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人 社會-盲人 占卜者, 李根昌 翁 |
|---|---|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흑룡강성 목단강시 |
| 시대 | 현대/현대 |
고래로부터 형성·전승되고 있는 한민족의 무속적인 관념에서는, “이 세상에는 숱한 신들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물론 인간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악신(惡神)이 선신의 우위에서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다. 악신이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기에 사악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으며 치유하지 못할 병이 만연하고 있다. 악신은 저마다 고유한 신격(神格)이 있어 인간을 침해하는 이유도 다르고 인간을 해코지하는 방법도 다르다.”
한민족의 삶과 직결하고 있는 대표적인 악신으로 ‘동토신’을 꼽을 수 있다. 동토신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 즉 오행(五行)으로부터 인간과 동기 감응(同氣感應)한다. 예컨대 철재로 대문을 만들거나 혹은 솥단지를 들이거나, 나무를 베어 대들보를 세우거나 혹은 마루를 만들거나, 샘을 새로이 파거나, 아궁이나 굴뚝을 만들거나, 땅을 파 집을 넓히거나 할 때 동토신이 감응하여 인간을 침해하기도 한다.
동토신이 인간을 침해하면 보통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이유 없이 앓는다. 이때는 백약이 무효하다. 악신의 침해로 인간의 삶이 어그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악신을 제거해야 한다. 악신을 제거하기에 앞서 악신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을 침해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에 따라 그 정체 및 이유에 따라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확인 및 결정은 점복(占卜)을 통해 이루어진다.
점복에 한해 신분이나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대중의 열망과 지지를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당대 ‘맹격(盲覡)’으로 불리었던 맹인 점복자(占卜者)이다. 맹격의 전통은 고려 시대로부터 비롯되어 20세기 초반까지 계승되었다. 조선 시대의 자료를 살펴보면, 품계가 높은 재상이라도 맹격을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맹격은 성(姓)을 사용하며 종을 거느리기도 했다. 여말 선초에는 왕씨의 명운(命運)을 맹격에게 의뢰하고, 점복의 결과에 따라 고려의 복원 운동을 기하려다 발각된 사건도 있었다. 그만큼 맹격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근대화의 바람이 회오리치는 과정에서 맹격의 전통이 사라져갔다. 오늘날에는 양반 차림에 북과 꽹과리를 치며 주술 행위를 펼치는 법사(法師)에 의해 변형된 형태로나마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흑룡강성 목단강 지구에 맹격의 전통을 잇고 있는 한인[조선족]이 있다. 바로 이근창(李根昌)이다. 이근창은 1939년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 지구로 이주했다. 여섯 살 때 고열로 눈이 멀었다. 열두 살에 태산(泰山)의 한 절간으로 들어가 열다섯 살까지 류광운 선사(禪師)에게 점복 및 방토[액막이]를 배웠다.
2013년 8월, 목단강 지구에서 이근창을 만났다.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그의 곁에는 아내 주정희(1949년생)가 있었다. 반나절 가량 이근창의 삶의 내력 및 점복, 방토 행위에 대해 조사했다. 이를 통해 이근창의 점복과 방토 행위가 고려 시대 맹격의 그것과 맥락이 맞닿아 있음을 확인했다.
고려 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중국 고대의 제신(諸神)을 수용한 도교식 제사가 맹격에 의해 일반화되었다. 이때 태일(太一), 칠성(七星), 노인성(老人星) 등이 신앙의 대상이었다. 민간에서도 성수(星宿)나 진군(眞君) 등 중국 고대의 제신에게 기탁해서 제액 초복(除厄招福)의 기원을 달성하고자 했다. 의식은 맹격이 전담했다. 맹격이 고려 시대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 이념에 의해 사전(祀典)에 등재되지 않은 무속행위를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금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금단의 범위는 무당의 무속 행위에 한정했다. 맹격이 주재하는 점복과 주술 행위는 오히려 국왕이 나서서 철저히 숭앙했다. 이러한 전통은 16세기에 더욱 공고해져 맹격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과장한 일종의 영험담이 궁궐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다.
