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오르고 내리는 굽이마다 깊게 배어 있는 流浪民의 한숨 고개, 文學 作品 속 오랑캐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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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0년대 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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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1년 |
| 조선족 마을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고개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바위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오랑캐령은 민간에서 불리는 이름이고, 실제 지명은 ‘오봉령’이다. 다섯 봉우리가 중첩되어 있다고 해서 오봉령으로 불렸고, 지도상에는 ‘해관령’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삼합’과 ‘달라이라즈’ 사이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는데, 본래는 더 넓은 의미인 ‘남강 산맥’ 혹은 ‘덕신령과 삼합령’을 동시에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삼합령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축소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랑캐령은 ‘천불지산’ 주봉 동북쪽 한 자락에 위치한다. 1915년에 오랑캐령에 해관을 세우면서 ‘해관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회령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은 오랑캐령에 올라 ‘을미대’에 이르는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용정으로 들어오는 루트를 택해야 했다. 그래서 오랑캐령이 위치한 ‘천불지산’은 ‘조선 민족이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 온 이주 역사의 발자취와 고난의 개척사를 새긴 산’으로 평가된다.
오랑캐령은 북한 지역과 간도[연변]를 잇는 관문으로, 북간도로 향하는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오랑캐령의 ‘오랑캐’는 북간도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만주족[북적]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임원춘의 『오랑캐령』에서는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왜놈]’을 지칭하는 의미까지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선바위 옆으로 난 길을 오르면, 가파른 주봉에 오를 수 있다. 그 주봉 위에는 평탄한 평지가 있는데, 그 평지에서 오른쪽을 멀리 바라보면 오랑캐령이 눈에 들어온다. 오랑캐령은 한민족의 비원을 간직한 고개이다.
정든 땅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일구어야 했던 사람들은 오랑캐령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그 고개를 넘어야 했다. 하지만 고개를 넘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와야 했고, 그 고개 근처에서 살아야 했다. 어쩌면 평생을 이 고개가 주는 고난과 도움을 곱씹으며 주위를 맴돌아야 했다.
선바위에서 바라보면 또 하나의 정신의 안식처가 눈에 들어온다. 윤동주의 명동촌으로 지사 김약연이 명동 서숙을 만들면서 조성한 조선인의 교육 공간이다 1901년 4월에 김약연은 중국인 토호 동한(董閑)에게 토지 5만 평을 사들여 학전(學田)으로 삼았고, 이 토지를 장학 재원으로 삼아 사설 교육기관 규암재(圭巖齋)를 창설했다. 이후 규암재는 명동 서숙으로 거듭났고, 명동 서숙이 생겨나면서 명동촌은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공간에서 윤동주가 성장했고, 그의 사촌 송몽규가 광복의 꿈을 키웠으며, 문익환 목사와 김정우 시인이 자라났다. 김정우는 자신들이 살았던 명동촌의 주변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명동촌의 자연 풍경을 설명해야겠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북으로 완만한 호선형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둘러있고 그 서북단에는 선바위란 삼형제 바위들이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서북풍을 막아주고 있다. 그 바윗돌 뒤에는 우리 조상들의 싸움터로 여겨지는 산성이 있고 화살 같은 유물들이 가끔 발견되곤 했다. 이 삼형제 바위는 명동 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동쪽에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살바위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갔다.
김정우의 묘사 속에서 멀리 오랑캐령이, 가깝게는 선바위가, 그 사이에 명동촌이 위치하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선바위는 마을에 몰아치는 서북풍을 막는 방패이면서, 명동 사람들이 모여드는 원점이었다. 멀리 있는 오랑캐령도 명동촌에 자리잡은 이들에게는 바람을 막고 외적을 막고 온기를 보호하고 정기를 모으는 병풍 같은 방어선이었다.
선바위와 오랑캐령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는 고개였지만, 동시에 그들이 마음을 붙이고 의지할 곳이기도 했다. 선바위는 명동촌[명동 서숙이 건립되고 난 이후 지명] 사람들에게 놀이터이자 휴식 공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선바위에 소풍을 갔고, 선바위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멀리 오랑캐령을 바라보면 자신들이 온 곳과, 가야 할 곳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러한 오랑캐령은 그들에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오랑캐령은 한국인의 문학 속에도 그 자취를 깊게 남긴 바 있다.
