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함경도 문화의 보고, 두만강변의 동제

한자 咸鏡道 文化의 寶庫, 豆滿江邊 의 洞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0여 년 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4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정의

두만강변에 거주하는 함경도 출신 한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동제 이야기.

충분한 조사가 필요한 한인 동제

동제(洞祭)는 한민족의 마을 공동체 신앙 형태로서 그동안 한인 동제에 대한 기본적인 현황 조사나 연구조차도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다. 다만 몇 가지의 문헌에서 동제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접할 수 있는 정도이다.

국립 민속 박물관에서 간행한 『중국 길림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의 ‘종교와 신앙 생활 편’에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과 장재촌 인근의 마을에서 동제를 지냈다는 내용과 장재촌 일대의 여러 마을에 국시당[국사당]이 있었고 장재촌 부근의 선바위가 부군 칠성으로 인근 주민들에게 숭배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요령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에서는 와니전자촌우가촌의 임공당제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국내에서 발간된 자료는 단기간의 마을 조사로 내용이 소략하고 폭넓은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다양한 한인 동제의 실태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중국에서 발간된 책들도 동제에 대한 개략적인 서술을 지향하고 있어 현지 실태에 대한 내용은 소략하여 한인 동제에 대한 기초 자료를 얻거나 전모를 이해하기에는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다.

필자는 2013년 두만강변의 수구촌, 북흥촌, 청명촌 3개 한인[조선족] 마을에서 행해지는 동제의 흔적을 만났다.

도문시 월청진 수구촌의 산천 위하기

수구촌은 도문시에서 삼합 가는 방향으로 두만강변의 도로를 따라 4㎞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패촌에서 우회전하여 1㎞ 정도 들어가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수구촌은 130여 년 전에 생긴 마을로 황간 전씨들이 많이 산다. 2013년 현재 마을에는 황간 전씨가 13여 호이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합쳐서 80여 호이다. 과거에 인구가 많았을 때는 90여 호 되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함경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근래 이촌 향도로 마을에 빈집이 생기면서 한족 세 가구가 들어와서 세를 살고 있다. 이들 한족들은 함경도식 집에서 참외, 옥수수 등을 경작하며 살고 있다.

마을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주민들의 단결력도 강하다. 촌장이 앞장서서 다른 마을보다 일찍 주택을 신축하고 마을길도 포장했다. 또한 마을 내 공원을 조성하고 체육 시설도 확충했다.

제보자 전경석은 1936년생으로 현재 78세이다. 그는 황간 전씨로 선친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13세 때 함경북도 온성 제천리에서 인근에 있는 마패촌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수구촌 일대는 숲이었으나 증조부는 마패촌에서 3년을 살다가 이곳을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주택을 지었다. 제보자는 이 시기를 고려하여 마을이 130여 년 전에 생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아무도 거주하지 않던 이곳을 증조부가 개척하여 마을에서 좋은 땅은 증조부가 차지할 수 있었다. 제보자의 증조부가 정착한 후 점차 한두 호씩 늘어나면서 마을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경석은 과거 동제를 지낼 때 따라다니면서 심부름을 했다. 그는 당시 유년기였지만 동제에 대해 상당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제의 명칭은 특별한 것이 없으며, “산천을 위한다”고 하였다. 제당은 현재 마을 옆 산비탈에 있는 6·25 전쟁 관련 열사비가 있는 자리이고, 이곳에는 자작나무가 있었다. 과거 아랫마을에서는 이곳에서 제를 지냈으며, 윗마을에서는 웃산[윗산]에서 지냈다.

수구촌 태생의 전경석의 부인[78세, 문화 류씨]은 1954년에 소학교 6학년이었는데, 제당 앞을 지나 소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당시 제 지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제를 지낸 후 음복을 할 때 참석하였기 때문에 제를 지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에 의하면 당시에는 노인들이 제를 지내고 아이들은 음복할 때 참석하였다고 한다.

제사는 봄철에는 사월 초파일 정오에 지냈다. 제사의 주요 직책은 도감, 좌상, 축관 등이다. 도감은 매년 선출을 하였으며 제를 지낼 때 초헌관을 한다. 좌상은 마을 어른 중 연장자가 맡았으며 축관은 학식이 있는 분이 하였다.

제물로는 진지[메]를 올리고 돼지를 한 마리 잡았다. 진지는 조를 섞은 노란 찰밥을 지었는데, 가정마다 나눠 가져갔기 때문에 가구 수만큼이나 많았다. 술과 돼지 고기를 찍어 먹기 위한 소금을 올렸다. 떡, 국, 과일, 전, 반찬 등은 올리지 않았다. 술은 집에서 빚은 것으로 사용했다. 윗마을의 동제 방식도 아랫마을과 동일했는데, 그곳에서도 돼지를 한 마리 잡았다. 동제 기간에 금줄을 치거나 황토를 뿌리지는 않았다. 동제를 지내는 순서는 제물 진설 후 좌상이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호명하고 분향, 술 따르기, 축문 읽기, 절하기, 음복 순으로 이어진다. 음복 후 남은 음식은 가가호호 골고루 나누어진다. 제의는 유교식 제례 방식과 비슷한 고사 형식이며, 소지 종이를 올리지 않는다.

