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안전 농촌으로 출발한 상지시 조선족 마을의 오늘

한자 安全 農村으로 出發한 尙志市 朝鮮族 마을의 오늘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3년 7월 19일
조선족 민족향·진 흑룡강성 상지시
시기별로 달랐던 중국 조선족 이주의 물결

안전 농촌으로 시작한 상지시의 조선족 출발점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 조선족이 어떤 경로로 이주해 왔는지 알아보는 것부터 출발해보자. 중국에서의 조선족 정착의 뿌리를 찾아올라가 보면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인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와의 전쟁에 강홍립과 함께 동원되었던 5천명의 장병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포로로 잡혀온 수만 명의 한인들이 일부 귀국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요동 지방에 머물면서 중국 조선족 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오늘날 요령성 본계현 산성자향, 개주시 진퉁향 등지에서 살고 있는 박씨 동네와 길릴성 서란시의 박씨툰의 촌민들은 이들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중국 동북 3성으로의 한인의 이주는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제1차 이주민 물결은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 사이에 일어났다. 1860년 한반도 북부의 수재, 1869년과 1870년의 가뭄 등에 따라 살기위한 경제적 이유로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대규모의 난민이 이주했다. 청조는 엄격하게 이주를 금한 봉금정책을 19세기부터 점차 해제하고 ‘이민 실변 정책(移民實邊政策)’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월경한 한인들을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전문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전문 개간 구역을 지정하도록 한 정책이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이주 한인의 인구는 7만 명에서 1910년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제2차 이주 물결은 1910년부터 1931년 사이인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토를 잃어 살길을 찾아 이주한 가난한 농민들과 반일 지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무려 그 수가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압록강 유역에서 동쪽인 두만강 유역으로 정착지를 넓혀나갔다.

제3차 이주민 물결은 1931년 ‘9.18 사변’이라는 불리는 만주 사변부터 1945년 사이에 일어났다. 당시 이주민은 크게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식민지 농업 정책에 의해 살길을 잃은 가난한 농민이 한 부류를 이루었고, 일제가 실시한 이민 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주한 ‘개척민’들이 다른 한 부류를 이루었다.

특히, 1937년부터 일제는 ‘만주 백만 세대 농업 이주민 계획’을 실시하여 1937년부터 해마다 1만 가구의 농민들을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남부 지방 출신들로서 흑룡강성과 내몽골 지구에 정착하여 논농사에 종사하였다.

상지시의 경우에도 이 시기에 집단 농장이 건설되면서 많은 한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결과 해방 직전인 1945년에는 200만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였다.

출신 지역에 따라 정착한 곳이 달랐던 조선족 이주민

중국내 한인의 이주를 보면 대부분이 농업 이민으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지가 넓혀진 것을 알 수 있다. 한인들은 가장 먼저 압록강 이북인 집안, 통화, 신빈, 환인 일대에 모여 살면서, 뒤이어 심양, 무순 그리고 요령성 일대로 주거 지역을 넓혀 나갔다. 이들 대부분은 평안도 출신이고, 다음으로는 경상도 출신, 그리고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등의 순으로 많았다.

동쪽의 두만강 일대는 압록강 보다 늦게 한인들의 정착이 이루어졌다. 한인들은 두만강 북쪽의 인근에서 시작하여 점차 훈춘하에서 장백산 북쪽의 할마령까지 사는 곳을 넓혔는데, 이들 대부분은 함경도 사람들이고, 그 다음으로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순이었다. 한인들이 가장 늦게 이주한 곳은 북쪽의 우수리강, 수분하, 목단강, 송화강 유역이었다. 한인들은 먼저 우수리강, 수분하 유역에 정착한 후에 점차 북쪽의 목단강, 송화강 유역으로 사는 곳을 넓혀나갔다.

이들 중에서 우수리강, 수분하 유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로 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온 함경도 사람들이었고, 목단강 유역에는 연변으로부터 옮겨온 함경도 사람들이 많았으며, 송화강 유역은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지나서 이주한 경상도 사람들이 많았다.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지림맹, 훌룬부이르 등에 모여 살았는데, 홀룬부이르는 대부분 함경도 사람들이고, 지림맹의 경우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 1930년대 이후 ‘개척민’으로 내몽골흥안령 일대에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 동북 3성에서 함경도 출신 비율이 가장 높다. 이들은 주로 길림성 동부와 남부, 흑룡강성 남부[목단강시], 동부[계서시, 영안시, 해림시, 밀산시, 동년현, 계동현, 임구현, 목릉현, 호림현, 요하현, 보청현, 발리현, 화천현, 칠대하, 쌍압산, 가목사 지구], 내몽골자치구 훌룬부이르맹 등지에 살고 있다. 평안도 출신이 그 다음으로 높은데, 주로 요령성[심양시, 단동시, 환인현, 신빈현], 길림성 남부[집안시, 통화시, 관전현]에 살고 있다.

