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흑룡강성 조선족 사회의 눈과 귀, 『흑룡강 신문』

한자 黑龍江省 朝鮮族 社會의 눈과 귀, 黑龍江 新聞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인가시기/일시 1956년 9월
창간시기/일시 1957년 3월 1일
개칭시기/일시 1961년
개칭시기/일시 1983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1년 1월 29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1년 10월 1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1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8년 4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3년 1월 1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3년 7월 1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5년 4월 1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8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1년 11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2년 9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6년 1월
정의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본사를 둔 한인[조선족] 사회의 최대 신문사.

개설

『흑룡강 신문』은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가장 큰 신문사로서 온라인 뉴스뿐만 아니라, 심양(瀋陽), 천진(天津), 한국 등 지역에 6개 지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인[조선족] 사회의 눈과 귀가 되고 있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국의 조선족 신문사들

한인[조선족] 신문사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인 한인[조선족]의 문화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조선족 신문이 없으면 조선족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중국 동북 3성에는 한인[조선족] 183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포를 대상으로 한 신문으로 『흑룡강 신문』(하얼빈) 외에 『길림 신문』(장춘), 『연변 일보』(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와 『요령 조선 문보』(요령성 심양시) 등 종합지와 『동북 과학 기술 신문』(연길시) 등 전문지가 있다.

이 신문사들은 소수 민족 대상 발행지라는 한계로 만성적 경영난을 겪고 있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된 지역인데다, 한국어로 발행되고 있어 광고와 구독료만으로 신문사 운영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 신문사 직원 인건비 등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맥 유지만 가능한 수준이다. 외부 환경은 더욱 어려워졌다. 최근 많은 한인[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취업하거나, 중국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어, 동북 3성 내 한인[조선족] 인구 자체가 감소하는 상황이다. 젊은이들은 신문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기자와 직원들은 경제적 이유로 직장을 옮기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인재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 언론 재단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동포 언론사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의 지원이 신문사 운영난 해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민족으로부터 오는 관심과 애정에 한인[조선족] 언론사 관계자들은 용기를 얻고 있다.

한인[조선족] 신문사들은 독립적 운영과 사세 확장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중국 거주 한국인 교포를 대상으로 별도 신문을 발행, 광고수입 확대를 꾀하고 있다. 한국에 체류하는 한인[조선족]을 대상으로 한국어판 신문을 발행하기도 한다. 또한 인터넷 신문을 운영, 지역적 한계를 딛고 세계 한민족을 대상으로 경제대국인 중국 소식을 한글로 전달하는 통신사로서의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말 통신사 꿈꾸는 『흑룡강 신문』

흑룡강 신문사는 흑룡강성 하얼빈에 있는 한인[조선족] 신문사이다. 100명의 직원 중 60명이 기자로 근무한다. 일간 흑룡강신문은 흑룡강성 한인[조선족] 50만 명을 대상으로 5만부 발행되고 있다. 또한 ‘『흑룡강 신문』 주간판’을 발행하여 중국 전역의 한국인 교포를 대상으로 배포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 거주 한인[조선족]을 포함하여 한국인을 대상으로 ‘『흑룡강 신문』 한국판’을 발행하고 있다. 심양, 천진 등 중국 전역에 6개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에 2명의 특파원을 파견했다.

다른 한인[조선족] 신문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편인 흑룡강 신문사 역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문사에서 운영하던 인쇄소는 적자로 인해 몇 해 전 문을 닫았고, 인쇄 시설은 매각했다. 일간지 광고는 수입이 되지 않아 아예 폐지했고, 운영경비 대부분은 정부 지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신문사 운영의 어려움은 있으나, 미래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중국 거주 한국인 교포와 함께 전 세계 한민족을 상대로 독자를 확대하여 새로운 광고 수입원을 창출하고 있다. 한광천흑룡강 신문사 사장은 “중국내 다양한 취재망을 이용하여 떠오르는 경제대국 중국에 대한 소식을 세계 한민족에게 우리말로 제공하는 통신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흑룡강 신문』이 걸어온 길

『흑룡강 신문』의 전신은 목단강 일보이다. 1956년 9월 흑룡강성 공산당 위원회의 허가를 받고 흑룡강 신문사의 모체인 목단강 일보사가 설립되어 이듬해 3월 1일에 첫 창간호를 냈다. 1961년 하얼빈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흑룡강 일보(조선 문보)로, 1983년부터는 현재의 『흑룡강 신문』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신문은 초창기에 4절지 4면의 작은 신문이었으나, 현재는 칼라판 2절지 8면의 일간지로 발전하였다.