수구촌은 전경석의 증조부가 마을을 개척하던 130여 년 전부터 함경북도 온성의 풍속에 따라 산을 위하는 동제를 지내왔다. 1954년만 하더라도 동제가 전승되었으나, 문화 대혁명 전인 대약진 운동 무렵부터 지내지 않았다. 전경석은 과거 인근 마을에서도 대부분 동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10여 호 되는 작은 마을에서는 돼지를 잡을 만한 비용은 감당하기 힘들어 닭을 잡아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산신제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은 한 때 100여 호가 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40여 호로 대폭 줄었다. 현재 주민들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하고 있으며, 그 비율은 반반씩이다. 밭농사로는 과거에 콩, 조, 옥수수를 지었으나 지금은 옥수수 위주로 한다.

주민 대부분은 함경도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과거에 남쪽[남한]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함경도 사람들과 맞지 않아 타지로 떠났다고 한다. 남쪽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한 일은 수전 개척이다.

과거 이 마을은 두만강 옆에 있는 버드나무 숲이었으며 당시 중국인들은 수전을 몰랐다. 함경도 사람들도 논농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벼농사 경험이 풍부한 남쪽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논을 일구어 벼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동네가 정확히 언제 생성되었는지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므로 조선 후기에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집체화(集體化) 시기에는 노동생산성이 낮아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낮았으나, 1983년 개혁개방과 더불어 개인 농사가 시작되면서 소득 수준이 올라갔다. 주민들은 대부분 한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상당수 젊은이들이 한국에 나가 있다.

현재 동제는 마을 안에 있는 당산나무에서 지낸다. 이 나무는 100여 년이 넘었으며 주민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같은 수종의 나무가 주변에 많이 있었는데 집체[공동 경작] 때 공사를 하면서 베어내어 지금은 이 나무만 남았다고 한다. 제당을 주민들은 ‘산신당’이라고 부르며 신목은 ‘당나무’ 라고 한다. 주민들에게 당나무는 신령스럽고 두려운 존재이다. 당나무를 건드리면 사고가 날까 두려워서 가지치기도 하지 않고 있다.

마을 주민 전창균[1935년생]은 6살 때 부친을 따라 북한회령에서 왔다. 그의 조부가 먼저 중국에 온 후에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전창균이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현지인도 다섯 가구 있었다. 중국인들이 있을 때 한인은 따로 동제를 지냈다. 현지 중국인들은 제를 지낸 후 음식을 그대로 두고 가기 때문에 한인 아이들이 가서 주어먹기도 했다. 제를 지내는 방식은 한인과 중국인이 비슷했다. 현지 중국인들에게도 당나무는 신령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한인들은 과거 정월과 7월 정일(丁日) 두 차례씩 제를 지냈다. 동제 음식으로는 돼지머리, 순대를 올리고 제를 지낸 후에는 음복을 하고 음식은 가가호호에 고루 나누었다. 마을이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해방 후에도 동제를 지내다가 집체화가 시작되면서 정부 당국에 의해 ‘미신 타파’ 명목으로 강제로 없어졌다.

이후 1982년부터 개체화로 바뀌면서 주민들은 농업에 더 성의를 보였고 풍년에 대한 갈망도 강해졌다. 이러한 점은 풍요를 바라는 주민공동체의 의례 부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집체화 시기에는 농사가 잘 되든 못 되든 국가에서 하는 것이니 관심도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근래에는 중국 정부 당국에서도 민간 신앙이나 종교를 믿어도 인민들에게 나쁘지 않다고 하여 허용된다.

이 마을에서는 1985년 무렵부터 다시 동제를 지낸다. 당시 마을에 사고가 많아 마을의 노인들이 회의를 하여 다시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동제를 다시 지낸 후부터 마을에서 사고도 없어지고 정서적인 안정도 찾았다. 현재는 음력 7월 7일 칠석과 9월 9일에 제를 지낸다. 과거에는 모든 가정에서 제비를 분담하였으나 지금은 노인회 회비로 충당한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동제 규모가 작아 100원 정도의 예산으로 제물도 간소하다. 과거에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았으나 지 돼지 고기 한 덩어리를 구입하여 사용한다. 과거에는 탁주를 끓인 후 걸러낸 능주[배주, 배갈, 고량주]를 제주(祭酒)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구입해서 쓴다. 과거에는 마을에서 연장자인 좌상이 동제를 주관하였다. 이 마을의 동제는 함경도 문화가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함경도 방식이다.

2013년에는 8월 13일[음력 7월 7일] 오후 10시경 동제가 봉행되었다. 당나무 아래에는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어놓았다. 당나무에는 ‘아둔노신수 만년장봉경(我屯老神樹萬年長奉敬)’이라고 적어 놓았다. 우리 마을의 노신수 만년 장수하도록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이다. 제단에는 밥 한 그릇, 삶은 돼지고기, 닭발, 땅콩, 북어 세 마리, 계란, 쏘시지, 술 등이 차려졌다.

