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한 명 밖에 없어요-흑룡강성 조선족 교육의 현주소

한자 學生이 한 명 밖에 없어요 – 黑龍江省 朝鮮族 敎育의 現住所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가목사시  
시대 현대/현대
개설

흑룡강성 조선족 학교의 통·폐합 현황을 살펴보면, 1949년 중국 해방 당시 흑룡강성에는 274개 조선족 소학교와 13개 중학교가 있었으며 학생 수는 각각 3만 7,562명, 3,358명이었고 1957년 통계에 의하면 흑룡강성에 319개 조선족 소학교와 16개 중학교가 있었으며 학생 수는 각각 3만9,146명, 9,348명이다. 1960년대 초 문화 대혁명 직전 조선족 교육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당시 흑룡강성 조선족 교육의 역사 이래 학교 수가 가장 많고 재학생수도 가장 많은 시기였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소학교가 419개로 증가했고 중학교도 2배 넘게 34개로 증가했다. 재학생 역시 크게 증가하여 소학교의 경우 5만4,111명, 중학교는 10,873명으로 초등학교 입학률이 95%에 이르렀다. 조선족 마을마다 조선족 학교가 설립되었고 한인[조선족]들이 집거해 있는 현[시] 마다 중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최근 20년간 흑룡강성 조선족 학교 현황을 통계로 보면, 1988년 당시 405개 조선족 소학교가 2006년 현재 40개로 줄어들었고 학생 수도 3만5,422명에서 2005년 현재 5,517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조선족 중학교는 1988년 당시 85개 학교에서 2006년 현재 18개로 줄고, 학생 수도 1988년 당시 2만 748명에서 2005년 현재 16,482명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소학교 학생 수는 1993년 4만 6,013명으로 1988년보다 1만 명 정도 늘어난 추세를 보이다가 2005년 현재 5,517명으로 만 명 단위에서 천명 단위로 줄어든 현상을 알 수 있었다.

1988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흑룡강성 전 지역에 409개 조선족 학교가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학교들이 연달아 폐교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족 학교의 통·폐합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시기는 1998년~2001년으로 소학교 120개, 중학교 21개가 폐교되었다. 이어 2004년까지 78개 소학교를 포함하여 93개 학교가 폐교되었다. 2006년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이미 폐교된 학교는 모두 389개이며, 이외에도 통폐합을 추진 중인 학교가 30~40개로 집계되었다.

조선족 학교의 통·폐합 특징을 보면, 조선족 학교의 통·폐합 과정에서 가장 큰 특징은 통합보다 폐교되는 학교가 많다는데 있다. 또한 농촌의 학교의 폐교를 시작으로 향진 그리고 도시의 학교로 점차 폐교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특성을 보인다.

조선족 학교의 통·폐합 원인에 대해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재학생 수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다. 재학생 수의 감소원인은 첫째, 출생률 감소이며, 둘째 국제 결혼으로 인한 가임 여성 부재, 셋째 도시와 국외 이주 인구 증가로 꼽을 수 있다.

1990년 전후로 중국의 한인[조선족] 사회는 ‘개혁개방’과 ‘한중 수교’라는 두 개의 큰 계기를 맞게 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한인[조선족]들의 국내외 이주를 가능케 하였다면 1992년 한중 수교는 국내외 이주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 기업이 대거 중국에 진출하면서 한국 기업이 있는 곳마다 한인[조선족]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한국 기업은 주로 경제 특구로 지정된 연해 도시에 자리 잡았고 이로써 한인[조선족]들이 연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흑룡강성은 한인[조선족]들의 집거 지역인 길림성이나 요령성에 비해 변방 지역인데다 경제가 비교적 낙후되어 있다 보니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향이 심했다. 또한 혹룡강성 지역의 한인[조선족]은 한국과 연고가 많은 지역이라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으로 이주가 많았다.