한국인들이 용정에 도착하면 반드시 보고 싶어 하는 곳이 있다. 이들은 해란강, 일송정, 용두레 우물, 대성 중학교, 그리고 명동촌. 이곳들은 모두 어려운 시절 한국인의 자취가 스며있는 장소인데, 그 중에서도 대성 중학교와 명동촌은 윤동주라는 인물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한국인이라면 그의 시를 읽고 외우고 되뇌면서, 순결한 내면을 한번쯤 그리워했을 것이다. 용정은 조선의 시인 윤동주가 걷고 머물고 사색하고 때로는 가슴 아파했던 공간이자 길이었고 또 집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남다르게 느껴진다.
현재 명동촌은 오붓하게 복원된 몇 개의 건물과, 윤동주가 달게 마셨다는 우물, 그리고 빼어난 주변 경관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적인 관광지나 유서 깊은 건물이 상존하지 않음에도, 그곳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윤동주의 시심(詩心)과 맑은 영혼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다. 과거에는 한국인이 주를 이루었지만, 요새는 일본인과 중국인도 간혹 보인다. 이제 윤동주는 국적마저 넘어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이웃나라에도 그 맑은 영혼을 전하는 듯하다.
몇 차례 방문한 사람도 윤동주의 마을 명동촌을 찾아나서는 길은 조금씩 설레기 마련이다. 먼 길을 가면서 그의 시를 반추하기도 하고, 그의 삶을 되짚어보기도 하면서, 마치 길을 따라 과거로 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유년의 명동촌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쓰고자 했을까? 어떠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토록 아름답고 청초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멀리 명동촌이 보이고, 그 어림쯤에서 또 하나의 선바위라는 유적을 만난다. 지금은 승합차가 들어가는 반듯하게 닦인 길이지만, 과거에는 많은 이들이 걸어서 등짐을 지고 험난하게 오르고 내렸을 고개였다는 지점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있다. 마치 벼린 칼날처럼 도로의 윗부분을 향해 불쑥 일어난 형상의 바위다.
선바위가 위치한 곳은 용정에서 육도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이다. 약 15㎞ 지점에 도달하면, 땅에서 칼날이 솟아오른 것 같은 바위 지형을 만나게 된다.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내려서 사진을 찍곤 하는데, 요즘도 종종 명동촌 가는 길에서 목격되는 풍경이다. 신인(神人)이 썼을 법한 장검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바위를 지켜보며, 땅 속 깊이 묻혀 있을 손잡이를 잡고 그 벼린 날을 뽑아 그 웅대한 자태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본래 선바위는 세 개의 바위를 통칭하는 조선식 이름이다.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기 전에는 중국인 지주가 살았는데, 그때의 이름은 ‘부걸라재’였다. ‘부걸라재’는 선바위 근처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는데, 비둘기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었다.
선바위에는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과거 이곳에는 아름다운 처녀 셋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장마철이 되면 피해를 입히는 오랑캐령 괴물을 위해 이 처녀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처녀들의 연인들은 모두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을에서는 그녀들을 구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처녀들의 다급한 처지는 멀리 있는 연인들을 불러 모은다. 한날한시에 처녀들의 위급을 암시하는 꿈을 꾼 청년들은 선바위 마을로 모여들고, 마을로 향하던 길에서 구렁이에게 봉변을 당하는 까치를 구해준다. 까치는 산신령의 외손자였기에, 산신령은 청년들에게 감사하며 괴물과 싸울 수 있는 무기[장검]를 선물한다.