16~17세기에, 맹격들은 명통시(明通寺)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곳에 보름마다 한 번씩 집결하여 독경(讀經)과 축수(祝壽)를 했다. 독경과 축수는 일정한 장단과 비슷한 가락으로 지속되었다. 맹격의 행색은 흡사 승려와 같아서 세인들은 이들을 ‘선사(禪師)’라고 불렀다. 맹격은 특히 일신의 안위와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대중은 가산의 탕진도 두려워하지 않고 맹격을 열망하고 지지했다.
조선중기 이후에 유교와 무속의 충돌에 의해 도교적 초제의식(醮祭儀式)을 거행하던 소격서(昭格署)가 혁파되었다. 그러자 중국 도교의 만신전(萬神殿)에 모셨던 옥황상제(玉皇上帝), 태상노군(太上老君), 염라대왕(閻羅大王) 등 성현(聖賢) 내지 선왕(先王)으로 숭앙되던 신들을 맹격이 상당 부분 흡수했다. 이로써 맹격의 점복 및 주술행위는 갈수록 권위를 인정받았다.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려낼 수 있다고 믿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실학이 대두되면서 궁궐에서 치르던 맹제(盲祭), 독경제(讀經祭), 맹인기우제(盲人祈雨祭) 등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19세기까지도 맹격은 역학(易學)을 학습하고, 도경(道經)과 불경(佛經)을 구송하며 주술행위를 펼쳤다. 주술행위는 무엇보다 학습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엄격한 사제관계를 유지했다. 20세기 초반에도 맹격은 전국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맹격의 전통을 이근창이 그의 스승인 류광운 선사로부터 계승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불어 닥친 근대화의 열풍으로 무속은 물론 전통 신앙을 비롯한 모든 방술(方術)은 사라져야 할 폐습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맹인 점복자에 대한 수요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913년에 조선총독부의 제생원(濟生院) 맹아부(盲啞部)에서 맹인들에게 침(鍼)·구(灸)·안마(按摩) 위주의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졸업생에게 침사·구사·안마사 면허를 주어 침, 뜸, 안마가 우리나라 맹인의 새로운 직업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21년에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 맹아자 통계 요람(朝鮮盲啞者統計要覽)』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 전체 맹인 8,792명 중 무직이 5,305명(60.3%), 점복자가 1,737명(19.8%), 농업 종사자가 1,203명(13.7%), 짚[藁] 세공자가 146명(1.7%), 침구·마사지사가 97명(1.1%)이었다. 그런데 1927년에 발간한 동일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전체 맹인 11,206명 중 점복자가 1,539명(13.7%), 침구·마사지사가 383명(3.4%)이었다. 전래의 맹인 점복자는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침구·마사지사는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27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의 “17명의 소경이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자기네들은 앞 못 보는 불구자이므로 다른 노동하는 직업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복술(卜術)로 길흉 화복을 점치며 재앙을 물리치는 독경(讀經)으로써 직업을 삼아 생명을 부지하는 터인데, 최근 눈 뜬 소위 박수라는 것이 유행하여 자기의 직업을 침해하니”라는 기사를 통해 눈 뜬 점복자가 새로이 등장하여 맹인점복자의 방술을 대신함으로써 정통의 맹인 점복자가 갈수록 위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근창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었던 때인 1939년에 태어났다. 이근창이 맹인 점복자로서 길을 걷게 된 데에는 다음의 내용처럼, 그의 외할머니 역할이 컸다.
이근창은 1939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상용은 소작인이었다. 어머니 신순재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며 동대문 개울가에서 기름을 팔았다. 그러다가 1942년에 처가 식구들과 함께 흑룡강성 목단강 지구로 이주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아버지 이상용이 찬물을 마시다 얹혀 몇 달 간 앓다 죽었다. 어머니 신순재는 영안시 문화촌의 김씨 집안으로 재가했다. 이근창과 동생은 외할머니 고흥길이 길렀다. 그 무렵, 이근창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렸다. 외할머니는 병원이면 병원, 무당이면 무당, 손자를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헤맸다. 당시 외할머니가 이근창의 병을 고치기 위해 쓴 돈이 이근창의 키 높이와 같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근창의 어린 동생마저 고열에 시달렸다.
