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族 마을 立地와 新農村 建設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朝鮮族 마을 모습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3년 7월 19일~7월 20일 |
|---|---|
| 조선족 마을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조선족 마을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조선족 마을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조선족 마을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조선족 마을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배초구진 |
| 조선족 마을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산 아래 옹기종기 집들이 자리 잡은 고즈넉한 한국의 마을 풍경을 떠올릴 만큼, 중국 조선족 마을에서도 배산임수에 의해 집터와 마을 터를 잡는 풍수가 중요하였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는 산을 뒤에 등지고 개울을 앞에 두는 마을과 집터를 잡는 기본 원리이다. 풍수에서 명당은 배산임수뿐만 아니라 집터가 넓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곳을 최고로 쳤다.
집터가 넓으면 재산이 늘어나고 조화를 이루면 재산을 모을 수 있다고 믿었고, 높은 산이 있으면 큰 기개를 가진 인물이 태어나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면 생기가 일어나고, 반대이면 총명한 자손들이 태어난다고 믿었다. 특히, 집안이 밝고 뜨락이 넓으며, 샘이 달고 땅이 비옥한 곳이 좋은 터라고 여겼다. 남쪽을 보고 앉아서 왼편으로는 물길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넓은 길이 지나가며 앞으로는 안산이 편안하게 자리 잡고, 뒤로는 언덕을 지고 있는 곳이 귀한 명당이었다. 마을 터로는 큰 도로에서 빗겨있어 큰 길에서 보이지 않으며, 구릉진 남쪽 경사면에 안온하게 자리 잡고 개울이 마을 앞에 흐르는 곳이 최고의 명당 터였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조선족 마을은 이런 풍수의 원리에 따라 거의 대부분이 구릉 아랫자락에 남쪽을 향하게 자리 잡았다. 남쪽을 향할 수 없으면 배산임수를 중요하게 여기며 마을의 좌향을 정하였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장재촌(長財村)에 있는 한옥 기와집은 배산임수의 남향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족 가옥이다. 길림성 왕청현 백초구진에 있는 조선족 마을 봉림촌은 남향이 아니더라도 배산임수의 형국을 중요하게 여기며 마을의 위치를 잡았다.
봉림촌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마을 앞에는 가야하가 흐르고 있으며 마을 뒤편에 해당하는 동쪽에는 구릉을 두고 있다. 또한 큰길에서 벗어나 강의 건너기 전에는 마을의 그림자도 보기 힘들지만 강을 건너 동구 앞의 숲을 지나가면 안온하게 자리한 마을이 나타난다. 이렇게 중국 땅에 살아도 멀리 두고 온 고향 마을과 같이 좋은 땅을 찾는 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한인 이주 집단촌은 전통적 풍수원리에 따라 세워진 자생적인 조선족 마을과는 전혀 다르게 논농사를 위한 용천, 즉 물이 마을의 위치를 정하는데 가장 중요하였다. 이것은 정착한 곳의 지형이 주로 평지에서 조선과 같은 배산임수의 땅을 취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있지만 경작지에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는 생활의 편리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집단촌은 논에서 가까운 평지에 자리 잡고, 남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 집단촌 마을에서는 외부 세력에 대한 방어와 손쉬운 주민관리, 벼농사를 위한 논과의 거리, 그리고 수전을 위한 물관리가 마을의 위치를 잡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 결과 집단촌으로 시작한 마을에서 집들은 줄을 지어 배치되었고, 마을들도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있다.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에 있는 조선족 마을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집단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오늘날에도 조선족 주민들은 다른 마을을 부를 때 “일계, 이계” 등과 같이 ‘계’라는 지명을 끝자락에 붙여 부른다. 