자리한 곳은 없다. 대부분 촌 정부 건물 한 모퉁이를 빌려 쓰거나, 그 앞에 좁다란 공터를 내고 문구장(門求場)을 낼 뿐이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조선족 마을에는 장년층들도 사라져 모든 공간이 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전부터 노인 협회의 위상이 높고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한 마을은 금성촌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금성촌에 들어서서 마을 한가운데로 발길을 옮기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무슨 행사가 있는지 눈길을 두게 된다. 노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지 모르지만 ‘딱!’하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다름 아닌 문구를 즐기는 노인들과 공이 부딪히는 소리다. 궁금해서 ‘문화 대원’이라고 적힌 간판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각종 표어 아래 노인들이 문구에 열중하고 있다.
현재 금성촌의 모든 행정과 정치는 노인 협회가 움직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노인 협회의 비중이 막대하다. 이에 더 나아가 문화생활에 있어서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모든 문화생활은 노인 협회에서 시작해 노인 협회로 끝난다. 노인들은 해마다 서란현과 길림시에서 주최하는 조선족 민족 예술 경연 대회에 참여하여 2등 이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으며, 1등상을 부지기수로 받아 왔다 또 국가 민족 사무 위원회 초청으로 북경으로 가서 공연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늘 자랑삼아 주변 사람들에게 늘어놓는다.
게이트볼장은 하루라도 노인이 없는 때가 없다. 이전에는 눈이나 비가 올 적에는 쉬는 날이 있었으나, 이제는 지붕공사가 완료되어 금성 문화 대원은 하루도 사람이 끊이질 않아 그야말로 노인들의 천국이 되었다.
금성촌민들의 모든 문화생활은 문화 대원을 통해 이뤄진다. 문화 대원에는 회의장 및 공연장, 문구장, 당구장, 탁구장, 그리고 노인 독보조 등의 회의실로 구성되어 회의에서부터 기획과 실행까지 허브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금성촌은 마작의 고장이다. 문구를 치는 노인들 외에 대부분의 촌민들은 개인적인 일을 제외하고서는 곳곳에 모여서 마작을 즐긴다. 마작을 놀 때 말을 걸거나 일을 부탁하면 상당히 불쾌해하므로 조심해야 할 정도다. 노인들의 입을 빌리자면, 예전에는 화투도 꽤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마작이 보급되면서 화투는 뒷전으로 밀려 났으며 잘 놀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금성촌에는 대대 간부와 일부 장년층을 제외하고는 노인뿐이다. 금성촌의 노인들은 회원만도 서란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활동도 활발하다. 중요 회의가 있어 전체가 모이거나 연말 결산이라도 할 때면, 80세가 넘은 노모나 아버지를 모시고 자리를 함께하는 60세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기가 예사다.
금성촌에 들러서 노인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금성촌의 진면목을 마주하기 어렵다. 금성촌의 노인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므로, 혹시 한국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그렇냐?’라며 돌아서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인내하고 다가서서 말을 건넨다면, 본격적인 소통이 시작되고 그 안에서 그들의 지난한 역사와 현실을 충분히 마주할 수가 있다.
금성촌 노인 협회의 노인들은 결코 제자리에 머무르며 과거 향수를 내뱉으며 소일하는 과거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인생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는 분명 과거 한인[조선족]으로서 살았던 삶의 대가를 충분히 누리는 것으로 동포 사회의 귀감으로 자리한다. 그들이야말로 오늘날 한인[조선족] 사회의 공헌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성촌 노인 협회의 문화 대원에는 다음과 같은 표어가 붙어있다. “노년의 즐거움은 향수가 아니라 공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