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民族 映畵와 演劇의 舞臺 空間 속에 살아있는 廣闊한 滿洲 벌판의 記憶들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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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 연극계(극작가들과 연출가들)는 중국 동북 3성으로의 이주를 권유하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만주로의 이주를 권장하는 희곡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은 타율적인 작업이었지만, 1940년대에 들어서서도 위축되지 않고 일정 부분 이어졌다. 그러다가 「빙화」 같은 주목되는 작품을 산출하기도 했다. 본 항목은 이러한 작품들을 모아서, 1930~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연극 무대 위에서 재현된 만주 벌판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한국 연극 속에서 만주 벌판(흑룡강성)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이러한 표현을 실제로 찾아 만주의 어떠한 점을 기억하고자 했는가를 찾고자 한다.
고협에서 발표한 임선규의 두 번째 작품은 「빙화」였다. 이 작품은 제 1회 연극경연대회 고협 참가작이기도 했다. 임선규 작, 전창근 연출, 김정환 장치의 「빙화」는 1942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간 부민관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참가 극단은 성군, 아랑, 현대극장, 고협, 청춘좌로 모두 5개였다. 주목되는 것은 임선규가 고협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활동했던 아랑은 김태진 작 「행복의 계시」를 출품했다는 점이다. 임선규의 데뷔작 「동백꽃 피는 마을」을 연출했던 안영일이 연출한 작품이었다. 이 연극경연대회에서 「빙화」에 출연했던 박학이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
당시 연극경연대회의 심사 후기를 보면, 제 1회 연극경연대회의 최고상인 총독상을 극단 고협과 극단 아랑에게 공동 수여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극단 고협이 「가두」나 「동백꽃 피는 마을」 등을 가지고 당대 시국 아래에서 민심의 지도에 노력해온 공로를 인정하고 이번 공연에서도 작품에서 조선의 국민 연극의 일(一)을 보인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辛島 驍의 관점에서 보면 「빙화」 역시 친일 목적성을 담보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1942년 12월 30일에 열린 실제 시상에서는 단체상이 빠져 있다. 극단 고협도 극단 아랑도 단체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극단 아랑의 「행복의 계시」도 그러했지만, 극단 고협의 「빙화」 역시 국민 연극이 지녀야 할 친일 목적성에는 크게 미달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의심할 수 있다.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빙화」 역시 초연된 이래 여러 차례 재공연되었다. 특히 1943년에는 4월(동양극장), 6월(금천대좌), 9월(남선순연), 12월(경기, 강원도 일대), 그리고 1944년 1월(금천대좌)로 이어지는 폭발적인 재공연이 이루어졌다. 1942년 10월 초연 이후, 1943년 한 해 동안 고협은 「빙화」를 집중적으로 공연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대중들이 친일 목적성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국민 연극 작품을 이 정도로 선호할 수 있었을까. 당시 관중들은 국민 연극을 선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이 과정에서 「빙화」의 규모는 자주 변동되었다. 처음에는 4막 7장의 규모였지만, 이후 5막 6장으로 확대되기도 했고, 대부분 4막 6~7장 규모를 지켰으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3막 9장으로 재편되기도 했다. 현재 대본이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대본은 4막 7경의 형태이다(1막은 1개의 경으로, 2막은 2개의 경으로, 3막은 3개의 경으로, 그리고 4막은 1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합치면 ‘7경’이고, 과거의 표기로는 ‘7막’이었을 것이다). 막과 장의 변화는 친일·어용정책이 들어 있는 막과 장을 감추거나 약화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일 수도 있다.
양승국은 「빙화」가 조선의 정체성 혹은 조선의 정서를 환기하여 강한 민족적 동류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 작품이었기에, 대중들이 이 작품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김옥란은 이 작품의 주인공 박영철이 일제의 ‘비국민’에서 일제 체제 하에 순응하는 ‘국민’으로의 인성 개조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정세에 ‘회의적인 지식인’을 남으면서 끝까지 소련(공산주의)에 대한 ‘이상’과 ‘동경’을 보여주었다고 밝히면서, 다른 국민 연극 작품과는 다른 이중의 전략을 담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이승희 역시 희곡 「빙화」에 담긴 세 가지 의도(‘전략’)를 분석하면서, 「빙화」가 당시 일제의 검열로 인해 ‘국민 연극’의 체제를 따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불온한 침묵’을 통해 국민 연극이 강요하는 역사인식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관객들에게 ‘주정(主情)’의 세계를 보여주어 관객들로 하여금 역사적·문화적 공동체로서의 기억을 일깨운다고 하였다. 국민 연극의 체제는 분명 친일극의 성격을 지니지만, ‘불온한 침묵’과 ‘주정’의 정조를 통해 조선인의 정서와 역사인식을 자극하는 면모를 지녔다고 주장한 것이다.
