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생활상의 변화 속에서 전통과 정체성 찾기를 위한 만융촌과 신흥촌의 노력

한자 生活相의 變化 속에서 傳統과 正體性 찾기를 위한 滿融村과 新興村의 努力
분야 생활·민속/생활|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심양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4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대 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아파트와 공장이 즐비한 만융촌으로 바뀌기까지

심양시 동롱구 훈하민족개발구에 위치한 만융촌(滿融村)은 심양의 중심지 남부역에서 남쪽으로 8㎞ 떨어져 있다. 심양 중심지에서 택시를 타고 30여 분을 이동하거나 심양 중심지인 서탑에서 24번 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지나면 만융촌에 닿는다. 만융촌에서 신흥촌까지도 버스를 타고 2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만융촌신흥촌은 한인[조선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인 마을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각지의 한인 아이들은 한족 학교를 다니게 되고 따라서 한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만융촌신흥촌의 한인들은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한인들이 대규모로 모여살 수 있는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각지에 있는 한인들을 흡입하고 있어 심양 인근 한인 사회의 정체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중국에 한인[조선족] 마을이 많이 있지만 특히 이 글에서 만융촌신흥촌을 다루게 된 배경에는 한인[조선족]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이 두 마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어 그들의 문화와 말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한인[조선족]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한인 스스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인[조선족]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는 것과 같은 인위적인 노력에서 보여진다.

1934년 만주로 이주한 경상도 사람과 평안도 사람 10여 호가 한족(漢族)들이 버린 냉습지인 이곳을 개척하면서 조선인 마을이 시작되었다. 처음 이곳에 이주한 한인들은 깊이 50m의 수로를 파서 10리 밖에 있는 훈하(燻河)를 연결시켜 논을 개발하였다.

당시 마을의 한인 지도자 하덕용(河德勇)이 영원히 융성하라는 의미로 ‘만융촌’이라고 명명하였다. 주민들이 혼신을 다해 개척하여 생활이 안정될 무렵 해방이 되었다. 당시 마을 뒤로 철로가 이어지는 지리적 여건으로 한인들은 토비를 피하여 철로변으로 집결하였고 점차 가구수가 증가하였다.

만융촌은 모든 것의 집체화를 도모하기 위해 1958년 시작한 대약진 시기부터 유명세를 탔다. 마을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협동 작업으로 생산성을 높였다. 공동으로 트랙터와 자동차를 구입하고 모심는 기계를 사용해 농사짓고 가마니 짜는 기계를 자동화 하는 등 기계 영농화에 성공했다. 그리고 시멘트공장, 양어장, 과수원, 피복창, 전분공장 등을 만융촌에 유치하거나 설립하고 농한기에 유휴 노동을 소득 증대에 활용하는 등 요령성 제일의 모범 마을로 지정되었다.

주민 이봉서(1938년생)씨가 마을에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만융촌은 50~60여 호 되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그는 4살 때 평안북도 의주에서 부모님을 따라 이곳 만융촌으로 왔다. 그는 성장하여 한동안 객지 생활을 하다가 만융촌에 공장이 들어섰을 때 이곳으로 돌아왔다. 과거에는 벼농사를 주로 하였으며 밭농사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87년 무렵에 물이 부족하여 국가에서 수전(水田)을 하지 못하게 하여 한전(旱田)으로 바뀌었다. 현재 마을 외곽의 밭에는 옥수수와 콩을 주로 심는다.

만융촌은 중국이 개방되기 전에는 700여 호가 있었는데 그 후 이주자가 늘어나서 현재 한인[조선족] 인구는 1,700여 호에 이른다. 외지에서 들어온 이주자는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등의 각지에서 들어온 한인들이다. 최근 한족도 많이 이주하여 700~800호나 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만융촌에는 개인 소유의 많은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공장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는 개인 소유가 아니었다. 이 무렵 기술자인 이봉서 씨도 이곳으로 돌아와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공장 일은 농사보다 수입이 좋았다. 2013년 현재 만융촌에는 60~70개의 공장이 있다. 종류는 목재가구, 자동차 부품, 신발, 봉제, 기계 등 다양하다. 처음에는 한인[조선족]들이 공장을 대부분 운영했으나 지금은 한족과 한인[조선족]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이곳 공장에서 한인[조선족]의 비율이 낮아지는 것은 이곳에서 한 달 버는 돈은 2,000~3,000위안 정도이다. 따라서 한인[조선족]들은 한국, 일본, 상해, 천진, 대련 등지로 떠나고 대신 한족들이 그 자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촌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떠나서 소학교의 학생 수도 많이 줄었다.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변모한 신흥촌