근 60년간 『흑룡강 신문』은 흑룡강성 한인[조선족] 사회, 나아가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파란만장하고도 찬란한 역사 행로를 걸어왔다. 1961년 1월 29일 정간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지만 그해 10월 1일 관련 부문의 결정에 따라 조선문주간지 흑룡강 일보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1963년 1월 1일부터 주 3간으로, 1968년 4월부터는 주 6간으로 발행되었다.

1970년대 후반 중국의 개혁개방이 실시되면서 흑룡강일보의 전반적인 보도도 차츰 정상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농촌의 선진 경험, 선진인물 기사들이 대폭 증가되었으며, 사회, 교육 등 일반을 망라한 보도 양도 급증하였다.

1983년 1월 1일부터 흑룡강성 정부의 허가를 받고 흑룡강 일보에서 분가하여 독립신문으로써 흑룡강 조선 문보로 제호하여 출간하였다. 1983년 7월 1일부터는 제호를 『흑룡강 신문』으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발간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부터 기자를 흑룡강성 외의 국내와 국외로 대량 파견하여 티베트 기행, 심천 기행, 광동 기행, 신강 기행과 일본 견문, 북한 기행, 미국 기행 등을 계속 연재하였다. 발행 부수도 2만 3,000부에서 4만 5,000부로 급증하였고, 그 후 8년간 계속 이 수준을 확보하였다. 1985년 4월 1일부터 자매지 중국어판 치부 정보 신문을 발행하여 한때 발행부수 17만부를 돌파하기도 하였다. 1988년부터 『흑룡강 신문』은 최초로 해외 지면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흑룡강 신문』은 획기적인 변화를 거쳤다. 2000년 8월에는 칼라인쇄기를 구입하여 『흑룡강 신문』이 오색찬란한 칼라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2001년 11월에는 인터넷 『흑룡강 신문』을 개설하였다.

2002년 9월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맞춰 발 빠르게 변화, 발전하면서 대도시 한민족을 주독자로 한 주일특간을 창간하였다. 2003년 차례로 북경, 천진, 상해, 심천, 장춘, 연길, 심양, 대련, 단동 등지에 흑룡강 신문사 지사를 설립하고 기자를 파견하여 전국 각지의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일간지와 주간지의 발행량이 대폭 증가하였다.

2005년 8월부터 2006년 4월말까지 9개월에 걸쳐 특별기획 대형 시리즈 ‘한겨레사회 어디까지 왔나’를 완성하였다. 중국의 최남단 해남편으로부터 광동편, 상해편, 산동편, 수도권편, 요령편, 길림편, 감숙편, 섬서편, 내몽골편 등 총 240여 편의 취재기사와 400여 점의 사진을 보도하였다. 이 특별기획은 2005년 흑룡강성 보도상 1등상을 획득하였다.

2005년 8월 흑룡강신문사 한인[조선족] 대학입시생 장학금을, 12월 흑룡강신문사 한인[조선족]대학생 IT장학금을, 2006년 5월에는 흑룡강신문사 전 성 한인[조선족] 소학생 장학 기금을 설치하고 장학금도 지급하였다.