그 이유는 관리를 위해 20여 개에 달하는 마을 이름을 ‘계’를 붙여 매겼던 일제 강점기 시대의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의 대성촌은 이런 집단촌으로 건설된 마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한족들의 마을은 대부분 밭농사가 쉬운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조선족 마을은 논농사가 용이한 용천을 중심으로 일정한 크기의 사각형 부지에 있으며, 격자형으로 구획된 필지별로 나란하게 집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과거 집단촌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약 20호 규모의 장방형의 마을 외곽에 높이 3m에 달하는 담장이 토비들로부터 방어를 위해 둘러쳐져 있었고 네 귀퉁이에는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담장도 헐리고, 1980년대에는 이전의 초가집과 흙집까지 모두 헐고 새롭게 지은 농가주택들이 마을에 들어섰다. 오늘날 대성촌에서 군데군데 가지런히 정돈된 땔감더미와 먼지까지 털어낸 듯 정결한 마당은 조선족의 깔끔한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주 초기에 한인 마을의 가옥형태는 어느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사는가에 따라 그 특징이 달랐다.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짓는 가옥은 가로 두 줄로 방이 배열되는 겹집이고 합각 지붕이 많다. 반면에 평안도 사람들의 가옥은 방이 일자로 배열되는 외통집과 맞배 지붕이 많다. 한인 마을 가옥의 주택은 맞배 지붕, 우진각 지붕, 합각 지붕의 세 가지 형태였다. 맞배 지붕은 경사지게 만든 지붕을 좌우로 대칭되게 마주보게 지은 것으로 지붕의 처마가 벽 밖으로 나온다. 우진각 지붕은 네 면으로 경사진 지붕을 가진 것으로 사다리꼴 형태의 용마루 양측과 두 개의 삼각 형태 사이 지붕으로 이루어 졌으며, 한 갈래의 용마루와 네 갈래의 박공마루를 합쳐 다섯 개 용마루가 있었다. 합작지붕은 팔작 지붕이라고도 부르며, 고급 가옥에 주로 사용한다. 기본 용마루 양끝에서 추녀 중간까지를 굽게 만들고 박공마루를 추척과 장척으로 나누어 각을 이어 놓아 용마루가 보통 아홉 갈래를 이루게 된다. 합각지붕의 윗부분은 맞배 지붕 모양이고 아래 부분은 우진각 지붕 모양을 띠었다.
지붕을 덮는 재료는 볏짚과 기와를 많이 이용하는데, 초가집은 ‘이영을 엮어서’ 볏짚이 유실되지 않도록 새끼줄로 묶어 지붕을 만들었다. 보통 2년에서 3년 사이에 한 번씩 햇 볏짚으로 묵은 볏짚을 덮었다. 기와집은 주로 검은색 기와를 쓰는데 암키와와 수키와를 나누어 얹었다. 먼저 진흙으로 붙여 놓은 암키와 홈 위에 수키와를 덮어서 완성하였다. 중국 조선족에서 사용한 기와는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기와보다 조금 큰 장방형의 평기와를 많이 사용하였다. 수막새에는 태극문양 등의 전통문양을 새겨 넣었다.
벽은 재료에 따라 흙벽, 나무벽, 돌벽, 벽돌벽 등으로 달랐다. 가장 많은 것은 흙벽이었는데, 흙벽에는 협심벽과 황토벽이 있었다. 협심벽은 기둥 사이에 나뭇가지나 곡식대로 가로세로의 벽심을 얽어 놓고 그 안팎에 흙을 발랐다. 흙은 볏짚을 섞은 흙을 먼저 바른 후에 그게 마르면 다시 진흙과 모래를 섞은 흙은 한 벌 바르고, 바른 흙이 모두 마르면 그 위에 석회칠을 하였다. 황토벽은 기둥사이에 널빤지를 대어 놓고 널빤지 사이의 틈으로 흙을 넣어 다진 다음, 널빤지를 떼어내서 만들었다. 황토벽은 압록강 연안의 조선족 민가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나무 벽은 통나무 벽과 널빤지 벽이 있는데, 통나무 벽은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쌓은 후에 사이의 틈새에 황토에 밀짚을 섞은 흙을 발라 채워서 완성하였다. 이런 집을 귀틀집이라고 한다. 널판지벽은 목재 구조물에 널판자를 박아서 만든 벽으로 본채보다는 부속건물에 많이 사용하였다. 돌벽은 돌조각을 쌓아서 벽을 만든 것으로 요령성 남부와 흑룡강성 동남부의 조선족 민가에서 발견된다. 벽돌을 이용한 벽돌벽은 부유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 신농촌사업으로 도입한 개량주택에서는 보온, 단열, 방화, 내구성이 높은 벽돌벽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조선족 민가에서 독특한 시설이 툇마루와 뜨락이다. 툇마루는 앞쪽 벽 아래쪽에 설치하며 지면보다 높고, 폭은 50센티 정도이다. 신발을 벗거나 여름철에 더위를 식히는 역할을 한다. 뜨락은 앞이 뒤보다 넓으며, 앞 뜨락에는 창고, 가축우리, 변소 등의 보조건물을 짓거나 채소 등을 재배하였다. 뒷 뜨락에는 사용하지 않는 잡동사니 들을 놓아두었다. 뜨락 주위에는 허리 높이의 울타리를 두르거나 담장을 쌓아 놓고 안팎 풍경이 서로 호응하는 효과를 누렸다.