한편, 경상도 출신이 많은 지역은 길림성 일부[길림시, 구태시, 영길현, 교하현, 서란시, 반석현, 화전현, 유하현], 흑룡강성 북부 송화강 일대[아성시, 상지시, 오상시, 탕원현, 치치할시 사룡구, 방정현], 요령성의 무순시, 그리고 내몽골자치구의 흥안령 일대이다. 이를 통해 보면 상지시는 경상도 출신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 수 있다.

이들 한인들의 분포는 이주 경로와 관계가 있다. 가장 많은 한인이 이주한 첫 번째 경로는 압록강두만강을 건너는 경로로, 지리적으로 인접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이 경로를 통해 많이 이주하였다. 두 번째는 서해안에서 요령성 영구(營口) 등의 지역을 통해 이주하는 해상 경로로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이 이 경로를 많이 이용하였다. 세 번째는 강원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 러시아연해주를 거쳐 연변과 흑룡강성의 동부 변경 지역에 이주하는 경로였다.

일제에 의한 1930년대 조선 이주민 집단 부락의 건설

1932년부터 일제는 ‘치안 숙정 계획’을 제정하고 1933년부터 집단 부락을 건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첫 집단 부락 북하마탕이 간도의 연길현 춘양향에 건설되었고, 이후 일제는 간도에서부터 시작하여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조선 이주민 집단 부락을 건설하였다. 그 결과 1939년 집단 부락의 수는 1만 3,451개에 이르렀다.

한인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집단 부락의 건설은 조선 이주민의 항일 유격대와의 연대를 끊고, 치안을 유지하며, 자작농으로 양성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조선이주민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노예로 삼아 통제와 안정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집단 부락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형태로서 부락 주위에 토성을 쌓았다. 토성은 보통 높이 8자, 넓이 3자로 쌓고, 토성 밖에는 넓이 3자, 길이 3자 되는 도랑을 파고, 네 귀퉁이에는 포대를 두었다. 집단 부락의 대문은 지정된 시간에 개폐하며, 부락들은 두 시간 간격의 거리에 배치하였다. 집단 부락의 관리를 위해 ‘보갑법’을 실시하였는데, 주민 10가구가 1패로서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고, 촌락은 1갑으로 하여 촌장이 갑장을 맡게 하였다. ‘집단 부락’에서는 20명 내외의 무장 자위단을 두었다.

안전 농촌은 집단 부락의 특수한 형태로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든다는 ‘자작농 창정 계획’을 바탕으로 하여, 1932년부터 남만주와 북만주 일대에 동아 권업 회사 등에 의해 안전 농촌들이 세워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으로는 봉천성 철령현의 철령 안전 농촌, 봉천성 영구현의 영구 안전 농촌, 흑룡강성 지역의 수하 안전농촌, 그리고 상지시에 있는 하동 안전 농촌 등이 있다. 하동 안전 농촌은 1933년에 동아 권업 주식 회사가 하동 안전 농촌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안전 농촌과는 다른 집단 부락의 형태로 조선 이주민 농장이 있었다. 조선 이주민 농장은 북만주와 남만주의 영구, 해성 등의 지역에 주로 위치하였고 자발적인 투자 이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선 이주민 농장의 대표는 경상도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1929년에 건설된 해륜현 선목 농장은 경상북도 출신 정준수씨가 만든 농장으로 경상도 사람이 많이 거주하였다

상지시의 조선족 집단 부락 개관

상지시는 1988년 오늘과 같은 현급인 상지시로 개칭되었으며 10개 진과 7개 향중에서 2개 향이 조선족향이다. 13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68만 명의 전 시 인구 중에서 조선족은 24,000여 명이 살고 있다. 상지시의 대표적인 조선족향은 하동조선족향어지조선족향이다.

