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延邊 朝鮮族을 代表하는 劇作家 5人의 삶과 人生, 그리고 그들의 演劇 이야기(황봉룡, 최정연, 한원국, 이광수,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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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중국의 희곡사에서 ‘당대의 연극’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 ‘건국 후 17년의 연극’,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연극’, ‘새로운 역사 시기의 연극’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연극은 1966년부터 1978년까지를 가리킨다. 대약진 운동기와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연극에 해당되는 한인[조선족] 극작가의 작품으로는 다음의 것들을 들 수 있다. 황봉룡의 「장백의 아들」, 「새벽길」, 「예조리 영감」, 「광활한 천지에서」, 「차길」, 「청산은 천지에 푸르다」 등이 그것이다. 반면 최정연은 「새집 짓는 이야기」, 「완두씨」, 「귀환병」 등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귀환병」 때문에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로 몰려 1979년까지 극작 활동을 강제로 금지 당한다.
그들보다 약간 후배인 한원국은 이 시기 한층 더 공고해진 극작가적 위상을 부여받는다. 한원국은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을 대표하는 극작가들이 정치적 압력을 받아 자신의 극작 세계를 변화시켜야 할 때 극작가의 대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발표된 한원국의 두 작품은 계급적 원수를 설정하고 있으며, 그들을 비판하는 인민 대중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인민 대중이 계급적 원수를 처벌하는 과정은 당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부분이다. 한원국의 작품 성향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국의 정치적 격변과 떼어놓고 이해될 수 없다. 두 번째 시기에 생산성 향상이 강조된 것은 대약진 운동의 성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세 번째 시기에 계급투쟁의 단초가 드러난 것은 문화 대혁명의 억압적 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원극의 초기 극작 세계 역시 황봉룡이나 최정연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 깊숙이 종속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종속 관계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해제된다.
최정연은 1920년 1월 8일(음력) 조선의 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7세가 되던 해인 1937년에 일본동경으로 건너가 고학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빈부격차와 민족 차별의 사회상을 목격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학을 선택했다. 1944년 11월 중국매하구(梅河口)로 돌아온 후 일제 침략군 횡포와 토비(土匪)들의 만행, 그리고 인민대중의 참혹한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이러한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키워갔다. 결국 태항산에서 의용군으로 참전하였고, 1947년에 팔로군(八路軍) 7사에 있을 때의 생활을 소재로 단막극 「공작원」을 써서 무대에 올렸다. 1948년에는 한 쌍의 농민부부가 지주집 머슴으로 학대받다가 민주 연군이 오는 날 해방을 맞는 「민주련군이 오는 날」을, 1949년에는 혁명을 끝까지 하자는 주제로 이성간의 사랑을 다룬 4막 7장의 「광영패」를 써서 인기를 얻었다. 이후에 많은 작품들을 쓰다가 반우파 투쟁을 위시한 정치 투쟁의 일환으로 창작 활동을 금지 당했다. 장막극 「해토무렵」과 장막비극 「옥녀동」 등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 문학계와 연극계에 복귀하였다.
최정연의 희곡은 변화하는 중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최정연은 자신이 살아야 했던 동시대에서 변화하는 중국의 사회와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 희곡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중국의 사회상과 함께 고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정연이 바라본 사회상 가운데 6·25 전쟁과 관련된 것도 있다. 1950년 6.25 전쟁은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미 6.25 전쟁에 관여한 바 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는 크게 동요하게 된다. 「귀환병」은 당시 6·25 전쟁과 한인[조선족] 사회의 변화를 한 남녀의 뒤얽힌 운명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생산성과 경제 정책에 대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소 이질적이나, 최정연이 가지고 있던 현실 인식이 충실하게 반영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해토무렵」은 생산제도의 공유화의 측면에서 「새집 짓는 이야기」와 강조점을 달리한 작품이다. 농업개조 운동은 호조조 운동→초급농업합작사→고급농업합작사→인민공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토지·생산의 공유화 현상은 결국 경제 난국을 불러왔고, 개혁·개방 노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해토무렵」은 개혁·개방주의 경제 정책의 상징적인 시발점인 3중 전회 무렵을 주목했다.