전통적인 조선가옥에는 보통 웃방, 사랑방, 정지로 나누어 있었다. 모든 방에서 밖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있었다. 가옥에서 정지간은 제일 넓고 가족들이 모여 앉은 거실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부엌과 연결되어 여성들의 활동 공간이다. 웃방은 정지간의 위쪽에 있는 방으로 자녀들이나 신혼부부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사랑방은 웃방의 위쪽에 있으며 남성들이 생활하고 손님을 맞는 공간이며, 여성과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난방시설은 온돌식 구들이 대표적인데, 온돌은 집안의 지면을 모두 구들로 만들어 취사를 하는 열로 난방을 할 수 있고, 지면아래에 구들 고래를 설치하여 공간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조선족집거지구의 농촌에서 볼 수 있던 이런 전통적인 주거구조는 점차 중국의 기후에 맞추어 변하면서 오늘날 예전의 조선족 집들은 거의 찾기 어려워졌다. 추운 겨울에 바람을 막기 위해 방 구조를 한족식으로 고쳤는데 출입구는 부엌에만 두고 방에는 창문만 내었고, 북쪽 벽은 아예 봉해 버렸다. 구들을 남과 북으로 가르고 그 사이에 너른 공간을 두는 북방의 기후에 알맞은 한족식 집 구조로 변하였다. 오늘날에는 스팀까지 돌리고 있고 객실을 따로 갖추며, 볏짚대신 기와를 얹고 벽돌 담장을 두른 현대식 가옥이 흔하다.
특히 보이는 가옥의 변화뿐 아니라 보이지 않은 변화가 조선족마을을 휩쓸고 있다. 오늘날 조선족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나가거나 연해도시로 나가 일하는 바람에 주민수가 감소하고 고령화 문제를 앓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선족인구가 줄어들면서 개간해 놓았던 토지를 한족에게 넘기고 마을이 해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우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농지는 한족들에게 임대하여 농사를 짓게 하면서 마을에 남아있는 주민들이 빈집을 관리하면서 조선족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이다. 하동조선족향의 대동마을의 경우,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마을회관 격인 마을 공동 식당에서 만난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원로인 권세준(72세), 안응노(65세), 조해룡(67세) 씨에 따르면 “원래 주민들의 수가 1,100명을 넘는 마을이었지만 현재 700명 가까이는 한국에 나가 살고 있고, 300명은 중국의 연해도시에 살며, 마을에는 약 100명 정도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본인들도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본 경험이 있으며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중국에 돌아와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농사는 중국인에게 짓도록 하고 1ha 당 1만 원(중국화폐)의 임대료를 받는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족은 농사보다는 토지임대에서 오는 수익과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편하게 살고 있었다.
두 번째 사례를 보면, 마을이 거의 해체되고 아무도 마을에 거주하지 않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한족과 조선족이 혼합해 살고 있는 혼합촌에서 주로 관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지시 장수향의 선광촌 조선족 마을은 한족과의 혼합촌으로 마을의 호수는 136호 517명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중에서 조선족으로 한국 체류자는 218명, 중국 연해도시 거주자는 61명에 이른다. 현재 조선족은 촌장인 임성용(62세)를 포함하여 불법체류자로 한국에서 강제 귀국 조치된 황명순(58세)와 몇 명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촌장인 임성용씨는 “한국에서 노무일로 돈을 모아서 중국으로 돌아온 이래 상지시에 아파트를 사서 거주하면서 선광촌 촌장 일을 본다”고 하였다. 필자들이 인터뷰를 위해 촌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을 때 선광촌이 아닌 상지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족이 떠난 마을의 토지는 한족들이 들어와 살며 경작하고 있었다.