하동조선족향에는 남흥촌, 대성촌, 북흥촌, 태양촌의 한인 부락이 있고, 어지조선족향에는 금하촌, 신흥촌, 창평촌, 흥안촌이 속해있다. 이 밖에 조선족향에 속해있지 않지만 한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부락으로는 경양진의 수남촌, 로가기향의 신성촌, 마연향의 사구자촌, 모아산진의 기풍촌과 삼련촌, 상지진의 성광촌, 야부리진의 동흥촌, 우지미향의 조흥촌, 일면파진의 월성촌, 원보진의 이룡산촌, 동명촌, 위하진의 호산촌, 장수향의 선광촌, 흑룡궁진의 려명촌 등이 있다.

하동조선족향에 한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로 『상지시 조선 민족사』에 따르면 1927년에 남흥촌에 200여 명, 1933년까지 450명의 한인들이 모여살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하동의 한인 집단 주거지는 1933년 5월부터 안전 농촌을 건설하면서 집단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 더해져 579세대, 2,459명이 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에 한인들은 오늘날의 남흥촌, 대성촌, 북흥촌, 태양촌 등으로 불리는 곳에 농무계 소속의 ‘계’를 이루면서 살았는데 민간에서는 ‘툰’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태양촌은 11계, 12계, 13계, 14계가 있었던 곳을 합쳐서 1946년부터 새롭게 이름을 붙인 곳이다. 1933년 이후 이들 한인 숫자는 정세변화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지만 1939년 3,445명으로 증가하였다.

어지조선족향의 경우에는 마이하의 발원지가 되는 평탄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선족은 4개의 행정촌과 7개의 자연툰에 나뉘어져 살고 있다. 조선족은 총 인구 12,297명 중에서 2,730명에 해당하고 있다. 어지조선족향하동조선족향과 마찬가지로 1937년과 1943년 사이에 집단 부락이 건설되면서 조선족의 집단 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후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금하촌, 신흥촌, 창평촌, 흥안촌의 4개 행정촌과 신흥, 금하, 흥안, 초산, 명신, 창평, 창성 등의 7개 자연 마을만이 조선족 마을로 남게 되었다. 자연 부락의 지명은 대부분 출신 지방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 붙였다. 예를 들어, 창성은 평북 창성 출신 300명이 집단으로 이주해 왔기에 그대로 마을 이름을 창성으로 붙였다.

이밖에 한인 집단 부락으로는 상지시에서 동남쪽으로 140여㎞ 떨어진 경양진 수남촌이 있다. 이곳은 1945년 이후 자유 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104세대, 414명이 살고 있다. 로가기향 신성촌은 163세대 647명이 살고 있는 농촌 마을로서, 1902년에 최봉준 일가가 기차를 타고 처음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 상지에서 조선족 이민 역사가 제일 긴 곳이기도 하다.

현재 한인 부락으로 일제 강점기가 아닌 1945년 이후에 한인들이 점차 모여 살면서 집단 부락이 형성된 곳으로는 마연향 마연촌, 사구자촌, 홍성자촌, 무아산진 삼련촌, 일면파진 월성촌, 원보진 이룡산촌과 동명촌, 위하진 호산촌, 그리고 1975년에 설립된 우지미향 조흥촌 등이 있다. 한편, 모아산진 기풍촌은 1994년 전체 조선족이 하얼빈시 태평구 민주향 신발촌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상지시에서 없어진 경우이다.

상지진 상광촌의 경우에는 1919년 자유 이민자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된 이래 인구가 늘어서 성광조선족 행정촌이 설치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래 한국으로 일하러가면서 인구가 줄어 현재 10세대에서 농사를 짓는 집은 1세대에 불과하여 성서촌에 합병되면서 사라져버렸다.

이와는 반대로 야부리진 동흥촌은 1933년 일본인 소작인이었던 몇 명의 한인에 의해 마을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 지속적인 마을 개발과 소득 증대로 인해 하얼빈시의 문명촌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한족과 잡거하고 있는 장수향 선광촌과 같은 사례가 있다. 1920년대 후반에 조선이주민들이 수전 농업을 하면서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였으나 오늘날 한족이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조선족들은 도회지로 이주해 나오고 있는 사례이다.

