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五女 山城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성곽(산성) |
|---|---|
| 크기 | 둘레 4,754m |
| 면적 | 60만㎡ |
| 문물|보호단위등급 | 중국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05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44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4년 7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78년 7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5년 6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6년 5~6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3월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6~1998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
| 훼손 시기/일시 | 1985년 |
| 문물 지정 일시 | 1961년 |
| 문물 지정 일시 | 1961년 10월 27일 |
| 문물 지정 일시 | 1963년 9월 30일 |
| 문물 지정 일시 | 1996년 |
| 현 소재지 |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N 41° 14' 36",E 125° 23' 44" |
| 원소재지 | 요령성 환인현 오녀산N 41° 14' 36",E 125° 23' 44" |
요령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오녀산(五女山)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산성.
오녀 산성은 고구려 초기의 산성으로 첫 번째 도성인 졸본(卒本)의 비상시 군사 방어성으로 파악된다. 해발 800m가 넘는 산 정상부의 평탄지와 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총둘레가 4,754m에 달하지만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 성벽이고 인공 성벽은 565m에 불과하다. 오녀 산성 내부에서는 청동기 후기에서 고구려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고구려 건국 과정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고구려가 국내 지역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중요한 거점성으로 활용하였고, 요(遼)·금(金)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오녀 산성은 일찍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세기 초반에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 등 일본 학자들이 여러 차례 성을 답사했으며, 1964년에는 북한과 중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조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오녀 산성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1996~1999년과 2003년 두 차례 걸쳐 대대적으로 조사·발굴했다. 1996년에는 산 정상부와 서문, 동북쪽 성벽 등 총 1,700㎡를 발굴하여 주거지 15기, 대형 건물지 1기, 구덩이 11곳을 확인했다. 1997년에는 점장대 서쪽 일대의 1,638㎡를 발굴하여 주거지 22곳, 대형 건물지 1기를 확인했다. 1998년에는 서문 동쪽 일대를 발굴하여 주거지 12기를 확인했다. 2003년, 왕면후(王綿厚)·신점산(辛占山)·이신전(李新全) 등의 추가 발굴을 통해 주거지 23기, 대형 건물지 1기 등을 확인했다. 이러한 발굴을 통해 신석기 시대에서 금대(金代)에 걸친 많은 유적을 확인하였는데, 특히 청동기 말기에서 기원 전후에 이르는 유적은 고구려 건국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오녀 산성은 중국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소재지에서 동북방으로 8.5㎞ 떨어진 오녀산에 위치한다. 산성 중심의 지리 좌표는 북위 41° 14' 36", 동경 125° 23' 44"인데, 해발 800여 m인 산 정상에 서면 환인 시가지와 혼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녀산의 동·남 양쪽은 원래 혼강 연안의 하곡(河谷)이었지만, 지금은 환인댐 수몰 지구로 변하였다. 환인댐 건설 이전에는 장강촌(長崗村)과 고려묘자촌(高麗墓子村)이 있었고, 동남쪽에는 고력묘자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혼강 상류를 거슬러 통화(通化), 혼강 지류인 신개하를 거쳐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集安), 혼강 하류로는 압록강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소자하(蘇子河)나 태자하(太子河)를 거쳐 요동 평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오녀 산성의 성벽 길이는 총 4,754m에 달하지만 대부분 천연 성벽이고, 인공 성벽은 565m에 불과하다. 북벽과 서벽은 거의 모두 천연 성벽이며, 남벽도 424m 가운데 인공 성벽은 150여 m밖에 안 된다. 인공 성벽은 대부분 경사가 완만한 동벽의 남반부에 위치해 있으며, 산기슭에 돌로 축조하였다. 외벽은 장대석으로 기초부를 튼튼하게 조성한 다음 쐐기형 돌과 북꼴돌을 맞물리도록 견고하게 쌓은 반면, 내벽은 괴석이나 판석으로 겉쌓기한 다음 하단에는 흙을 북돋우어 성벽을 보호했다. 성벽 윗부분에는 성가퀴가 남아 있는데, 폭은 1~1.5m 전후이며, 잔고는 0.2~0.8m이다. 성가퀴 안쪽에 장방형 돌구멍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곳도 있는데, 동벽 제5구간에서 11개의 돌구멍이 확인되었다. 성문은 남문, 동문, 서문 등 모두 3개가 확인되었는데, 동문이 혼강 골짜기와 성곽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좌우의 성벽이 직각을 이루는 동문을 옹성의 시원적인 형태로 파악하기도 한다. 서문은 너비 3m로 본래 여러 겹의 석벽으로 이루어진 장방형 옹성이었는데, 1985년 삭도(索道)를 설치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1996~1999년에 서문지를 발굴하여 돌계단, 문확돌, 문지기실 등을 확인했다.
1996~1999년과 2003년의 발굴을 통해 성 내부에서 많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가장 오래된 건물지는 신석기 시대의 장방형 움집이었고, 청동기 시대의 원형이나 방형 움집도 4기 발견되었다. 고구려 시대 건물지로는 대형 건물지를 비롯하여 주거지, 병영, 초소, 구덩이, 철기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금대(金代) 건물지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1호 대형 건물지는 6칸짜리 초석 건물로 전한(前漢) 대 오수전(五銖錢)과 왕망대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는데, 고구려 초기의 도성 유적으로 파악된다. 고구려 중기에 이르면 온돌을 갖춘 건물지가 대거 조영되는데, 국내성 천도 이후에도 오녀 산성의 비중이 컸음을 잘 보여준다.
산성에서는 수원(水源)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데, 오녀산은 해발 800여 m의 암반 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일 년 내내 물이 솟아나는 천연 샘[天池]이 있다. 동쪽 산기슭에도 오녀천(五女泉)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한편 산 정상부 동남단의 자연 석대(石臺)에 서면 주변 경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점장대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오녀 산성은 고구려 초기 산성으로 첫 번째 도성인 졸본(卒本) 또는 졸본성의 비상시 군사 방어성으로 비정된다. 최근에는 고구려 첫 번째 도성인 졸본을 혼강-부이강(富爾江) 합류 지점 일대로 상정한 다음, 오녀 산성을 유리왕(琉璃王)대에 천도한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990년대 후반 이래의 발굴을 통해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고구려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과 유물은 오녀 산성이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천혜의 요새지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며, 고구려 건국 과정을 규명하는 데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를 고려해볼 때, 오녀 산성은 고구려 첫 번째 도성인 졸본의 흘승골성(訖升骨城)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 중기의 유적과 유물도 많이 확인되었는데, 국내(國內) 천도 이후에도 중요하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고구려 후기 사료에 나오는 가물성(哥勿城)을 오녀 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