세 번째 사례는 촌장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조선족이 함께 마을을 잘 관리하고 새로운 농촌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중국정부로부터도 모범사례로 오르내리는 경우이다. 어지조선족향 신흥촌, 금하촌, 창평촌, 흥안촌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어지조선족향에는 원래 7개의 마을이 있었으나 2000년에 4개로 합병되었다. 신흥촌 마을 촌장을 맡고 있는 김동호씨(57세)에 따르면 어지조선족향은 1932년 동청철도를 따라 경상도 일대의 조선인들이 이주하면서 만들어 진 곳이다. 이곳에 있는 신흥촌은 처음에는 집단촌으로 개척되어 마을 둘레에 토성을 쌓고 가운데 만든 길을 중심으로 5호씩 구성된 4개 반으로 구성된 마을이었다. 현재에는 과거의 집단촌의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집집마다 우물이 남아있다. 촌장인 김동호씨도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에 나가 노무생활을 하였는데 이후에 중국으로 돌아와서 촌장이면서 당 지부 서기를 맡고 있다. 신흥촌은 많을 때는 665가구까지 살았지만 오늘날은 58가구만이 살고 있다. 신흥촌은 토지와 마을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국의 새마을운동 사례를 참고로 하여 농민전업합작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한국으로 나간 마을 주민의 토지를 합작사에서 공동으로 경작하여 소득을 7만원에서 8만원까지 보전하고, 농업 기계화율을 70%까지 높여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신흥촌은 조선족마을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마을이 한족화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신흥촌과 이웃한 금하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비교적 젊은 측인 홍영청(44세)씨가 촌장을 맡고 있는데 그는 한국말은 못하지만 농촌공동체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외지에 나가있는 주민들과 연락을 하여 송금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의 재산을 보전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 마을 주민인 박정술씨는 산동에서 대리석사업을 하면서 번 돈을 마을에 보내어 마을 회관을 만들었으며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식당을 운영하여 수익을 얻고 있었다.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 중국 공무원들이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조선족 식당이 맛있고 저렴하여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라고 칭찬하였다.
중국이 2006년부터 11차 5개년 규획을 세우고 대대적으로 선전에 나선 신농촌 건설 제안은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을 모델로 했다고 우리나라에서도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신농촌 운동은 중국의 지속적 발전을 좌우할 핵심 문제로 삼농(三農, 농촌, 농민, 농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농 간의 빈부격차를 완화하고 농촌의 빈곤을 퇴치하며, 농촌 취업 장려책 등을 진행하기 위해 농민과 농촌을 육성시켜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계획이 바로 ‘신농촌 운동’이다. 이는 크게 ‘현대식 농업 발전’, ‘농민소득증대’, ‘농촌 환경 개선’, 신농민 육성‘, ’농업 및 농촌 재정 투입 증대‘, ’농촌 개혁 심화‘를 골자로 하고 있다. 2020년이나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지만 중국의 농촌이 새 로운 옷을 갈아입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농촌 운동의 시대에 조선족 마을의 발전은 결국 어떤 방향으로 조선족마을의 공동체의식을 유지하고 발전의 방향성을 설정하는가 하는 리더십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의 향장을 맡고 있는 송미란(50세)씨는 이런 리더십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향장은 비록 조선족이지만 당서기가 한족이고, 조선족 간부들 사이에 나이차가 심하고 대학생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조선족 간부의 수가 줄어들면서 세대교체가 어려운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송 향장은 “조선족이 한국에 나갔다 돌아오면서 아파트 생활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농촌에도 조선족을 위한 아파트를 짓고 이를 집거구로 만든다면 조선족마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는 토지는 기계화 영농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선족 학교를 유지하는 일이다. 조선족 학교가 문을 닫으면 언어가 없어지면 조선족 발전의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였다.
중국의 조선족 농촌 마을에 신농촌 운동과 함께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족마을은 신농촌 운동의 기회를 활용하여 아파트를 짓거나 생활환경을 개선하면서 정주여건을 좋게 만들어야 한다. 즉, 인구감소와 고령화 문제와 같이 한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중국 조선족마을의 정주 환경을 좋게 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위기를 새로운 발전을 위한 기회로 만드는 것은 조선족 공동체를 자발적으로 유지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조선족 공동체 리더들의 의지와 올바른 판단에 달려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