수전 농업과 조선족 촌락 공동체

중국 한인의 가장 큰 경제 기반은 바로 수전 농업이다. 한랭한 중국 동북 지방에 수전을 개척하고 벼농사를 지어 “해란강반에 벼꽃 향기 넘친다”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벼농사를 위주로 한 한인 농촌 마을은 논농사의 북한계선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정도로 중국 동북 지역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68년에 연변두만강 변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이래 1890년에 해란강변의 서전 평야와 평강 평원에서 벼농사를 성공하였으며, 한랭한 기후, 기술 등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10년에서 1930년대까지 기후가 한랭한 흑룡강성에서도 개간한 수전 면적이 7,000 ha를 넘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수전을 개간하였다. 1946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지시의 여러 한인 마을에는 토지 개혁과 함께 인민 공사가 만들어지고 세대별 생산량 도급제가 실시되는 등 수전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업발전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한인 마을을 중심으로 농업 기계화와 과학적 영농 방식, 종자 개량, 관개 시설 건설 등의 다양한 농업 생산 기술의 혁신이 추진되었다.

중국에서 한인이 벼농사를 지은 것은 1870년에 통하현 상전자가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140여 년이 넘은 이주 역사에서 보듯이 중국 한인 사회는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한 촌락 공동체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촌락 공동체는 가족 관계를 고리로 하고 벼농사를 짓는 쌀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관개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마을이 협력하는 생활 공동체기 필수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동족의 혈연적 관계와 함께 한 고향이라는 지연이 결합함으로서 친척 관계가 사회 구조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족 마을에서는 촌락에 대한 귀속감과 함께 같은 마을 사람끼리는 강한 운명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동체 의식과 마을 단위의 집단 의식이 민족적 결집력으로 이어져 강한 유대감을 확보하였다. 이런 결속력은 중국에서 집단적으로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족의 지위를 높이는데 이바지 하였다.

개혁개방에 따른 조선족 촌락 공동체의 해체

그러나 개혁개방 이래 상품과 경제활동의 개성화가 강조되면서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도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 중의 괄목한 변화는 농업 생산이 급격이 위축회면서 전통적 농업 생산에 기반을 둔 사회 구조가 급격하게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한국과의 교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중요한 변동 요인이 되고 있다. 조선족 사회와 한국과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는 조선족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한국에 나가 노동을 하여 많은 돈을 벌어 중국으로 돌아온 조선족들이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 집을 사서 상업 활동 등을 하면서 정착하면서 조선족 농촌사회가 인구 공동화 문제를 앓게 되고, 농토를 중국인들에게 할양하거나 임대함으로써 전통적인 농촌 촌락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 농촌에서 빈집이 늘어나고 조선족 집거구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상주 인구와 실제 인구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름만 조선족 동네일뿐이 되고 있다.

조선족 동네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한국으로의 입국 비자를 받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도시 생활과 시장 경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과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전체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인과 결혼하는 조선족 여성들이 늘어나고 한국에 나가 일하는 인구 비율이 늘어나면서 조선족 농촌사회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다. 한국으로 일하러 나가는 조선족 여성들이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남녀 성비가 균형을 잃게 되면서 농촌의 노총각 문제가 등장하고 몇 해 동안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마을이 늘어나고 있는 등의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부모가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바람에 조부모의 손에 맡겨진 아이들이 앓고 있는 정서적 교육적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상지시의 조선족 마을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흑룡강 신문은 2006년 4월 19일자에 ‘우리 애들 할머니 손에서 자란다’라는 기사를 실고 있는데, 상지시 소학생을 16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8%가 조부모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문제를 알리고 있다. 아이들 부모는 대부분 연해도시와 해외에 나가 있어 격세교육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자료에서도 인구가 줄어들면서 조선족 민족향진이 한족과 병합되어 그 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조선족학교수도 줄어들고 있다. 예를 들어 1989년부터 2000년까지 흑룡강성에 있는 19개의 조선족중등전업학교가 6개로 줄었고, 연합중학교도 33개에서 19개로 감소하였다. 소학교도 188개에서 77개로 줄어들었다.

스스로를 구하라! 조선족 농촌 공동체의 자구 노력과 미래

중국 조선족들은 이런 농촌 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사회 구조의 해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여러 방향에서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을 살펴보면 첫 번째, 벼농사를 더욱 특성화하여 경제적 기반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은 ‘국가 우질벼 기지 핵심구’로 선정되어 우수한 벼 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비닐하우스 육모, 일본 농업 기술 전문가 초빙 육모 기술 전수, 모내기와 추수의 기계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지역이기는 하지만 오상시 홍륭향 신립촌의 조선족 농민 육종가 이수철이 20년 이상 개발한 ‘용도7호’는 중국 1등쌀로 자리매김 하였고[흑룡강 신문 2008년 7월 31일자],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금성촌의 홍상표는 유기 농업과 생태 농업을 이끈 공적으로 전국 농촌 우수 인재로 선발되었으며, 2003년 한국에서 오리 농법을 도입하여 ‘탕왕오리쌀’ 상표를 등록하고 2006년에는 흑룡강성 유기벼 협회장을 맡아 한국과의 생태농업협력을 적극 추진하였다[흑룡강 신문, 2008년 12월 30일자].