2006년 1월에는 중국 겨레 사회를 커버하는 대변지로 멀티미디어 리더로 도약하고자 인터넷 『흑룡강 신문』 업그레드판을 개통하였다. 현재 흑룡강 신문사의 65명 편집, 기자를 포함한 140명 임직원의 한결같은 노력으로 흑룡강신문은 일주일에 일간지 48개 면, 주간지 72개 면으로 된 한인[조선족] 사회와 내외 정보들로 알차게 꾸며진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조선족 사회의 준정부, 『흑룡강 신문』

흑룡강신문사이진산 전 사장은 “반백년 모아온 밑천을 안고 앞을 바라보니 갈 길이 환해지고, 50년간 없던 그릇들을 있게 했고 작은 그릇을 큰 그릇으로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 그릇을 더 잘 다듬고 빛을 내는 일만 남았으니 자연히 자신감이 커집니다. 한사람이 꾸는 꿈은 그저 꿈에 지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뜻을 모아 함께 꾸는 꿈은 현실로 변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꿈은 우리 민족이 다 같이 부자로 되는 꿈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흑룡강 신문』은 조선 민족들의 정당한 권익을 수호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 따라서 줄곧 한인[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서 겪는 실제 문제를 제 때에 보도함과 아울러 직접 나서서 풀어주기에 힘써왔다. 특히 민족 정책에 관련되는 문제, 법률 소송에서 걸린 문제, 경제 분쟁 등 민족의 근본적 이익과 관계되는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섰다. 해마다 1,000여 건의 민원을 접수, 처리하고 큰 문제와 사건은 직접 기자를 파견해 조사한 후 정부에 보고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촉구했다.

그 일례로 2001년 4월 상지시 일면파진에서 촌민들의 동의도 없이 60여 년 역사를 가진 조선족 마을인 월성촌을 이웃 한족촌에 합병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촌지도부는 차례로 진(鎭), 상지시하얼빈시 관계부문을 찾았지만, 가는 곳마다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접수하지 않았다. 이에 흑룡강신문사에서는 이 문제를 바로 흑룡강성 민족 사무 위원회 관계 부서에 전달, 관련정책을 파악한 후 직접 상지시 정부 해당 부처를 찾아 합병절차와 합병결정의 정책적 근거를 두고 상론하여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상지시에서는 시장 특별 사무회의를 소집해 전면 검토한 후 그릇된 결정을 취소하고 월성촌을 독립된 행정촌으로 회복한다고 새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소실될 뻔 했던 산간마을 월성촌이 재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흑룡강신문은 독자들로부터 ‘준정부’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새로운 독자를 찾아라

"조선족 인구가 연해지구나 발달한 대도시로 대거 이동하면서 인구유실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습니다. 독자를 따라 연해지구에도 진출했고, 새로운 독자군을 찾아 나서기도 했으며, 신문의 디자인을 혁신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부단히 모색해왔습니다. 격변기에 처한 소수 민족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변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는 흑룡강 조선족 신문사한광천 사장의 말이다.

흑룡강신문사는 현재 중국 내 4대 한인[조선족] 언론사의 하나로 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현지 한인[조선족] 인구의 대량 유실과 함께 독자층이 점점 줄어들면서 진통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 말 통계에 따르면, 흑룡강성 내 한인[조선족] 호적인구는 45만 4,091명이였으나, 2008년 말에 와서는 38만 8,458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실제 거주하고 있는 인구는 이보다 훨씬 적은 20만 명 내외라고 한다.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얼빈, 목단강 등의 도시에 진출하면서 민족 언어와 문자를 적게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이들의 2세는 민족 언어와 문자에 대해 아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한인[조선족] 신문을 구독할 수 있는 독자층은 겨우 5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지난 10년간 『흑룡강 신문』의 발행량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흑룡강신문사 지도부는 전국 각지에 한인[조선족] 사회가 형성되고 있는 점을 주목하고 독자군을 찾아나서는 전략을 짜서 실천했다. 1998년에 청도, 연태 등의 도시에서 주간지를 꾸리기 시작해서 점차 북경, 상해, 심천 등지까지 업무를 확장해나간 것이다.

한중 수교 이후 거대한 중국 시장을 겨냥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많을 때에는 100만 명 가까이 들어와 있기도 했다. 이런 형세에 비추어 흑룡강신문사에서는 또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판 주간을 펴내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했다.