어느 날, 외할머니는 어느 ‘봉사 선생’을 만났다. ‘봉사 선생’은 집안 식구들의 사주를 짚어보더니, 사주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고인이 된 이상용의 무덤을 둘러보자 했다. 그리고는 무덤에 물이 찼으니 시신을 꺼내어 화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봉사 선생’이 정한 날에 이상용의 무덤을 팠다. 실제로 관이 물에 잠겨 있었다. 급히 ‘봉사 선생’을 불러 상황을 고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한 후 방토를 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동생이 눈을 떴다. 그러나 이근창은 눈을 뜨지 못했다. 이근창의 나이, 그때가 여섯 살이었다. 외할머니는 ‘봉사 선생’에게 이근창을 제자로 들일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봉사 선생’은 마다하며, 태산의 한 절간에서 수도하며 제자를 양성하는 류광운 선사를 소개했다.
이근창이 열두 살 되던 해, 외할머니는 이근창을 태산의 류광운 선사에게 인도했다. 당시 그 절간에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종족도 달랐고, 나이도 달랐고, 사는 곳도 달랐다. 그러나 모두 맹인이었다. 이근창은 태산의 절간에서 2년 간 점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1년간 방토하는 법을 배웠다. 선사의 가르침은 엄했다. 사주팔자든 치성문이든 오늘 배운 것은 내일 아침까지 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회초리를 맞았다. 그렇게 3년을 수학하고 절간에서 내려왔다.
이근창이 고열에 시달리다가 시력을 잃었을 때, 겨우 5∼6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이근창이 12세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이근창을 태산(泰山)으로 보내 그곳에서 점복과 방토를 수학케 했다. 외할머니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결정적인 이유는 어느 ‘봉사 선생’의 방토로 이근창의 동생이 눈을 뜨는 효험을 목격했기도 하거니와 이주하기 전에 이미 원주지에서 맹인들의 점복 및 방토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근창의 외할머니 시각에서는, 어느 ‘봉사 선생’이 사주를 풀어 재액의 이유를 확인하고 그것을 방토로써 물리치는 것이 원주지에서 맹인들의 점복 및 방토와 유사하다고 인식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먼 중국 땅에서조차 일종의 유훈(遺訓)을 계승하듯이 이근창을 태산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근창이 중국의 선사로부터 점복 및 방토를 사사받았다고 하더라도, 16살에 불과했던 터라 주변 사람들은 이근창을 신뢰하지 않았다. 4년간 점을 쳤지만 신도가 모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방토 할 기회도 잡지 못했다. 하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중국 정부의 복지 정책에 힘입어 어느 공장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30여 년간 일을 하다가 1993년에 퇴직했다. 퇴직 후 선사로부터 받은 옛 문서들을 들추어내어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다시 공부해서 점을 치기 시작했다. 이때 아내 주정희가 이근창을 보조했다.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호응했다. 입소문까지 타게 되어 다른 성(省)에서조차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이근창의 제보에 의하면, 현재는 1~5월을 기준으로 매달 200여 명의 신도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이근창은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바탕으로 점을 치며, 점복의 결과에 따라 부적을 쓸 것인지 방토를 할 것인지 결정한다. 예컨대 사주팔자를 바탕으로 한 점복에서는, 정월 용날에 태어난 사람은 재물이 쌓였다가도 일진광풍에 다 흩어진다. 정월 뱀날에 태어난 사람은 한평생 재물을 모으기 어렵다. 2월 소날에 태어난 사람은 정월 용날의 운수와 동일하다. 2월 닭날에 태어난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야 하지만, 배우자의 사주가 좋으면 그 덕에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태어난 해에 따라 대문의 위치를 달리 내야 한다. 범, 토끼, 용띠는 서쪽과 북쪽으로 대문을 내야 우환이 따르지 않는다. 쥐, 소, 돼지띠는 서쪽과 남쪽으로 대문을 내야 우환이 따르지 않는다. 원숭이, 닭, 개띠는 동쪽과 남쪽으로 대문을 내야 우환이 따르지 않는다. 말, 양, 뱀띠는 동쪽과 북쪽으로 대문을 내야 우환이 따르지 않는다.