두 번째 노력으로, 마을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새농촌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다. 상지시 어지조선족향 신흥촌에서는 도시로 떠나거나 한국에서 일하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부금을 받아 마을 공동 회관을 짓고 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낙후된 주거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개인의 돈을 보태어 신농촌형 주택을 짓고 있다. 신문기사에서도 나타나는 사실로는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조선족향 료원촌에 아파트단지를 지어 37가구가 입주하여 현대적 도시생활을 누리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흑룡강 신문 11월 12일자]. 새농촌 건설 사업에는 농촌 지역에 아파트 신축, 포장도로 건설 뿐 아니라 농촌 생활 개선을 위하여 마을광장, 가로등 설치, 주택시설 개선을 위해 한국식 온돌방을 도입하거나, 케이블TV, 전화, 광대역, 상하수도 등의 위생, 치안, 조경 등을 촌에서 책임지고 관리해주는 여러 활동이 망라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수전 농업으로 유명한 조선족 마을의 인구가 줄면서 조선족 농촌의 일부 마을에서 농사짓는 조선족 농가가 한호도 없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상지시 일면파진 월성촌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족 사이에 도급비를 적게 하여 농사를 짓는 농가가 늘어나도록 하는 방향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월성촌에는 현재 한족 농가가 한호도 없는데, 그 이유는 촌락 지도부가 개인적으로 조선족 농가가 한족 농가에게 농지를 양도하는 것을 절대로 막았으며, 만약 필요한 경우 농지를 회수에서 조선족 농가에게 도급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촌지도부가 중재하여 도급비도 일정하게 조정하여 월성촌은 조선족 마을의 순결성을 지켜내었다[흑룡강성 신문, 2006년 3월 10일자]

넷째, 자구 노력의 일환으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상지시 조선 민족사』와 같은 지방 지지를 편찬하면서, 조선족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조부모의 손에 양육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서 멘토제를 운영하여 정서 순화를 꾀하고 있으며, 교육의 질을 높여서 한족 학생들이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조선족학교보다 한족학교를 선호하는 의식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지시 하동향이나 어지향의 향장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농촌건설을 위한 조선족 지도자들의 노력일 것이다. 하동조선족향의 송미란(50) 향장은 한국에 나갔다가 중국으로 귀국한 조선족들이 아파트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족마을에 아파트 집거구를 건설하여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또한 한국으로 나간 조선족의 농토를 한족에게 넘기는 대신에 농촌기계화률을 높이고 합작기구를 만들어 공동 경작함으로써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선족 학교를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상지시 어지조선족향에서도 농민 전업 합작사를 만들어 한국으로 나간 조선족 가구의 농토를 관리함으로써 소득을 보전하고 농업 기계화율을 높이려는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이 빠른 도시화를 경험하면서 과거의 농촌마을이 도시지역에 의해 포위되는 성중촌(城中村)이 흔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빠른 도시화에 따라 조선족마을이 과거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어떤 모습으로 조선족 농촌마을의 모습을 바꿀 것인지, 주민들의 생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어떤 기반시설을 갖출 것인가?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떻게 안정적인 조선족의 경제 및 정치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가? 여러 측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해답을 모색하여야 한다.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국 속에 우뚝 선 소수민족으로서의 높은 위상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촌공동체의 와해와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대한 적확한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노력과 함께 인재 양성을 통하여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스스로의 위상 확보를 통한 문제 해결 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현규환, 『한국 유민사(상)』(흥사단 출판부, 1972)
  • 이훈구, 『만주와 조선인』(성진 문화사, 1979)
  • 주성화, 『중국 조선인 이주사』(한국 학술 정보,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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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송미란, 상지시 하동향장, 20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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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권세준, 72세, 상지시 하동조선족향 대성촌 주민, 2013. 7. 19.)
  • 인터뷰(윤희준, 63세, 상지시 장수향 선광촌 주민, 2013. 7. 19.)
  • 인터뷰(김동호, 57세, 상지시 어지조선족향 신흥촌 촌장, 201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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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hjlxinwen.com
  • http://www.hlj-news.com
  • http://www.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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