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 고분군

한자 迎水 古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유림진 영수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군
양식 적석묘[돌무지무덤], 봉토묘[흙무지무덤]
조성 시기/일시 고구려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2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3년
소재지 길림성 집안시 유림진 영수촌
정의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 유림진(楡林鎭) 영수촌(迎水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

개설

영수 고분군은 유수림하(楡樹林河) 일대의 고분군 가운데 하나로 본래 140여 기에 이르는 적석묘[積石墓, 돌무지무덤]와 봉토묘[封土墓, 흙무지무덤]가 분포하고 있었으나 만주국(滿洲國) 당시 압록강(鴨綠江) 중류의 댐 건설로 인해 방단 적석묘[方壇積石墓, 방형 기단 돌무지무덤] 1기만 남고 모두 수몰된 상태이다.

위치

영수 고분군은 길림성 집안시 유림진 영수촌 동북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17년 조선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40여 기의 고분을 확인하였다. 고분은 유수림자하구의 북쪽 구산(邱山)과 대산(大山)의 중간에 있는 계곡에 자리하였는데 도로 동쪽, 산기슭에 25기와 서쪽 대산의 동쪽 기슭 높은 곳에 약 115기가 분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국압록강 중류에 댐을 건설하면서 방단 적석묘 1기만 남기고 모두 수몰되었다. 이후 1962년 길림성 박물관과 1983년 집안현 문물조사대 조사에서도 방단 적석묘 1기만 확인되었다.

형태

1917년 조사 내용을 보면, 고분은 크게 적석묘과 봉토묘로 나뉘는데 적석묘는 이미 대부분 붕괴되어 있었고, 봉토묘는 모두 봉토가 유실되어 석곽의 일부가 노출되거나 파괴된 상태였다. 특히 적석묘는 대부분 붕괴되어 돌무지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평면이 좁고 긴[狹長] 장방형이 확인되고 있어 다장묘(多葬墓)로 추정된다.

의의 및 평가

영수 고분군은 고분 형식을 볼 때, 고구려 시대의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關野貞, 「平安北道及滿洲高句麗古蹟調査略報告」( 『大正6年度古蹟調査報告』, 1920)
  • 曹正榕·朱涵康, 「吉林省輯安縣楡林河流域高句麗考古調査」(『考古』1962-11, 1962)
  • 吉林省文物志 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1983)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中國地圖出版社,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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