독자군을 찾아 나가고 새로운 독자군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기층의 독자군을 놓치지 않는 것도 역시 중요했다. 흑룡강신문사에서는 현지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한인[조선족] 사회와 주류사회를 소통시켜주었다. 또한 산재지역 한인[조선족]들의 권익을 수호해주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었으며, 한인[조선족]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여론 인도를 해주었다.

격변기 한인[조선족]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흑룡강 신문』은 위기란 항상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동반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변화를 통한 지속적인 발전과 도약을 꾀하고 있다.

『흑룡강 신문』은 고마운 은사

아래는 흑룡강성 영안시 강서촌에 사는 독자 김세영 씨의 글이다.

“『흑룡강 신문』이 1957년 3월 1일 조선문 목단강일보로 우리 겨레들의 앞에 첫 선을 보인 그 다음해부터 줄곧 애독하여온 나는 이 신문에서 얼마나 많은 영양을 섭취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평생 영안현소학교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여 왔다. 비록 현재 이직 휴양 중이지만, 지난해 흑룡강 신문사 창간 50주년 기념행사를 맞이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도 반가와 격정이 부풀어 올랐다.

참말로 『흑룡강 신문』은 우리 조선민족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한인[조선족]이 사업하고 생활하고 있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각항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 한인[조선족] 사업일꾼들에게 건전한 정치적 동력을 잘 부여해 주었다. 공농업 전선이거나 문화교육 위생 전선까지 실무 지도와 기술 지도를 하여 주었다.

마음속의 말을 한다면 ‘『흑룡강 신문』’은 나의 제일 친한 동반자이고 없어서는 안 될 키잡이이다. 내가 나무라면 『흑룡강 신문』은 비옥한 향토가 되어 나로 하여금 충실한 위대한 인민의 교원으로 성장시켜주었다. 또한 나로 하여금 교장직을 맡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 어느 한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생활 등 다방면의 종합적인 교육을 꾸준히 해온 고차원의 지도자가 바로 『흑룡강 신문』이다. 하기에 우리가 『흑룡강 신문』을 적극 주문하고 잘 학습한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인정한다.

한인[조선족]이 55개 소수 민족들 앞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성장되고 있는 것도 우리 『흑룡강 신문』과 갈라놓을 수 없다. 심어놓은 곡식도 잘 가꾸어야 잘 자라듯이, 인간의 의식수준 제고도 이런 과학성을 갖고 있다.

우리 『흑룡강 신문』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조선민족이 타민족에게 뒤떨어질세라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발전의 앞장에 서도록 추진하는 보도가 많기도 하다. 신문을 펼쳐보면 경제종합, 향촌종합, 사회종합, 노년, 학생, 여성 등 각 면의 보도내용이 매우 충실하다. 특히 우리 한인[조선족] 농촌의 실정에서 출발하여 노인들의 주인공 자태를 수립시켜줌으로써 노인조직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강서촌 노인조직에서도 주동적으로 촌의 일들을 꾸준히 도와 나서고 있다. 우리 촌의 간부들도 2무(畝)의 토지에 얽매여서는 치부할 수 없다며 기업을 꾸릴 꿈을 크게 꾸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기상은 우리 『흑룡강 신문』의 편달에서 오는 것이다. 그야말로 부모와 다름없는 뜻 깊은 ‘은사’라고 믿어 모시게 된다.

나는 두 손 받들어 영원히 잘 모시려고 마음을 먹는다. 나는 영원히 한인[조선족]을 위하는 『흑룡강 신문』의 그 마음이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을 기원한다.

참고문헌
  • 김원태, 「중국 조선족의 언론 현황과 언론관에 관한 조사 연구」(『세계화 시대 재외한인 연구』, 2003)
  • 김원태, 「중국 동북 3성 한인 언론의 현황과 조선족의 언론관에 관한 연구」(『전남 대학교 세계 한상 문화 연구단 국제 학술 회의』(전남 대학교 세계 한상 문화 연구단, 2004)
  • 리봉우, 『중국 조선문 언론 출판 연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12)
  • 최상철, 『중국 조선족 언론사』(경남 대학교 출판부, 1996)
  • 흑룡강신문(http://www.hljxinwen.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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