「해토무렵」의 강철우는 이러한 전환과 변화의 선두에 선 지도자이다. 특히 계획체제와 공유제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 그는 공유림을 매각해 마을의 경제[농업 경제]를 회생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식량의 고른 분배 체제를 거부하고 이익 창출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집체경제를 거부하고 개체경제 시스템을 따르기 마련이다. 박서기와 같은 인물은 강철우의 정책을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근접한 것으로 우려할 정도이다.
최정연은 격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주인공들의 강한 신념에 대해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새집 짓는 이야기」의 시룡이나, 「해토무렵」의 강철우는 마을의 리더로서 그들이 꿈꾸는 농업 생산 증강을 위해서 면밀한 계획과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최정연이 제도의 문제와 개혁의 필요성을 다루는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논한 것은 정치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개혁을 이끌 지도자의 자질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정연의 희곡은 장점과 함께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최정연의 희곡은 급속하게 변화하는 중국의 농업 생산 체제와 경제 제도,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정치경제적 흐름을 고찰하고 그 성과와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의의가 있지만, 그 해결책은 다소 일방적이고 단순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양상은 해당 문제 전반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을 대표하는 극작가인 황봉룡은 1946년 8월 학생의 신분으로 처녀작 「광명」을 발표한 이래, 80여 편에 이르는 희곡을 창작했고, 다수의 시나리오와 텔레비전 드라마 대본을 집필한 바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1950~1960년대에 발표되었으며,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그가 1959년에 발표된 「장백의 아들」은 흔히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연극사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1959년 중국 건국 10주년 기념작으로 발표되어 70여 차례나 공연되었으며, 총 384차례에 이르는 공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대중성을 지닌 작품이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이념적 목표에도 부합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봉룡은 1925년 11월 길림성(吉林省) 안도현(安圖縣) 차조구에서 태어났으며,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장백의 아들」의 시간적 배경인 1936년은 황봉룡이 점원 생활을 할 무렵에 해당된다. 황봉룡은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천인당 약방’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작품 내에 도입하였고, 이러한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항일 연군의 활약상을 중심 소재로 취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1930년대 항일 연군 중에서 조선인의 참여가 많았던 동북 항일 연군 2군이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서사적 배경으로 인해 당시 동북 항일 연군의 거두였던 왕정위를 주요 인물로 그리게 된다. 「장백의 아들」에서 왕정위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인내하는 견인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또한 부하들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수행하는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다. 자신이 상처를 입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자상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또 한 명의 인물은 정봉녀이다. 정봉녀는 박철에게 포섭된 인물로, 본래는 우매한 민중 세력이었지만 항일 투쟁의 당위성을 자각하고 박철의 저항운동에 동참하는 동지이자 투사로 전환한 경우를 보여준다. 이러한 포섭과 전환 과정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 확장,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 혁명 전략에 대응된다고 하겠다.
「장백의 아들」은 틀림없이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연극사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그것은 미학적·형식적·수용 미학적 입장에서 그러하며, 이 작품이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1930년대 상황이나 이 작품이 발표되는 1960년 무렵의 상황으로 판단할 때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긍정적인 역사 인식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다. 1930년대 중국 동북 지역의 전황과 권력 투쟁 그리고 항일 전쟁의 역사가 직간접적으로 이 작품의 기조로 활용되고 있고, 그 양상이 주요 사건으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문학 사회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문학의 역사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례라 할 것이다.
반면 그 이면에는 국가를 상실한 민족의 입장에서 1930년대 강대국 중국과 일본 틈바구니에서 투쟁해야 했던 한인의 역사적 상처와 1949년 이후 중국과 공산당의 주도 하에 소수민족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한인[조선족]의 생존 전략이 묻어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역사에서 승리자의 편에 섰지만 스스로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을 문학[연극]의 굴절된 반영으로 이해해야 했던 소수자의 비애가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장백의 아들」을 중심으로 한 장막극과 초기 작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단막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봉룡 단막극의 대표작에 속하는 「새벽길」과 「예조리 영감」에 나오는 ‘혁명적 이상’을 꿈꾸는 인물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시대착오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새벽길」의 동훈이나 「예조리 영감」의 조영감은 집체 경제 체제와 생산 수단의 공유화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있다. 이미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경험한 바 있고, 실제로 모택동이 정치 일선에서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우상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황봉룡은 중심 인물이 일방적으로 교조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황봉룡은 자유롭게 인간의 본성을 펼치고 사적인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반교조적인 인물을 배치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단막극은 경직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가장 시대착오적인 작가 의식을 대입했던 「예조리 영감」은 가장 현실적인 안타고니스트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황봉룡 단막극 창작의 중요한 비밀이 아닐 수 없다.