만융촌에서 10여 리 떨어진 신흥촌(新興村)을 개척한 사람은 김병일이다. 그는 1937년에 공동 묘지가 있던 이 일대를 개척하여 신흥 농장을 세웠다. 1943년에 김병일이 한국에서 이주민 13여 호를 데리고 오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마을은 170~180여 호까지 늘어났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주민 중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당시 빈집이 많았으며 주민이 거주하는 집은 100여 호 되었다. 당시 흑룡강성이나 길림성 쪽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사람 중에 돈이 없어 가지 못하자 신흥촌에 빈집이 많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들어왔다. 마을을 개척했던 김병일 씨도 중국이 공산화 되자 지주라는 신분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갔으며 그의 재산은 공산당의 소유가 되었다. 1948년 11월 2일 중공군이 북경보다 먼저 이 일대를 점령하였다. 모택동 시절에는 지주를 비판하고 탄압하였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1950년대에 신흥촌의 농업은 집단 농장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도 사이다, 종이, 기와, 유리 등을 만드는 각종 공장이 마을 주변에 있었으나 국가소유였다. 중국이 개혁되고 집체에서 개체로 농업 경영 방식이 전환될 때 공장도 개인화되었다.

2003년에는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주민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거주한다. 현재 대부분 아파트이며 35호는 벽돌집이다. 아파트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창고를 지어놓고 농기구는 그곳에 보관한다. 근래에 한인[조선족]들이 땅을 한족에게 소작하도록 하여 임대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노인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젊은이들이 외지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가면서 이런 일이 생겼다.

만융촌과 신흥촌의 주생활

만융촌의 주생활은 초가집과 온돌방에서 시작한다. 주택의 구조는 평안도식이었다. 그 후 벽돌집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1995년에 이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이전의 초가집과 벽돌집은 대부분 사라졌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몇 집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사라졌다. 주생활이 아파트로 변화된 것은 이곳이 심양이라는 대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공장 등 다른 일에 종사하거나 은퇴한 노인들은 아파트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흥촌의 과거도 초가집으로 시작한다. 벽돌집도 있었으나 드물었다. 이장촌 씨 댁은 1978년에 초가집을 허물고 기와집을 지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신흥촌에 벽돌로 벽면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이은 ‘벽돌집’은 1970년대 초기부터 나타났다. 벽돌집은 지금 아파트 외부에 35호가 남아있다. 2003년에 아파트가 생겼다. 아파트를 짓게 된 이유는 마을을 넓히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각지의 한인들을 모아 전국에서 가장 큰 한인 마을을 만들자는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아파트를 짓고 마을문도 만들었다. 원래 한인들은 마을문을 만들지 않는다. 한인들의 풍속은 아니나 당시 이렇게 마을 문을 세웠다. 아파트를 지을 때 촌에서 주도를 하여 토지는 한인[조선족]이 제공하고 개발업자들이 건축하였다. 만융촌도 이러한 방식으로 아파트를 지었다. 오늘날 심양 주변의 한인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거주한다. 초기에는 외지에서 한인들이 들어와서 촌에서 의도하는 바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으나 후에 이들이 아파트를 팔아서 한족이 들어오게 됨으로 한인 중심의 마을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현재 아파트가 4,500호인데 이 중에 한인[조선족]의 비중은 40%이다. 점점 힌인은 줄어들고 한족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순희 씨의 기억을 통해 본 신흥촌 생활상