조선족 학교의 감소 원인 중 또 다른 주요원인은 교사 이직과 조선족 교육에 대한 학부모 인식 변화이다. 40명 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재 재직자는 10명이고 그 중 실제 재직자는 8명뿐이며 휴직자는 2명 중 1명이 한국에서 취업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흑룡강성 지역의 조선족 학교 교사들의 이직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한인[조선족] 인력을 필요로 하다 보니 일반적으로 전문대 이상 학력을 가진 한인[조선족] 교사들은 한국 기업의 채용 조건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다. 한인[조선족] 교사 출신들은 대체로 한국 기업에서 임원 혹은 관리직으로 근무하였는데 근무 조건은 학교보다 월등이 좋았다. 이러한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 기업으로 이직하는 교사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교사들의 이직과 휴직으로 일선 농촌 학교에서는 교사의 부족으로 기간제 교사를 임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고등 학교 졸업생 등 교사 자격 미달자도 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족 학교를 졸업한 한인[조선족] 학부모들이 자녀 만큼은 한족 학교로 보내고자 하는 인식의 변화이다. 조선족 고중 학교를 졸업한 한인[조선족] 학부모를 대상으로 면담한 결과. 거주 지역 내에 조선족 학교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한족 학교를 보내야 했다는 학부모도 있었고. 자녀를 상해시 모 한족 소학교에 보낸 김충원씨는 “조선족 학교를 다녀 한국 생활에 아무런 불편함 없었지만, 그러나 귀국하여 상해에서 사업을 하다 보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면서 “자녀 만큼은 중국에서 살고 중국인과 어울리려면 한족들과 함께 교육 받는 것이 좋다 생각하여 아들 녀석은 5살부터 한족유치원에 보냈다”고 답했다. 한선영[여, 38세]씨는 일본 기업에 취직하면서 심천시(深圳市)로 이주했고, 딸아이를 심천시 모 한족 소학교에 보냈다. 그 이유로 조선족 학교를 꼭 보내고 싶었지만 조선족 학교가 없었고, 한국 국제 학교가 있긴 하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조선족 학교가 있더라도 아이를 한족 학교에 보낼 것이라고 답한 학부모들의 말을 빌면. 학부모 자신은 조선족 학교를 졸업해 한국 진출과 한국 기업 취업 등으로 혜택을 입었다 생각하지만 한족 학교를 다니면 중국인과 인맥을 넓힐 수 있고 중국 어디에 가든 자신감 있을 거라 생각하여 자녀들을 한족학교에 보내게 되었다고 답한다.

중국 소수 민족교육 정책의 한계 "조선족 학교는 폐교만 있을 뿐 신설이 없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흑룡강성 지역에 조선족향이 20여 개에 조선족 마을이 490여 개가 있었다. 그런데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내외 이주로 한인[조선족]들은 전출되고 대신 한족들이 전입되면서 100여 개 마을이 더 이상 조선족 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한화 되었다. 문제는 흑룡강성에 조선족 마을이 줄었다고 해서 한인[조선족]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이주를 갔을 뿐이다.

그러나 이주하여 정착하는 곳은 지정된 민족 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민족 학교를 설립하기 어려웠고 민족 학교에 대한 지원 체계도 갖춰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족 학교는 폐교만 있을 뿐 새로운 학교 설립은 있을 수 없다. 이는 소수 민족 정책은 한인[조선족]의 국내 대이동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결과이며 소수 민족 정책의 지역제한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 조선족 교육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조선족 학교 통폐합 원인 분석에 따른 조선족 학교 발전적 대안으로, 첫째 농촌마을이 유지되고 또한 마을의 한인[조선족]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한족 학교에 다녔던 한인[조선족] 학생들이 언제든지 조선족 학교로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한족 학교와 조선족 학교의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교사들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우수한 교육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능한 학교 폐교를 자제하고 분교장 설립 혹은 인근 한족 학교와의 연합학교를 만드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조선족 교육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조선족 온라인 학교, 방과 후 한글 학교, 주말 한글 학교 등 다양한 민족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동녕현의 눈물겨운 조선족 학교 살리기

이 지역의 조선족 민족 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삼차구진에는 모두 5개의 조선족 소학교가 있다. 삼차구 소학교와 장정·하북·동방홍·오성 소학교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소학교들 모두가 학생 부족으로 폐교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삼차구 소학교는 지금 학생 수가 323명으로 줄어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00∼700명에 달하던 학교였다. 다른 학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학생 수를 보면 장정소학교 17명, 하북 79명, 오성 90명, 동방홍 48명 등이다.