이근창은 점복의 결과에 따라 부적을 제작한다. 대표적으로 가택안녕부적(家宅安寧符籍), 보신평안부적(保身平安符籍), 득재부적(得財符籍), 원행부적(遠行符籍), 차사고방지부적(車事故防止符籍), 관재부적(官災符籍), 축사부(逐邪符), 상문부(喪門符), 도화살면제부적(桃花乷免除符籍) 등이다. 이근창은 이를 여전히 붉은 색 광택이 나는 주사(朱砂)를 갈아 붓으로 부적을 제작한다. 심지어 1993년에 점복업을 재개했을 때에는 몇 년 간 닭의 피로 부적을 제작하기도 했다. ‘잡귀나 잡신이 동물의 피를 꺼리기 때문에 이로써 부적을 쓰면 더욱 효험이 있다’는 선사의 가르침을 새긴 것이었다고 한다.
이근창은 부적으로 효험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면 방토를 권한다. 방토는 달리 ‘방술(方術)’이라고 하는데, 가정사에서, 개인사에서 닥친 질병이나 고난, 불행 등을 제거하기 위한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근창이 주재하는 대표적인 방토는 ‘나무치성’, ‘산치성’, ‘강치성[짚치성]’ 등이다.
부부 간이나 자식 간에 반목이 생길 때는 비술나무 또는 버드나무를 제장으로 삼아 방토를 한다. 이를 ‘나무치성’이라고 하는데, 길일을 택해 1년에 한 번씩 3년간 행한다. 우선 너른 한지를 나무 앞에 펼쳐 놓고 제물을 진설한다. 맨 위 열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포도(두 송이), 과자(두 종류), 사과(두 개), 사탕(아홉 종류)을, 그 아래 열에는 돼지머리, 당면(약간), 계란(여섯 개), 두부부침(아홉 쪽), 잉어 또는 붕어(두 마리)를, 그 아래 열에는 기름떡(아홉 쪽)과 정안수(세 사발)를, 그 아래 열에는 접시(세 개), 술잔(석 잔), 술(두 병)을 진설한다. 제물과 나무 사이에는 붉은 천(2자 7치 혹은 9치)을 깔아 놓는다. 제물 오른쪽에는 치성문을 바르게 놓고, 왼쪽에는 남색 천(3자 3치)과 비단 천(7자 7치)을 깔아 놓는다. 본격적인 방토에 앞서 간단히 ‘산신치성’을 올린다. 나무에서 산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제주가 제물을 약간씩 떼어 놓고 술 한 잔을 부은 후 세 번 배례한다.
이어 제주가 제물 앞의 중앙에 서고, 배우자나 자식은 오른쪽에, 이외의 사람들은 왼쪽에 선다. 제주가 석 잔의 술을 부으면 제주 이하 참여자 모두 세 번 배례한다. 이후 제주의 배우자나 자식이 치성문을 왼다. 이때 제주는 석 잔의 술을 나무 주위에 흩뿌린다. 그리고 과일류의 제물을 약간씩 떼어 나무 가지에 얹혀 놓는다. 이러한 절차를 세 번 반복한다. 그런 다음 제주가 세 사발의 정안수를 나무 주위에 흩뿌린 후 제물을 걷는다. 그리고 붉은 천을 세 갈래로 찢어 나무 가지에 매단다. 붉은 천을 나무 가지에 매다는 것은 첫 해에만 한다. 끝으로 남색 천을 접어 나무 밑동에 놓고 제장을 떠난다. 집에 돌아와 제물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 비단 천은 요의 홑청으로 사용한다. 치성문은 잘 보관했다가 마지막 해에 치성을 올린 후 태워버린다.
농사의 풍작이나 사업의 번창을 기원할 때는 산(山)을 제장으로 삼아 방토를 한다. 이를 ‘산신치성’이라고 하는데, 길일을 택해 한 차례만 행한다. 영안시에서는 주로 목단봉(牡丹峰)에서 행한다. 우선 산정(山頂)이 잘 바라보이는 일정한 곳에 너른 한지를 펼쳐 놓고 제물을 진설한다. 맨 위 열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포도(약간), 사과(약간), 바나나(약간)를, 그 아래 열에는 닭(삶은 수탉)과 돼지고기(입, 혀, 귀)를, 그 아래 열에는 사탕(세 종류)을, 그 아래 열에는 접시(세 개), 술잔(석 잔), 술(한 병)을 진설한다. 제물 오른쪽에는 치성문을 바르게 놓는다. 이어 제주가 제물 앞으로 나아가 술 석 잔을 붓고 세 번 배례한 후 치성문을 왼다. 그리고 술을 제장 주변에 흩뿌린다. 제물도 약간씩 떼어 제장 주변에 흩뿌린다. 이러한 절차를 세 번 반복한다. 그런 다음 치성문을 태운다. 끝으로 제물을 걷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끼리 음복한다.
