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高地 古墳群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고분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대로진 고지촌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고분군 |
|---|---|
| 양식 | 적석묘, 봉토묘 |
| 크기 | 20,000㎡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2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0년 및 1982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3년 |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
| 소재지 | 길림성 집안시 대로진 고지촌(구 고려묘자) |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 대로진(大路鎭) 고지촌(高地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
고지 고분군은 환인(桓仁)에서 집안으로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외차구문(外岔溝門)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 고분군에 해당한다.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크지 않지만 적석묘[積石墓, 돌무지무덤]에서 봉토묘[封土墓, 흙무지무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분 유형이 확인되고 있어 초기부터 중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고지 고분군은 길림성 집안시 대로진 고지촌[구 고려묘자(高麗墓子)] 서남쪽 마을길 양측의 하곡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고지촌은 집안현성(集安縣城) 서남 75㎞의 대로향(大路鄕) 동북에 있다. 고지 고분군은 집안-환인 간 도로가 마을 앞 5㎞ 지점의 대로촌을 통과하고 있으며, 외차구하(外岔溝河)[일명 대로하]가 고지촌 북쪽 협곡을 빠져나와 마을 동쪽을 굽어 돌아 남쪽으로 향하다가 양수향(凉水鄕)을 거쳐 압록강(鴨綠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지촌은 사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고지촌에서 동쪽으로 7㎞를 가면 유림향(楡林鄕) 치안촌(治安村)에서 신개하(新開河)를 거쳐 혼강(渾江)으로 연결되며, 환인에서 집안으로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이다.
고지 고분군은 집안 내에서 비교적 큰 고구려 고분군으로 면적이 20,000㎡에 이르러 일찍부터 조사가 진행되었다. 1962년 길림성 박물관·집안현 문물보관소가 조사할 당시 145기를 확인하였다. 대다수 적석묘이고, 일부 소형의 석관묘[돌널무덤]와 봉토묘가 있었다.
1980년 및 1982년에는 집안현 문물보관소에서 다시 조사하였으며, 측량과 목록을 작성하였다. 대다수 방단 적석묘(方壇積石墓)[방형 기단의 돌무지무덤]와 적석묘가 확인되고 일부 봉토 석실묘[흙무지 돌방무덤]도 있었다. 고분은 동서로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으며, 특히 북쪽 산허리에서는 잔존 고분이 비교적 명확하게 보였다. 1962년 조사 당시 마을 동쪽에 있던 40여 기는 이미 모두 사라졌고, 서쪽으로 8㎞ 거리에 위치한 대로진 정의촌(正義村)과 남쪽의 파보(爬寶)에서도 수십에서 100여 기에 이르는 고분이 거의 훼손되었다.
1983년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조사를 실시하여 21기만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2005년 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의 조사에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으나 1980년 및 1982년 조사에서 다수를 차지한 적석묘와 방단 적석묘를 유단 적석 석광묘와 계단 적석 석광묘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1962년 조사에서는 대다수가 적석묘로 2실[두 방]과 단실[외방]로 나뉘었고, 소형 석관묘도 일부 있으며 봉토묘도 일정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분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아 한 변 길이 4~8m 정도가 대다수였으며, 가장 큰 고분이 11~13m 정도였다. 1980년 및 1982년 조사에서는 대다수 적석묘와 방단 적석묘이고 봉토 석실묘가 일부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한 변 길이 5~7m 정도였다.
1980년 및 1982년 조사 당시에 주민들에 의하면, 고분 속에서 사람뼈, 백회, 토기, 쇠칼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이후 고지 고분군은 농경지 개간과 도로 개설 등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마을 도로가 고분군을 관통하여 고분군이 동서로 나눠졌다. 잔존하는 고분의 다수는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고지 고분군이 자리한 외차구하[대로하] 연안은 집안과 환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일대에는 고지 고분군 이외에도 정의촌 고분군(正義村 古墳群)과 파보촌 고분군(爬寶村 古墳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들 고분군에는 본래 수십에서 100여 기에 이르는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따라서 외차구문 일대는 고구려인의 중요 거주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