황봉룡의 「괴상한 약력표」는 특이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장르상으로는 희곡 작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영화 미학과 시나리오 문법에서 영화의 세례를 받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인 희곡 세계를 고수하던 황봉룡도 한인[조선족] 문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연극에서 영화로 관심이 이동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더구나 황봉룡이나 최정연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희곡 창작과 시나리오 창작을 별개의 작업으로 여기지 않았다. 최정연은 자신의 희곡 「해토무렵」을 시나리오 작품인 「첫봄」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김운일은 1980년 무렵 영화에 대한 관심이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에서 고조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최정연의 연극 작품 「해토무렵」이 영화 시나리오로 개작되어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30돌 경축을 위하여 장춘영화소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이 시기가 1982년인데, 이 해에는 김훈이 창작한 텔레비전극 「어머니 시름 놓으세요」의 녹화 제작이 있었으며, 진정자와 허창석 등의 배우들이 영화 「첨녀」 촬영에 참가하였다. 조선족 연변 연극단의 대표적인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허동활도 1985년 텔레비전극 「낳은 정 키운 정」을 연출하였고, 1986년에도 텔레비전극 「민들레꽃」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 무렵부터 거세지기 시작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연변연극단은 이러한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가 결국 1980년 후반기에 침체라는 늪에 빠지고 만다. 황봉룡이 「괴상한 약력표」에서 영화적 기법을 선보이는 시점은 연변 연극단을 중심으로 연극과 희곡에 가해지던 관심과 주목이 점차 퇴조하고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관심과 주목이 증폭되던 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연변 연극단이 침체를 거듭하면서 지금은 대단히 약화된 형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변화 때문이었다.
연변 연극의 쇠퇴 징후가 뚜렷하던 1985년 무렵에 이광수의 이 작품은 대내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관중 동원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변화하는 한인[조선족] 사회의 특성을 잘 포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형식적으로 이전의 작품과 다른 특성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은 영화의 평행 구조를 상당히 유연하게 차용했다. 두 연인들에게 벌어지는 동시적 사건은 같은 무대 위에서 서로 다른 플롯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수법은 선조적인 사건 전개와 종래의 사실주의 양식[기법]에 길들여져 있던 한인[조선족]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음이 틀림없다.
이광수가 다시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은 형식적 특이함과 신선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침체하는 연극의 이유가 실제로는 형식적 진부함, 과거 기법의 답습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철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황봉룡의 「괴상한 약력표」 역시 이러한 선구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영화적 기법이 남다른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도 「괴상한 약력표」가 지닌 문제 의식과 이에 대처하는 형식적 모색 때문이다.
이광수는 대중극 작가로 정리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대중극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선악의 기준을 명확하게 따르고 있다. 선한 인간들은 사소한 오해로 서로 티격태격하고, 악한 인물들은 이유 없이 선한 인물들을 괴롭힌다. 선한 인물들은 사소한 오해를 곧 해결하고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하며, 악한 인물들은 처벌받던가 아니면 잘못을 회계하여 선한 인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관객들은 복잡한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인물보다는 선인과 악인 중에 전형적인 성격을 구사하는 인물을 단순하게 수용하는 일에 익숙하다. 또한 이러한 인물을 통해 구현되는 권선징악적 결말에 익숙해 있다. 한 인물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연극의 결말에서 그 의지가 달성 가능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관객들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이 일반적인 대중극의 종결 방식이다. 그런 측면에서 「요란한 사랑」의 란나와 「취한 밤」의 춘희는 비극성을 담보한 인물이며,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인물만 대중극적 인물에서 벗어나 있다.