사업이 잘 안 풀릴 때는 강(江)을 제장으로 삼아 방토를 한다. 이를 ‘강치성’이라고 하는데, 짚을 태우는 행위에 기인해 달리 ‘짚치성’이라고도 한다. 강치성은 길일을 택해 한 차례 행한다. 제물로 돼지고기(껍질 채 삶은 세 근), 계란(세 개, 껍질 벗김), 배(세 개, 일곱 조각), 술잔(한 잔), 술(한 병)을 준비한다. 이외 짚(한 단), 막대기(버드나무 제외), 붉은 천(아홉 치), 누런 색 한지(일곱 묶음), 백지(한 장), 성냥을 준비한다. 백지에는 주소를 내리 적는데, 망자[부모, 조부모]의 이름과 주소는 오른쪽에, 후손의 주소는 왼쪽에 적는다. 이때 후손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의 몇째 딸, 아들, 손녀, 손자 식으로 처리한다.
강가에 다다를 무렵, 제주는 길 오른쪽으로 걷는다. 제장에 도착해서는 왼쪽 켠에 제물을 놓고, 막대기로 원을 크게 그리되 서남쪽으로 문을 낸다. 그런 후에 본격적으로 방토를 한다. 우선 제주가 원 밖에서 서남쪽을 향해 앉아 짚에 불을 붙여 누런 색 한지 세 묶음을 태운다. 원 안에서도 짚에 불을 붙여 한지를 태운다. 불이 한창 타오를 때 비손하며 기원하는 바를 세 번 말한다. 이어 붉은 색 천과 남아 있는 누런 색 한지를 모두 태운다. 끝으로 잿더미 앞에 제물을 약간씩 떼어 진설하고, 잿더미에 술을 한 잔 붓는다. 이런 절차를 세 번 반복한다. 남은 술이 있으면 잿더미에 모두 붓고, 술병은 서남쪽으로 향해 놓는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부터 ‘제2의 민족 이동’이라고 할 만큼 중국 전역으로 동북 3성 한인[조선족]들의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한인[조선족]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대련, 천진, 연태, 위해, 청도, 상해, 심천, 광주 등의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면서 적게는 몇 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인구의 한인[조선족] 집거지가 우후죽순으로 형성되었다. 한인[조선족]이 떠난 동북 3성의 경작지는 한족이 소작농 혹은 계약농의 직분으로 채우고 있다.
중국 동북 3성의 한인[조선족] 사회가 변화하면서 이들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다. 물론 동북 3성의 이주 한인들은 일제 시대, 해방 전쟁, 6·25 전쟁, 계급 투쟁과 사상 투쟁, 집체화와 인민 공사, 문화 혁명, 개혁개방 등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소용돌이와 중국의 역동적 역사 속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 당연히 한국, 한국인과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민족으로서 혈통, 언어, 전통, 관습 등 여러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 한인[조선족]과 한국인의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근창 옹에 의해 맹격의 옛 전통이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지역에서도 ‘신에 대한 경외’와 ‘비합리적인 미신 타파’라는 간극에서 맹인 점성술가의 점복과 방토가 단절의 위기를 맞고 있다. 또한 이근창 옹도 이제 힘이 부쳐 먼 데 나가 방토하는 일을 꺼리고 있다. 다행히 힘이 남아 있을 때 한민족의 점복과 방토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장남 이현철(1979년생)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이근창의 점복과 부적, 그리고 방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점복은 고래의 생진팔자(生辰八字)와 상생상극(相生相剋)을 좇고 있으며, 부적은 원시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원형태를 고집하고 있다. 방토는 예(禮)를 중심에 놓고 유가와 도가를 습합시킨 형태를 계승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태산의 선사로부터 수학한 것을 되새겨, 그것을 현실에서 재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근간에는 장남 이현철에게 자신의 점복과 부적, 그리고 방토를 전수시키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도록 잊혀 스러졌던 맹인 점복자가 부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