쓰러져가는 민족 교육을 보다 못한 삼차구진 주민들은 지난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주민들은 5개로 흩어진 조선족 소학교 학생을 모두 모아 통합 소학교를 만들고, 최신 교사와 학습 기자재를 구비해 경쟁력 있는 소학교로 키우자는 데 합의했다. 4층짜리 교사를 짓는 데 필요한 돈은 인민폐 260만 위안[元·약 3억 4,000 만원] 정도. 시골에서 이런 큰돈을 모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삼차구 주민들은 지난해 10월부터 눈물겨운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월급이 500∼1,000위안에 불과한 공무원들도 직위에 따라 자기 월급보다 많은 돈을 냈다. 주민들은 한 사람당 60위안씩을 내기로 하고, 한 톨의 쌀이라도 더 팔아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아이들도 코 묻은 용돈을 털었고, 주변 한족들도 힘을 보탰다. 여기에다 촌(村) 예산과 현(縣)정부의 지원, 성(省) 교육예산의 지원 등을 합쳐 주민들이 모은 돈은 130만 위안. 시골에서 이 정도의 돈을 모은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문제는 올 8월이면 기존 학교를 모두 폐교하고 신축교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예산 부족으로 공사 진척이 느리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재관(高在觀)삼차구진 진장(鎭長)과 김동철(金東哲)목단강시 교육위 주임은 지난해 11월 북경(北京)의 국무원 민족 사무 위원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조선족에게만 특혜를 줄 수는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삼차구 주민들은 올 봄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2차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같은 지역의 한족 학교는 학생 수가 그대로 유지되는 데 비해, 유독 조선족 소학교만이 학생 수가 줄어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농촌에 거주하는 한인[조선족]들이 도시나 해외로 떠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원인은 한인[조선족]들의 출생률이 낮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로는 개혁개방 이후 팽배해진 중국 사회의 배금주의 풍토와 한인[조선족] 사회의 상대적인 소득 격차를 꼽을 수 있다.

실태 파악을 위해 휘남현매하구시 지방 정부와 민족 사무 위원회 관계자들의 협조로 관내 몇몇 학교를 둘러보고 나서 소학교와 초중 및 고중 교장 7명을 조양진 휘남빈관(輝南賓館) 회의실에 초청해 조선족 민족교육의 실태와 대책에 대해 들어보았다. 교육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다[중국 정부 소수 민족 정책에 비판적인 일부 교장의 발언 등을 고려해 이들을 익명으로 처리했다].

이농현상과 낮은 출생률이 근본 원인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문화수준 차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교육 제도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보면, 우선 조선족 학생은 한족보다 유치원부터 고중 과정까지 1개 과목[조선 어문]을 더 수업해야 한다. 이를 시간으로 따지면 한족보다 1년을 더 배우는 셈이다. 교원 자질 문제도 있다. 자질이 우수한 대학 졸업자[조선족]들이 수입이 높은 일본과 한국 등 해외나 본토의 임해(臨海) 지역으로 진출해 교원 수준이 저하돼 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민족 정책에도 문제가 있다. 한족에 비해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 그래서 조선족들 가운데 아이를 한족 학교에 보내는 가정이 늘고 있다.”[이교장·매하구시]

“주은래(朱恩來) 총리 시절에 중국 공산당에서 조선족 어문은 북조선[북한] 어문을 따르라는 지시를 했다. 그래서 조선족 어문은 평양말과 비슷하고 서울말과 차이가 크다. 조선족 소학·중학교의 조선 어문 교원 합격자는 평양어 중심의 어문을 수학했고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외래어가 많은 서울말을 잘 모른다. 거기다 교원 대우가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어 교원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조선어를 배운 한족 교원들이 조선족 학교에 들어와 있다. 특히 영어나 컴퓨터 과목의 조선족 교원이 부족하다.”[문교장·통화시]

“예전에는 조선족 교육 수준이 한족보다 우월했다. 지난 60년대 주은래 총리는 ‘56개 민족 가운데 조선족 문화 수준이 최고’라고 말했다. 지금은 뒤떨어졌다. 그 원인은 우선 교원 대우 저하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 어문 교원은 찾기가 어렵다. 연변대 한인[조선족] 졸업생들은 교원보다는 연해(沿海) 지구 한국 기업을 선호한다. 영어 교원도 없다. 개혁개방 이후 영어가 중요해졌지만 한인[조선족]의 경우 중국어와 조선어 2개를 배워야 해 한족들에 비해 영어 배우기가 어렵다. 우리 학교 영어 교원 8명 가운데 1명만 한인[조선족]이고 나머지는 한족 교원이다.”[김교장·유화현]