신흥촌(新興村)이 고향인 이순희 씨는 현재 심양에 거주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1939년에 조부모를 따라 5세 때 경북 달성에서 이주하였다. 처음에는 무순의 ‘소사’라는 한인 마을에 이주하여 소작을 하였다. 1960년대에 저수지가 생기면서 마을은 물속에 잠기게 되어 주민들은 타지(他地)로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심양 교외로 이사를 하였다가 이어서 철령으로 갔다. 조부(祖父)는 그곳에서 거주하다가 2000년대 초에 90여 세를 넘긴 나이에 작고하였다. 조부는 슬하에 6형제를 두었는데 호구 때문에 셋째 아들과 철령에서 살았다. 부친(父親)은 무순에 살 때 인근에 거주하는 모친(母親)을 중매로 만났다. 부친은 중국 군대의 일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귀국한 후 안휘성에 가니 그 부대에는 조선 사람이 없어서 전역을 하였다. 1960년대 초 심양 있는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당시 부친은 도시 호구였으나 모친은 농촌 호구[무순이 고향]였다. 따라서 심양으로 오지 못하게 되어 농촌호구인 신흥촌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는 집체화 시대이므로 자기 땅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일할 수 있었다.

이순희 씨는 1964년에 신흥촌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맏이이며 남동생 둘이 있다. 현재 남동생은 상해에 거주한다. 그녀는 1988년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딸을 낳았다. 그 딸은 현재 한국에 유학을 갔다. 이순희 씨가 살던 어린 시절에 신흥촌은 ‘정(井)’ 자로 반듯한 마을로 몇 백호가 되었다. 당시에는 100%가 한인들이었으며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나 더러 기와집이 있었다. 당시 우물 대신에 상수도가 있었다. 주택은 중국 한족식(漢族式)을 따랐다. 한족식 주택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지간이 나오며 그들도 시골은 온돌을 사용한다. 그녀의 유년기인 1966년부터 문화 대혁명이 실시되어 모택동 우상화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당시 가정에는 모택동의 초상화를 모시고 충성 맹세를 하였다.

이순희 씨는 신흥촌에 살 때 청명에는 가족과 할머니 산소에 갔다. 그러나 설과 추석에 차례는 지내지 않았다. 설에는 좋은 음식을 먹고 세배는 하였으나 차례는 지내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전통을 파괴해야 한다고 하여 권장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숨바꼭질, 화투도 치고 놀았다.

당시에는 다 가난하여 누가 잘살고 못살고 하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양식은 1년 먹을 것에 조금 부족했다. 노동력이 많은 집은 양식이 넉넉하였다. 부족한 집은 이런 집에 가서 빌려서 먹고 나중에 갚았다. 같은 토지에서 일을 하였으며 토지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었다. 한 달에 얼마씩 식량배급소에서 양식을 타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일을 했으나 양식이 조금 부족했다. 당시 일을 하면 식량을 1년에 200근 즉, 마대로 여섯 포대 정도 받았다. 당시 밥을 많이 먹었으니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으며 저축은 하지 못하였다.

이웃에 결혼식이 있으면 다 같이 가서 먹고 수건 한 개, 양말 한 켤레 정도 부조를 했다. 장례에는 상여(喪輿)를 쓰지 않고 산에 가서 묻었다. 그 후에는 화장을 하였다. 가정에서 가신을 모시는 것도 보지 못했다. 1980년대 개혁개방 때부터 집체가 해체되고 토지를 분배하여 농민들에게 경작권을 주었다. 당시 이순희 씨 댁은 10무(畝)정도 받았다. 1무가 666㎡므로 제법 넓었다. 이때부터는 양식 걱정이 없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좋아했으나 빈부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노인 협회의 협동과 단결

만융촌 노인 협회는 1986년 무렵에 생겼으며 현재 340여 명의 회원이 있다. 이 중에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조금 높다. 노인정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남자는 60세, 여자는 55세 이상이다. 만융촌 노인 협회는 요령성에서 가장 큰 노인 조직이며 6인의 간부가 있어 이들이 협회의 일을 결정하고 추진한다. 노인회의 건물은 촌정부에서 지원해주었으며 운영은 노인회 회비와 촌정부의 지원금으로 이루어진다.