노인들은 술을 따르고 축문을 읽고 합동으로 절을 세 번 한다. 동제의 절차는 단절된 후 복원되면서 간소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인들은 절을 할 때도 서서 허리만 숙였는데, 이는 중국식 풍속을 일정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상점에서 사온 닭발, 땅콩, 쏘시지 등은 포장지를 뜯지도 않고 그대로 진설하였다.

용정시 청명촌 칠도구 마을의 동제

청명촌 칠도구 마을은 명동촌에서 산 두 개를 넘어 10리 정도 떨어진 마을이며 함경도 회령사람들이 대부분 거주하였다.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아 마을이 없어졌다. 과거 이 마을에는 산골이므로 주로 한전[밭농사]으로 옥수수, 조, 콩, 보리 등을 재배하였다.

제보자 최동혁[1933년생]은 청명에서 칠도구 마을에서 거주하다가 명동촌으로 이주하였다. 최동혁은 칠도구 마을에서 동제를 지낼 때 심부름을 하며 참석하여 과거에 지내던 동제를 기억하고 있다. 최동혁의 조부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30대 전후에 최동혁의 부친을 데리고 칠도구 마을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먼저 온 후 자리를 잡고 나중에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이 무렵이 1900년하고 몇 해 더 지났을 때이다.

해방 전후 칠도구 마을은 아랫 마을[새오 부락]과 윗마을이 있었다. 당시 제보자가 거주했던 아랫마을과 윗마을은 각각 8호, 20호였다. 아랫마을과 윗마을은 동제를 따로 지냈으나, 다 같이 함경도 6읍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동제의 내용은 비슷하였다.

아랫마을의 경우 동제를 지내는 곳을 ‘국시당’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느릅나무가 있었다. 이곳은 산 밑에 위치하므로 겨울에 눈이 와서 올라갈 수 없을 때는 부근에서 그쪽을 쳐다보며 제를 지냈다. 매년 제는 같은 사람들이 지냈는데, 마을의 좌상부터 절을 하였다. 제는 정월과 7월 초정일(初丁日) 자정에 지냈다. 제비는 가가호호 분담했으며, 제물은 매년 같은 집에서 준비했다. 제를 지낼 때 금줄을 치거나 황토도 뿌리지 않았다. 제물은 정월에 돼지 한 마리를 삶아서 각을 떠서 가져갔다. 제상에는 머리, 내장, 다리 등 부위별로 진설하였다. 다른 찬은 별로 없고 팥이 없는 찰떡과 생팥, 마을에서 빚은 술 등을 올렸다. 메나 나물, 소금은 올리지 않았다. 그릇에 솔잎을 뜯어서 세우고 그 위에 향을 꽂았다. 7월에는 돼지 대신에 닭을 잡았다. 다른 것은 정월 제사와 동일하다. 일본인들이 금주령을 내렸을 때는 한동안 술을 올리지 못했다.

제장에는 짐꾼들과 제를 지낼 때 제관들만 갔다. 짐꾼들은 지게 없이 함지박에 음식을 들고 이동했다. 밤길이 어두웠기 때문에 호롱이 들어있는 등잔을 들고 갔다. 당시에는 초가 귀했기 때문에 형편이 좋을 때나 가끔 초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은 호롱불을 사용했다. 제관들은 제를 지내기 위해 산에 갈 때 평소보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주로 두루마기를 걸친다. 제를 지내는 순서는 진설을 하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제상에 있는 갖가지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산에 고시레를 한다. 마지막에 절을 두 번 하는 것으로 끝나며, 소지는 올리지 않는다. 제를 지낸 후에는 곧바로 철수하여 집에서 음복한다. 음복하고 남은 돼지고기는 가가호호 나누어주었다.

해방 이후에도 동제를 지내다가 1956년 무렵 집체화를 실시한 이후 자연적으로 없어졌다. 사유지가 없어지자 개인들의 풍농에 대한 갈망과 기원이 희박해지면서 풍년을 기원하던 동제도 사라졌다. 마을 뒷산 소나무 숲의 참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아 ‘삼공당’이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우환이 있는 집은 조용히 그곳에 가서 빌거나 제를 지내곤 했다. 삼공당은 국시당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특별한 시설물 대신 나무만 있었으나,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참고문헌
  • 『민속사』(북경 대학 조선 분화 연구소, 2000)
  • 『중국 길림성 한인 동포의 생활문화』(국립 민속 박물관, 1996)
  • 『중국 요령성 한인 동포의 생활문화』(국립 민속 박물관, 1997)
  • 천수산, 『중국 조선족 풍속』(북경 민족 출판사, 2008)
  • 許輝勳, 『朝鮮族民俗文化及中國特色』(延邊:延邊大學出版社, 2007)
  • 인터뷰(전경석, 남, 1936년생, 남, 도문시 월청진 수구촌 주민)
  • 인터뷰(전창균, 남, 1935년생,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주민)
  • 인터뷰(최동혁, 남, 1933년생, 용정시 명동촌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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