주제는 대중적인 선동에 가까운 계몽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대중에 대한 교화를 달성하려 하고, 이러한 의식은 문제의 본질을 추상화하고 낙관화하는 폐해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의 희곡은 관객들에게 오락과 의미를 제공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내재해 있고, 그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예술적 답안도 나름대로 궁리되고 있다. 계층 간의 불화라는 사회문제를 탐색하며 도시와 농촌의 시각에서 나름대로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던가 혹은 재래의 성 관념이 변화하며 새로운 결혼관이 등장하고 있는 현 세태의 모습을 희곡 속에 도입하여 그 실상을 구현하려 한 점이 그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동형 구조나 음악과 춤의 삽입 등을 통해 극적 재미를 북돋우려 한 공로가 인정된다. 대사를 구사하는 솜씨 또한 다채로워 관객들의 주목을 받을 만하다. 그는 이러한 공연 방식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은 대중극을 선보일 수 있다. 특히 지루하지 않게 문제의식을 전파시킨다는 점이 그의 희곡이 가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극작은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은 대중극의 세계를 열었다고 정의할 수 있겠다.
한원국은 1936년 음력 4월 10일 중국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양병구 안개골에서 출생했다. 한원국의 고향 안도현은 백두산 인근 마을이다. 그래서 그의 대표작 「백산의 봄우레」를 보면, 백두산의 지형지물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한원국의 부인 김향란의 증언에 따르면, 한원국은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시골 농부[소작인]였으며, 그의 가계 역시 교육과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나타난 「붉은 마음」은 어릴 적 자신의 가계가 투영된 작품이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의 교육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한원국은 대단히 총명한 학생이었다. 그는 1942년 서당에 나가 언문과 천자문을 배웠고, 1946년 안도현 명월구완전 소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하였다. 1948년에는 안도현가평촌 소학교 5학년 때 월반하여 안도현립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한원국이 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1950년이고, 이듬해인 1951년에 연변 중등 사범에 입학하였다. 1953년 그는 연변 중등 사범을 졸업하면서 대학에 추천을 받았으나 지병[고혈압]으로 인해 합격하지 못하고, 연변 왕청 4중 조선 어문 교원으로 출강해야 했다. 하지만 1956년 그는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 전업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문학 창작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다재다능한 작가였다. 그가 처음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55년이었다. 그는 『연변 문예』에 시 「10월의 불길」이 당선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1956년에는 영화평론 「집체를 사랑하는 소년들」을 신문에 발표하며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대학시절 틈틈이 희곡을 써서 동료 학생들과 공연하기도 했고,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62년에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이후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의 길을 병행해 나갔다.
그가 극작가로 데뷔한 것은 1959년이다. 그는 이 해에 단막극 「바위」를 발표하고 이어서 장막극 「붉은 마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극작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1959년부터 1975년 「기대봉의 수리개」를 발표할 때까지를 한원국 극작 세계를 초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 작품 세계는 대약진 운동, 반우파 투쟁 그리고 문화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정치적 격변과 관련이 깊다. 한원국은 정치적으로 험난했던 시기를 통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문화 대혁명이 끝나는 시점인 1976년 이후에야 정치적 강박에서 벗어나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는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는 1966년 무렵부터 잠시 절필했다. 극작뿐만 아니라 일체의 문학창작에서 손을 뗀 채 1971년까지 지내다가, 1972년에 「백산의 봄우레」를 발표한 것이다. 「백산의 봄우레」는 여러 측면에서 문화 대혁명 시절, 어렵고 참담했던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자타에 의해 공인되고 있다. 정리하자면, 「백산의 봄우레」는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고 초기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등소평에 의한 개혁개방 정책 이후를 ‘개체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러한 대내외적 정책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한원국의 창작 성향도 1978년을 기점으로 변화한다. 그는 1978년 대화극 「배꽃이 필 때」를 발표했다[추후 「배꽃이 필 때 더욱 그립습니다」로 제명 변경]. 한원국의 후기 작품 세계로 접어들면, 크게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첫째는 소재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이다. 한원국의 희곡 작품에 이용되는 소재가 다변화되는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소재상의 변화는 주제상의 변화와 직결된다. 둘째는 인물(성격) 측면에서의 변화이다.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 캐릭터의 개성과 위상이 강화되었고, 이에 따라 초기 희곡에서는 주로 영웅상으로 그려졌던 남성 캐릭터의 위상과 역할이 달라졌다. 셋째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이다. 한원국은 메타드라마, 영화 등에서 기법을 도용하여 기존의 리얼리즘으로 일관하던 자신의 공연 미학에 변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강화된 막간 기능과 교차 편집의 적용, 그리고 극중극의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후기 작품 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연애 담론이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전기와 후기로 분할할 때 가장 대별되는 특징은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의 초기 극작 세계에서 작가의 관심은 당의 정책과 정치적 선동에 있었다. 