건물 안에는 게이트볼을 할 수 있는 공간, 탁구장, 화투, 장기, 마작 등을 할 수 있는 공간, 신문과 잡지 등을 볼 수 있는 공간, 강당, 사무실, 할아버지방, 할머니방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곳은 아침 6시 30분에 문을 열어 이른 시간부터 노인들이 이용할 수 있다.

만융촌 노인 협회는 2005년부터 5월에서 10월까지 매일 저녁에 광장에서 주민들을 모아 춤을 추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노인 회관 실내 강당에서 한다. 처음에는 춤을 추는 전문가에게 배운 후 주민 중에 잘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현재 많은 노인들이 춤을 알고 있다. 주민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만융촌 노인협회는 한국의 경주(慶州) 노인회와 교류를 하고 있다. 매년 1년에 한 번 게이트볼 시합을 한다. 친선을 위한 목적으로 주로 경주에서 이곳을 방문한다. 이곳에서는 경비 문제로 경주를 왕래하지 못하고 있다.

만융촌은 다른 한인 마을에 비해 예로부터 삼재(三災)가 없는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만융촌은 인재(人災), 정치의 화 등 재앙을 겪지 않았다. 일본의 침략 전쟁 때도 만융촌은 죽은 사람이 없었으며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도 없었다.

만융촌의 노인협회는 변화하는 현실에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모국어와 문화를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신흥촌에는 현재 많은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대부분 한국에 나가고 일부는 일본, 미국, 유럽 등지로 갔다. 노인들은 은퇴하여 노인협회의 노인정(老人亭)을 다니면서 여가 생활을 보낸다. 이 마을의 노인 협회에서는 아리랑과 농악무 등을 열심히 하여 각종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5월 단오에는 소가촌 노인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데 이때 신흥촌 노인들도 참가하며 노인절, 청명, 국경일 등에서 각종 행사가 있을 때 노인 협회에서 참여한다.

소학교와 한인의 정체성 찾기

만융촌 소학교는 한때 600~700여 명이 되었으나 2013년 현재에는 260여 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한 호에 한 명씩은 학교에 다니고 부근의 마을에서도 왔기 때문에 학생 수가 많았으나 젊은이들이 외지로 나가면서 학생 수가 줄었다. 학교에서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함께 가르친다. 한족 학생들도 있고 한인[조선족] 학생들도 대학시험을 볼 때는 중국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 한인[조선족] 학교가 없는 마을에서는 학생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그런 마을에서는 모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만융촌으로 이주하여 이곳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도 있다. 만융촌에 한인[조선족] 가구 수가 1,000여 호 늘어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노인들은 농악무(農樂舞)를 하며 비록 일부지만 한국 문화를 잊지 않으려고 한다.

신흥촌에 있던 소학교는 2012년에 없어졌다. 지금은 소가촌에 있는 조선족 중심 학교를 다닌다. 현재 그곳에는 소학교 650명, 중학교 650명 정도가 다니는데 많을 때보다 절반이 줄었다. 현재 한인[조선족]의 인구가 줄고 있고 가정마다 아이를 적게 낳기 때문이다. 이장촌 씨에 의하면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러시아 고려인들처럼 한인[조선족]도 한국말을 잊고 살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인[조선족] 학교에 아이를 보낸다”고 한다.