양승국과 김옥란 그리고 이승희가 분석하는 「빙화」는, 겉으로는 국민 연극의 체제와 이념에 동조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임선규가 멜로 드라마의 속성을 통해 일깨우고자 했던 민족적·문화적·정서적·역사적 동류의식 역시 담겨 있는 텍스트였다. 그들의 주장을 감안한다면, 당대의 관객들은 「빙화」를 통해 실종된 조선의 정서와 기억 그리고 역사 인식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1930년대 연극을 통해 향유했던 민족적 동류의식을 1940년대의 가혹한 현실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공연 평을 보면 「빙화」가 제 1회 연극경연대회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의기(意氣)는 놀라웠다. 작품의 스케일도 컷고 테마도 웅장(雄壯)했다. 그리고 연기진의 총력적 전의(戰意)는 대회장을 압도했다. 박수갈채―관중의 환호―탐정소설적인 긴장―고협의 의기와 아울러 민중의 호응도 병행(竝行)되었다. 그러나 건축재료의 질악(質惡)으로 말미암아 드디여 큰집이 무너지고 말었다. 큰집을 건축할만한 장공(匠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계도의 결함(缺陷)이 컷기 때문에 붕괴된 것이다. 「빙화」는 작가 자신이 변호한 것처럼 멜로드라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빙화」를 보고 멜로드라마의 개념을 재파악하지 않으면 안된 표분(表憤)을 느꼈다. 의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제전의 의의를 소원(疎遠)히 한 것은 작가의 약점인 것 같다.
김건의 평은 공연(평) 이면에 담긴 작가의 의도 혹은 이 작품의 숨겨진 특성을 읽게 유도한다. 왜냐하면 김건의 평은 임선규가 고의로 국민 연극이 아닌 애매한 장르의 멜로드라마를 추구했다는 의구심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임선규는 실제 이 작품의 작의에서 ‘사실주의’ 작품이 아닌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에 맞게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 남아 있는 대본을 보면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의 요소를 상당 부분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공연의 평자는 작품 「빙화」를 보면서 멜로드라마의 개념과 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 이유를 연극경연대회의 취지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표면적으로 적어도 「빙화」는 국민 연극의 목표를 따르도록 강요된 연극경연대회 출품작이지만, 실제로는 그 의도를 배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여 흥미를 제고하는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와는 달리 그 이상의 목적을 숨기고 있는 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다.
전력으로 보면, 임선규는 동양극장 시절 「수풍령」으로 일제의 검열에 걸려 고초를 당한 바 있다. 또 아랑 극작 시절에는 문제작 「동학당」을 집필하면서 민중 봉기라는 내용으로 인해 일제의 검열을 걱정하거나, 진지한 작품 내용으로 인해 저조한 흥행의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선규는 과감하게 「수풍령」의 집필을 추진했고, 「동학당」이 안고 있었던 흥행 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러한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임선규는 「빙화」에 도사린 위험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는 지나치게 진지한 역사의식을 담아내거나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요소를 삽입할 경우,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관객들이 익숙한 멜로 드라마의 형식으로 소재를 풀어나가되,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할 만큼의 친일적 요소를 삽입하는 교묘한 대처 방법을 선택했을 가능성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당대의 이념인 국민 연극을 지지하는 비평가는(예를 들면 김건), 이러한 교묘한 극작술에 대해 오히려 결격 사유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빙화」는 다른 제반 측면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작품이 되었지만, 유독 연극경연대회의 취지만큼은 제대로 살리지 못한 작품으로 평가 절하된 것이다. 반대로 관객들은 연호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국민 연극이되 속으로는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농도 짙게 포함하고 있고, 형식적으로는 멜로드라마라는 익숙한 장르적 특징을 따르지만 작가 의식의 측면에서는 식민치하 고난과 울분을 토로하는 저항의식을 농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연극 시기 유치진은 주인공의 수난과 애정문제를 조화시켜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흑룡강˃은 ‘수난의 구조를 이용하여 관객들의 정서적 동화를 유도하고, 일본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민족협화라는 일제의 정책 이념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성천과 연이, 장거강과 동월의 사랑 이야기가 중요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대추나무˃ 또한 만주 이주라는 문제를 선전하면서도, 동욱과 유희의 애정문제를 표면에 드러내고, 모든 갈등이 만주라는 기회의 땅이 부각되면서 해결되도록 하고 있다. 유치진은 애정문제를 충분히 활용하여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 이면에 작가의 의도, 즉 교훈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교화적 대중성의 방식을 지속시키고 있다. 애정문제를 표면에 두고, 이면에 작가의 의도를 배치하는 방식은 35년 이후부터 유치진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유치진은 표면적으로는 애정문제를 보여주면서 그 이면에 그들의 애정 상황이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원인으로 현실의 문제를 배치하여 관객들의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도록 의도하였다. 애정이야기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늘 보아오던 것 같은 익숙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지만, 애정문제의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적 현실을 포착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국민 연극 시기의 작품에도 일관 되게 나타난다. ‘반도 민중이 일한병합을 여하니 열망’하였으며, 또 ‘일한병합이 무력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고, 반도 민중의 자발적 열망을 일본이 용인한 것이라는’ 관객들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다루면서도 ‘국기를 내두르거나 군가를 합창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다는 순수한 의지를 가진 청년남녀의 신념과 애정갈등을 표면에 두고 이면에 그들을 신뢰하고 돕는 역할로 이용구와 일진회를 두어 거부감을 줄이면서 내선일체의 의도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