이것은 공산당 일당 체제 하에서 다른 극작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막상 문화 대혁명이 종결되고 난 이후에 연애와 결혼 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원국은 1984년 이후 연애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하는데, 「씨암탉」은 그 단초가 되는 작품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 발표되는 작품 중 「9번 새각시」(1984), 「그 총각과 택시 아가씨」(1987), 「처녀들 영원히」(1988)가 남녀 간의 연애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1990년대에 근접하면서 발표되는 「무도장 사랑가」(1989), 「돈=X」(1996) 역시 남녀 간의 연애 문제와 변화하는 성 풍속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하지만 앞의 작품군과 뒤의 작품군은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연애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발현된다. 앞의 작품군에서 한원국은 연애를 해프닝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전자의 세 작품은 남녀 간의 티격태격하는 연애 문제를 보여주는 일종의 희극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작품들이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사회에 만연한 학벌과 직업에 대한 경시 풍조(「그 총각과 택시 아가씨」)나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녀 평등 체제로 변모해야 한다는 여성 의식(「9번 새각시」) 혹은 배금 사상의 허식과 폐해에 대한 경계심(「처녀들 영원히」)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 이 작품들은 가벼운 희극적 터치로 남녀 간의 연애 풍속도를 그려내는 일에 집중한 작품들이다.
반면 후자의 작품군은 변화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그리고자 한 작가의 의지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무도장 사랑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인기를 끌었던 무도장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그 무도장을 출입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은 무도장에서 자신의 짝을 찾아 춤을 추고 연애를 한다. 한원국은 실제로 무도장을 즐겨 찾았다고 하는데, 그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발언도 이 작품 내에 숨겨져 있다.
한원국의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작으로 할 수 있는 「돈=X」 역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경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김화는 코리안 드림의 피해자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폐해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자, 중국 내에 있던 한인[조선족]은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에 있었다면 좀처럼 벌기 힘들었던 거액의 돈을 벌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소문은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른바 한국에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이 확산된 것이다.
작품 속에서 김화의 어머니도 이러한 코리안 드림의 대열에 참가한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미옥은 자식들만 남겨두고 한국으로 떠난다. 어머니가 떠나자, 김화는 감당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된다.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빚을 갚기 위해서 어두운 밤의 세계로 끌려들어가 매춘부로 전락한다. 한원국은 김화라는 여성이 타락하고 피폐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병들어 붕괴되고 있는 한인[조선족] 사회를 비판하고 그 어두운 일면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문화 대혁명 시기를 지나면서 한원국의 희곡은 내용과 형식, 주제와 표현의 측면에서 크게 변모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리얼리즘 연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 하에서 이루어지는 극작술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변화는 전략적 변화라 할 수 있다. 그의 희곡이 문화 대혁명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욕망을 다루는 데에 집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근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개인의 욕망과 결부지어 설명하려 한 점은, 그의 작가 의식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희곡 혹은 연극적 자산이 풍부하지 못했다. 그들의 문학은 주로 시와 소설에 집중되었고, 현재에도 이러한 성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일련의 극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연변에서의 연극과 희곡의 수준은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나아가서는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장르 역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황봉룡과 최정연은 그 시작점을 알리는 작가이다. 그들은 극작만을 전담하지는 않았지만, 극작을 통해 희곡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렸다. 그 다음 세대의 작가가 한원국과 김훈 그리고 이광수이다. 이들은 선배 세대가 쌓아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희곡 장르에 도전했다. 한원국의 문제의식과, 이광수의 재기발랄함, 그리고 김훈의 다재다능함은 전대의 성과를 숙성시키는 역할을 했다.
2010년대 연변의 희곡과 연극은 쇠퇴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약은 극문학의 명맥을 보존하고 새로운 극문학의 창달에 이바지하고 있다. 가령 이광수나 김훈이 텔레비전 드라마 분야에서 새운 업적은 상당한 것이다. 또한 영화 분야에서도 이러한 전임 극작가들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거론하지 않았지만, 장률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연변의 극문학은 황봉룡과 최정연에 의해 기반이 놓였으며, 한원국에 의해 승계되었고, 김훈과 이광수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의 세대인 장률에 의해 영화 분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출발점이자 계승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희곡 작가 5인의 공적은 크게 상찬될만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