사라져가는 만융촌과 신흥촌의 민속 의례

만융촌의 사람들은 평안도(平安道) 말을 한다. 현재 평안도 출신은 주민 중 20%를 차지하는데 이곳에 들어온 한인들은 모두 평안도 언어에 동화되어 평안도 말을 사용한다. 만융촌에서 평안도 언어가 토박이 언어로 주류를 차지하며 다른 지역의 방언을 동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융촌에서 전통적인 민속 의례는 1967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기 전만 하더라도 일부 유지되었으나, 당시 파행적인 혁명의 광기는 전통문화를 말살시키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 전에는 현 만융촌 노인회 회장의 선친(先親)이 목수였기 때문에 상여(喪輿)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난 후 사회주의적 판단에서는 “왜 무겁게 상여를 메고 가느냐? 수레에 실고 가라!”고 하여 장례(葬禮)의 미풍 양속은 사라졌다. 수레에 실고 장지(葬地)로 가던 상례가 이제는 차에 실고 화장터로 가게 되었다. 과거에는 마을 주변에 공동 묘지가 있었으나 이제는 사라지고 화장을 한 후 뼈를 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소가 있는 집에서는 청명에 산소에 간다. 지금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결혼식도 이제는 예식장에서 하는 서양식 혼례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신흥촌에는 평안도, 경상도 등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금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신흥촌에도 과거에 상여가 있었다. 출상을 할 때는 사발을 깨고 조선의 전통적인 상례를 유지했다. 과거 주변에 많이 있던 묘지는 이제는 화장을 한 후 강에 뿌리게 됨으로 사라졌다. 제사는 현재 장례를 치룬 후 3년간 지내고 난 후 그만두며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고 하지 않는 집도 있다. 이장촌 씨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조선의 풍습이 대부분 지켜졌다고 한다.

신흥촌 촌사(村史)에도 사진이 나와 있는 바와 같이 40년 전에만 하더라도 할머니들은 조선의 저고리를 입고 일을 했다. 그러나 신흥촌도 문화 대혁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문화 대혁명 10년 동안 민속은 멸실되었다. 가정에서는 족보(族譜)를 태우도록 하였다. 이장촌 씨 댁에서는 조부께서 땅속에 묻어 두어 겨우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전통 장롱 등 각종 민구(民具)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1985년 무렵에 한국에서 장사꾼들이 와서 한인들의 장롱 등 각종 민구를 사가지고 갔다. 이장촌 씨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오늘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생활이 힘들어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장촌씨는 과거가 그립다고 한다. 당시에는 서로 다 알고 어려워도 서로 나누어먹고 인심이 좋았으나 이제는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른다고 한다.

만융촌과 신흥촌의 한민족 정체성 찾기 노력과 과제

한인 마을은 변모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촌락에는 노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또한 그 빈 공간에 한족들이 들어오고 있다. “50년이 지나면 러시아 고려인들처럼 한국어를 잊게 될 것”이라는 말처럼 중국 내 한인 마을의 해체가 예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만융촌신흥촌에서 대규모 아파트를 짓고 각지의 한인들을 모아 살기 좋은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자 한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주민들은 한인[조선족]들이 모여야 민족 정체성이 담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아이들이 모국어를 배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조선족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하는 부모들의 노력에서도 알 수 있다. 만융촌에서는 한인[조선족]들이 모일 수 있는 행사를 위해 매일 공원에서 춤을 추는 시간을 마련한다. 물론 민족 전통의 춤은 아니지만 한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자체만으로 민족 정체성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농악무를 하는 것도 한민족 문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 한인[조선족]들이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는 일은 쉽지 않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 10년은 전통 문화 말살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해도 마을에 젊은이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부분 외지(外地)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현재 만융촌신흥촌의 촌정부와 마을의 원로(元老)들은 전거한 바와 같이 한인 마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왔다.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촌장(村長)과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역사와 문화 찾기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마을에서 한인들의 전통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행사나 이벤트, 축제(祝祭) 등을 열어야 한다. 대보름에 윷놀이대회, 단오에는 단오맞이 행사, 동제(洞祭) 부활, 농악무 등 각종 예능을 위한 동아리 활동 등을 장려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인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줄 수 있는 ‘마을 기록관’ 설립과 마을 가꾸기 운동 등 내부적인 자구책이 필요하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마을과 자매 결연 맺기와 교류, 한국 정부의 해외동포를 위한 전통 문화 지원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 강위원, 『조선족의 문화를 찾아서』(역사 공간, 2008)
  • 김덕묵,「마을 문화 활성화를 위한 방안, 마을 기록관을 제안한다」(『기록학 연구』 33, 2012)
  • 인터뷰(이봉서, 남, 1938년생, 심양시 만융촌 주민, 2013. 8. 8)
  • 인터뷰(이장촌, 남, 1967년생, 심양시 신흥촌 주민, 2013. 8. 8)
  • 인터뷰(이순희, 여, 1964년생, 심양시 거주, 201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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