청년들은 처녀들을 구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불사신에 가까운 괴물과 한 판 전투를 치른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은 아무리 머리를 잘라도 살아나곤 했다. 힘들게 머리 8개를 잘라 다시 붙을 수 없게 만들려고 했지만, 용왕의 방해로 아홉 개의 머리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청년들은 지쳐갔고, 결국에는 강물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리고 세 개의 바위가 되었는데, 뒤따라오던 머리 아홉 개의 괴물은 세 바위에 막혀 그만 이러 저리 흩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세 바위는 원래 존재했다는 선바위의 형상을, 괴물은 그 사이를 흐르면서 포말을 일으켰을 물의 형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아무리 육도하로 흐르는 작은 시내라고 해도 우뚝 솟은 세 바위[삼형제 바위] 앞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어, 머리가 갈라지고 부서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을 그 옛날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 선바위도 일부만 남았다. 문화 대혁명 시절 제방을 쌓는 돌로 사용한다며, 다이나마이트로 주변 봉우리를 폭파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더 웅장한 선바위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옛날 오랑캐령으로 향하던 힘겨운 발걸음을 더욱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작품 속 ‘오랑캐령’과 그 의미〕
임원춘의 장편소설 『오랑캐령』의 도입은 오랑캐령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눈 쌓인 오랑캐령은 춥고 험난하고 황량한 공간[관문]으로 설정된다.
오르며 20리 내리며 20리, 20리 길을 동강내며 한숨과 한탄으로 부풀어오른 오랑캐령, 헐벗고 굶주긴 겨레들의 굽 빠진 초신짝과 동강난 나막신으로 높아만 지는 오랑캐령, 오랑캐 같은 리별의 고개, 원한의 고개, 한숨의 고개였다.
“윙― 윙―”
하늬바람에 수림이 울고 나무들이 태질하면서 눈기둥을 하늘공중에 말아올렸다. 그러면 깎아지른 벼랑들이 갈범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 우에 썼던 눈더미를 털어버린다.
“쾅― 쏴―”
아아한 낭떠러지에서 쏟아지는 눈사태는 천길폭포마냥 하얀 꼬리를 끌면서 눈뿌리 아찔한 골짜기에 머리를 박는다.
오랑캐령은 한국 문학 작품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다. 최서해의 『탈출기』에서 ‘나’는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서’야 만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의 오랑캐령도 눈 덮인 엄동의 고개였다. 이기영의 『두만강』에서는 오봉산으로 지칭되는 오랑캐령이 등장하고 있다. 이때의 오랑캐령은 양지의 명동촌을 바라보는 봄의 고개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작가들도 이 오랑캐령을 종종 묘사했다. 대표적인 작가가 임원춘인데, 그는 『오랑캐령』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인 『분투의 발자욱』에서도 이 고개를 묘사한 바 있다.
조선 후기 봉금령이 발효되던 시절에는 만주족의 시야를 피해 몰래 넘어야 했던 고개이고,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 점령한 시절에는 그들의 착취를 피해 다녀야 했던 고개이다. 그래서 이 고개는 한국 문학 작품에서 수난의 고개로 묘사되고 있다. 임원춘 역시 ‘이별’과 ‘원한’과 ‘한숨’의 고개로 정의하고 있다. 임원춘은 이 작품의 제명을 ‘오랑캐령’으로 짓고, 도입부에 묘사한 이유를 다음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땅을 밟(으려)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통로가 오랑캐령이예요. 회령에서 용정[연길]으로 들어서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 길이가 오르면서 20리, 내리면서 20리에 이르는 길인데, 인가가 없는 길입니다. 옛날에는 오솔길이고 마찻길이었습니다. 그런 령에 주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주막을) 보지는 못했고 듣기만 한 이야기인데, 제 작품 속에서 이 주막을 살려내어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이러한 회고를 통해, 임원춘 역시 오랑캐령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주목하고 있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언젠가 풍문으로 들었던 오랑캐령의 주막을 작품에 끌어들여 주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억쇠는 힘겹게 오랑캐령으로 넘다가, 산등성이에서 곤경에 처한 이쁜이와 그의 부친을 구해내고 인연을 맺는다.
이 장소가 임원춘이 말한 ‘주막’인데, 이곳에서 ‘옥별’을 만나 훗날을 도모하는 인연까지 덧붙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랑캐령에서 억쇠는 위경에 처하게 되고, 그 위경을 리덕삼이 구하면서, 두 사람은 의형제가 된다. 리덕삼이 억쇠를 구해 도달한 곳은 쇠돌골[오랑캐령의 기슭]로 여기에서 억쇠와 리덕삼 일행은 리광식의 집에서 묵게 된다. 훗날 광식은 옥별과 이쁜이를 구하게 되고, 억쇠와 광식은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는 동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