“우리 학교 대학 진학률은 75%가 넘는다. 진학률이 높아야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지, 낮으면 한족 학교로 보낼 것이다. 예전에 도 제2중이 진학률이 낮자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한족 학교인 5중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한족 학교 우수생 중에는 한인[조선족]이 많다. 그러나 한족 학교에서는 조선 어문 과목을 안 가르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조선어를 잘 모른다. 우리 학교도 앞으로 수년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이번 학기 3월 초 고중 3학년 학생 가운데 21명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중 절반은 학업 저하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해진 탓이고 나머지 절반은 가계가 곤란해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그만둔 것이다.”[방교장·매하구시]

“대학 졸업자들이 외국기업을 선호하는 현상은 중국에서도 논란 거리다. 조선족도 돈벌이만 찾지 말고 연구·문화 기관에 많이 진출해야 한다. 또 우리 조선족 학생들은 대학 진학률은 높지만 실력이나 성취도는 낮게 평가 받고 있다. 실제 능력이 떨어지면 졸업해도 출로가 없다. 조선족도 대학 진학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직업·전문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림교장·통화시]

“재외 동포의 지위는 모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과 조선[북한]이 경제 면에서 발전하면 중국 내 조선족의 지위도 높아진다. 한국이 발전 했기에 조선족도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방안 중 하나는 한국의 사립 학교들과 자매 결연을 하는 것이다. 또 민족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문화의 발전이 중요하다. 그중에서 민족 언어가 중심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조선 어문 출판물 수요가 적고 교재 비용이 높아 민족 출판물의 제한이 크다. 따라서 한국에서 ‘조선족 학교 도서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 [최교장·휘남현]

교육 관계자들도 인정하고 있지만 한인[조선족] 동포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대도시로 나가는 것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되어버렸다. 현재의 중국 조선족 공동체는 지난 70년대 산업화와 함께 불어 닥친 급격한 이농 현상으로 아이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없던 한국의 농촌을 시공간(時空間) 을 거슬러 그대로 옮겨다 놓은 느낌이다. 북경과 상해(上海), 천진(天津), 대련(大連), 청도(靑島) 등 대도시에는 고향을 떠나온 한인[조선족] 남녀가 넘친다. 그중에서 대학을 나오고 능력 있는 인재들은 한국의 대기업이나 무역회사 등에서 일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대부분 가라오케나 술집·식당·사우나·안마소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황유복(黃有福) 교수[북경 중앙 민족 대학 민족 학과·256쪽 관련 기사 참조]는 오래 전부터 한인 이민사와 민족 교육 문제를 연구해온 대표적 권위자다. 황교수에 따르면 현재의 한인[조선족] 민족 교육의 위기는 80년대 개혁개방 이후 특히 92년 한·중 수교 이후 경험한 미증유의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문화 혁명 이전까지 대학교육과 직업 분배[정부의 직장 배정]를 통해 대도시로 진출한 한인[조선족] 인구는 35%나 된다. 황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과 같은 존재”

“조선족은 56개 민족이 사는 다민족 사회인 중국에서 문화·교육·예술·위생·생활의 질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발전해왔다. 특히 남다른 교육열을 가진 조선족 사회는 교육을 통한 발전으로 35% 정도의 인구가 문혁 전까지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업 분배를 통해 대부분 도시에 취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 진출은 서서히 이뤄졌기 때문에 이들은 농촌 전통사회의 모델을 그대로 유지해왔다. 즉 이들은 농촌에서 전통 가정의 문화 교육을 받고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고중까지 졸업한 상태에서 도시로 진출했고, 또 이미 도시에 진출한 한인[조선족] 남녀끼리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농촌에 있는 부모들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족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 한·중 수교 이후 한인[조선족] 사회는 ‘농업 민족에서 산업 민족으로’의 변화 혹은 ‘농업 민족에서 비농업 민족으로’의 발전 이라는 미증유의 사회 변화를 경험하면서 농촌이 급격히 붕괴되고 농촌의 부모와 도시의 자식들을 잇는 유대 관계도 깨져버렸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인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살아온 농촌이 붕괴했다는 것은 한인[조선족]이 원래 갖고 있던 ‘민족의 문화 영토’를 상실하고 대도시로 흘러들어가 흩어져버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단일민족 사회지만 중국은 56개 민족 13억에 육박하는 인구가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다[이 가운데 한족을 제외한 소수 민족은 1억 명이 채 안 되는 9,000여 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런 사회에서 200만 명도 안 되는 한인[조선족]들이 농촌 공동체에서 도시로 흩어지는 것은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그동안 한인[조선족]이 누려온 교육에서의 우위다. 예전에는 한인[조선족] 공동체마다 조선족 소학교와 초중·고중 까지 있어서 대학 진학 전까지 민족 언어와 문화를 배웠지만 이제는 학생이 없어 학교 문을 닫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흑룡강성을 대상으로 한 황교수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소학교는 90년 382개에서 97년 현재 51개로 80%나 감소했다. 또 중학교는 90년 77개교에서 역시 15개교만 남고 다 폐교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를 따라 도시로 진출한 아이들의 교육 환경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만주지역의 큰 도시에는 조선족 학교들이 그대로 있지만 그 수용 비율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 90%는 한족 학교에 갈 수밖에 없고 이들은 자연히 중국화라는 동화 과정을 겪게 된다. 황교수에 따르면, 북경의 경우 90년에 7000명쯤이던 한인[조선족] 인구가 현재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농촌에서 상경한 이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농촌의 민족 학교를 다니다 대도시의 한족 학교를 다니는 급격한 변화[동화]를 겪게 된다.

민족 교육을 무너뜨리고 동화를 부추기는 둘째 원인으로 황교수는 한·중 수교 이후 급격히 늘어난 한인[조선족]과 한국민의 교섭[교류]을 꼽는다. 중국의 개혁개방 물결을 타고 가장 으뜸가는 교육·문화 수준 그리고 삶의 질을 누려온 한인[조선족]에게 한·중 수교와 교섭은 좀더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한인[조선족]들은 한국과 교섭하며 큰돈을 얻는 대신에 종래의 가치관을 잃어야 했다.

특히 자본주의 병폐인 한탕 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는 한인[조선족] 사회를 병들게 했다. 농촌에서 1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 번 소득이 한국에 가서 일해 번 수입의 10분의 1도 안 될 때, 한국에 와본 당사자건 그것을 부러워하는 주위 사람들이건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이다. 물론 상당수 한인[조선족]은 한국에서 번 돈으로 식당이나 가게를 차리거나 사업체를 벌이기도 하지만 흥청망청 탕진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한·중 수교 이후 관광·사업차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크게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대도시에서 한국인을 상대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한인[조선족]의 숫자도 늘어났다. 대학 졸업장이나 변변한 자격증 없이 대도시로 진출한 젊은이들이 갈 데는 대부분 유흥업소다. 한국 경제가 IMF[국제 통화 기금] 구제 금융 체제에 들어가기 이전만 해도, 북경 유흥 업소의 80% 이상을 한인[조선족]이 운영했다고 한다.[IMF 체제 이후에는 상당수 유흥 업소의 운영권이 한족에게 넘어갔다] 북경에서만도 퇴폐 유흥 업소에서 종사하는 한인[조선족] 여성은 7,000명이 넘고, 전국적으로는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조선족 농촌총각들 장가들기는 ‘기적’

한국이나 중국이나 특별한 기술 없이 몸으로 돈 벌기는 아무래도 여자가 유리하다. 또 ‘코리안 드림’을 품고 몰려온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사회 문제가 되는 가운데 한인[조선족]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한국에 오기가 쉬운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한국행 티켓은 위장이건 진짜건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9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도 장가 못 드는 농촌 노총각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어 연변 한인[조선족] 처녀를 신부감으로 ‘수입’하는 것이 자연스레 논의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위장 결혼이건 합법 결혼이건 한국으로 시집온 한인[조선족] 여자의 수는 1993년 1,463명, 1994년 1,995명, 1995년 7,693명으로 늘다가, 1996년부터는 1만 명을 넘어섰다. 현재 한국인과 결혼한 한인[조선족] 여자는 7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 적령기인 20∼30세 한인[조선족] 여성은 20만 명으로 추계되고 있다. 그 가운데 7만 명이 한국으로 ‘시집’왔다는 것은 중국에서 아들딸 낳아 한인[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야 할 한인[조선족]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에 와 있다는 말이다. 또 중국에 남아 있는 한인[조선족] 여성의 상당수는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대도시의 유흥업소에서 일하거나 한국인 현지처로 생활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 돈벌이도 시원찮고 ‘별 볼 일 없는’ 한인[조선족] 농촌 총각이 장가드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한인[조선족] 인구[46만 명]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는 흑룡강성의 경우, 30세가 넘어도 장가를 못든 노총각의 수가 20∼30명씩 되는 조선족 부락(村)이 적지 않아 성(省) 전체의 30세 이상 노총각 수는 1만여 명이나 된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지만 도무지 여자 구경을 못 하는 노총각들이 ‘뽕’을 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족 교육과 공동체의 위기를 부채질하는 중요한 요인인 한인[조선족]의 출생률 저하는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로 인해 중국 한인[조선족] 인구는 5년 전부터 급강하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물론 한인[조선족]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한국이나 대도시로 떠나 가임(可妊) 연령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그 첫째이고, 둘째는 한인[조선족] 동포들 사이에도 자녀를 적게 낳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계획생육(計劃生育)[가족 계획]을 강력히 시행해왔다. 그 덕분에 지난 10년간 중국의 출산율은 2% 이하를 유지해 왔다. 이는 중국 인구가 더 이상 급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과 인민들의 경제 중시 풍조의 영향으로, 중국 서남 지방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부에서 아이를 둘씩 낳으라고 장려해도 하나 이상은 안 낳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문제는 한인[조선족] 사회의 경우 이런 경향이 더 짙다는 점이다.

산아 제한을 강제하는 중국에서는 정부가 마을마다 1년에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를 지정해준다. 예를 들어 한족 마을에서는 금년에 50명을 낳으라고 하면 거의 60~70명을 낳고 있는데, 조선족 마을에서는 정책적으로 50명을 낳으라고 하는데도 한 명도 낳지 못한다. 농촌에는 아이를 낳을 여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한인[조선족] 인구가 이대로 갈 경우 10여 년 후에는 그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족 입시교육의 병폐도 한몫

민족 교육의 위기를 초래한 데는 한국과 비슷하게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조선족 교육의 병폐도 한몫하고 있다. 대개의 한인[조선족] 학부모들 은 자기 자식이 직업 학교를 선택하면 자기 낯이 깎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한인[조선족]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학업에 취미가 없고 소질이 없어 대학에 갈 수 없는데도 대학에 못 가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더라도 일단 고중에 가서 대학 시험에 응시해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족에 비해 특별한 기술이 없는 한인[조선족] 젊은이들은 중국에서 취직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황유복 교수의 지적이다.

“중국에서 가장 큰 한인[조선족] 노무 시장인 심양(瀋陽)시서탑 노력 시장을 조사한 적이 있다. 구직을 위해 거기 나온 중국인 젊은이들은 대개 한 번 나오면 거의 반나절 만에 취직이 된다. 하다 못해 주방장 자격이나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인[조선족] 청년들에게 어떤 기술이 있냐고 물어보면 기껏해야 고중 졸업장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여자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도시에 나오면 취직이 되지만 남자들은 여러 번 노무시장에 나와도 취직이 어렵다. 결국 시골에 눌러앉은 청년들은 또래 여자들이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만 퍼마시거나 노름에 빠지게 된다. 도시로 흘러 들어온 청년들은 깡패 조직을 만들어 대부분 한인[조선족]이 운영하는 유흥업소를 장악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동족에 기생하는 짓이며 그 과정에 피해를 보는 한국인도 상당수 있다.”

개혁개방 초기만 해도 한인[조선족]은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 소득 수준이 최상위에 속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식료품이나 김치장사로 성공하는 사례가 많았다. 현재도 연변의 김치 전문 생산업 체인 코리아 식품 공사에서 생산하는 김치는 북경·상해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일본에 까지 수출하는 인기 품목이다. 일부 성공한 사업가들은 산업 자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한인[조선족] 소득 수준은 최하위다.

사실 앞서의 길림성 통화지구 및 흑룡강성 삼차구진의 사례는 중국 내 200만 조선족 동포들이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한인[조선족]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에서부터 조선족 사회의 해체 위기, 민족 교육과 민족 언어·문화의 상실 위기, 민족 경제의 위기 등이 겹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와 관련 현재 한인[조선족] 지성인 사회에서는 ‘우리 힘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자’는 것이 가장 큰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 힘’은 중국 정부나 한국의 지원이 아닌 ‘조선족의 힘’을 지칭한다.

참고문헌
  • 연변 통보 (http://www.yanbianews.com/bbs/zboard.php?id=discussion&no=4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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