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歷史의 뒤안길로 거뭇거뭇 사라져, 이제는 痕迹조차 가물가물한 黑龍江省 옛 劇場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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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흑룡강성 |
| 시대 | 현대/현대 |
연변의 한인 연극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우리 연극의 일부였다. 1930년대 대중 극단들은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서선[조선의 서쪽, 지금의 황해도, 평안도 지방] 공연을 하다가 만주에서도 공연을 하였다.
‘조선 연극사’와 ‘호화선’ 등이 만주에서 공연을 한 대표적인 단체였다. 극단 ‘고협’도 만주에서 「춘향전」을 공연한 기록이 남아 있다.
만주 지역에도 일찍부터 극장이 존재했는데, 봉천(奉天)(지금의 심양(瀋陽))의 부사 극장을 비롯하여 목단강 극장, 동안 만영관, 난영 만영관, 임구 극장, 도문 극장, 용정 만영관, 길림 공회당, 신경 기념 공회당 등이 이러한 극장들이다.
조선의 대중 극단들은 북선 순회 공연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극장들을 겨냥하여 만주 지역 해외 공연도 단행한 바 있다. 1937년 만주 사변 이후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만주 일대는 한인들이 대거 거주하는 지역으로 조선의 콘텐츠가 그 유효성을 발휘하는 지역이었다.
흑룡강성에는 많은 극장들이 존재했었다. 하얼빈에는 오리안트극장[オリアント劇場], 평안좌(平安座), 하얼빈 회관(哈爾賓會館), 아지아극장[アジア劇場], 대승 극장(大勝劇場), 모데른 극장[モデルン劇場], 공인 문화궁[公人 文化宮] 등이 있었고, 목단강시에는 목단강 극장(牧丹江劇場), 동만 영화 극장(東滿映畵劇場), 오마이 문화 뉴스 영화 회관[大每文化ニュ, ス映畵會館], 문화궁(文化宮) 등이 있었다.
이러한 극장들은 일제 시대에 건립된 것도 있고, 중국 국가 수립 이후에 건립된 것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것도 있고, 문헌에만 그 흔적을 남겨둔 것도 있다.
이 글은 이 극장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여행하는 기록이다. 이 여행은 비단 물리적인 의미의 여행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정이며 동시에 역사적인 여정이기도 하다. 실제 하얼빈시와 목단강시를 탐방하고 그 옛 극장의 자취를 찾는 답사 활동을 하여 민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보여주는 정신적인 기록을 담아낼 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순회 공연을 펼쳤던 1930년대 대중 극단 중 대표적인 극단 신무대를 통해, 평양 금천대좌의 상징적·지리적·실질적 역할에 대해 실증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신무대는 단성사 신축을 기화로, 1934년 5월 12일 밤부터 평양을 기점으로 하는 북서선 공연을 단행했다. 평양→진남포→사리원→해주→연안을 거쳐 인천 애관으로 남하하는 전형적인 북서선 순회 공연 루트였다. 이러한 북서선 공연의 출발점으로서 평양 금천대좌는 1930년대 전반 대중 극단의 전형적인 순회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신무대는 금천대좌 공연을 1934년 5월 12일부터 4일동안 시행했고, 당시 상연 예제는 무려 9편에 달했다. 편의상 번호를 붙여 상연 예제를 열거해 보면, 1. 모성비극 「조선의 어머니」(4막), 2. 재판극 「마담X」(4막), 3. 시대극 「호천비혼(呼天悲魂)」(2막), 4. 레뷰 「학생가(街)」(전12장), 5. 가정비극 「엇던여자의일생」(2막), 6. 문예극 「최후의 심판」(3막), 7. 화류비극 「문허진순정」(2막), 8. 비극 「사랑은 눈물」(2막), 9. 양극 「북극의 애상곡」(1막)이었다.
평양 금천대좌 공연이 시작된 시점부터, 신무대는 5기(단성사 신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무대는 단성사 신축으로 장기간 지방 순회공연을 떠나야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평양부터 시작되는 서선 공연을 선택하였다. 더구나 신무대가 레퍼토리로 삼는 작품들을 총동원하여 시작된 지방 순회공연이라는 점에서, 이 평양 금천대좌 공연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평양의 금천대좌는 새로운 계기를 요구하는 신무대에게 제 2의 거점이자, 상징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신무대의 이 북서선 순회 공연은 인천 애관을 거쳐 수원, 천안, 청주, 논산, 강경, 이리, 군산, 전주, 광주, 목포로 이어지는 남서선 공연으로 이어졌고, 다시 김제, 이리를 돌아 대구, 김천, 인천을 거쳐 경성으로 돌아오는 남선 공연 루트의 일부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북서선, 남서선, 남선 공연을 두루 관통하는 복잡하고 긴 공연 루트였다고 하겠다.
1934년 5월 12일 금천대좌에서 시작한 이 순회공연은 1934년 8월 18일 인천 흑룡관을 마지막 순회공연 장소로 상정하고 있으며, 1934년 8월 24일 입경(入京)하여 조선극장에서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긴 루트와 복잡한 일정을 지닌 순회공연은 당시로서도 좀처럼 찾기 힘든 사례에 속한다. 아마도 단성사가 신축이 아니었으면, 신무대도 힘들었을 지방 순연이었을 것이다.
한편 평양은 특별한 행사를 위한 지방 순연처로 종종 이용되었다. 조선 연극사가 구정 공연을 평양에서 실시한 것도 좋은 예이다. 이번에는 신무대의 예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겠다. 신무대는 1934년 추석 공연을 위해 평양 금천대좌 공연을 시행했다. 이 순회 공연은 1934년 9월 21일부터 시작된 추석 흥행을 노린 추기(秋期) 공연의 일환이었다. 일단 신무대는 1934년 9월 6일까지 조선 극장 공연을 마치고, ‘개성’과 ‘연안’ 그리고 ‘해주’를 거쳐 북상하는 서선 공연을 시행했다. 이러한 일정을 거쳐 1934년 9월 21일 평양 금천 대좌 공연에 이르게 되는데, 21일 공연은 추석 기념 공연이기도 했다. 1934년 9월 신무대의 서선공연은 평양에서 ‘추석 대흥행’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전에 계획된 루트였다고 할 것이다.
신무대는 평양 금천대좌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심지어는 그 다음 공연 장소로 예고되었던 정주 순회 공연을 앞두고 잠시간의 휴식 기간 동안, 신무대는 봉천과 신경(新京) 지역으로의 국경 밖 공연을 예고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봉천과 신경 공연이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고 계획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1934년 10월 6일부터 시작되는 북선 공연 루트를 분석하면, 신무대는 9월 21일 추석 공연 이후 평양에 머물렀다고 판단해야 한다. 이 북선 공연에서 봉천이 경유지로 다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신무대는 9월 공연으로 추석 전날 평양 공연을 기획하면서 이 날짜에 맞추어 북상할 수 있는 순회 공연 루트(개성→연안→해주)를 찾았고, 안정적으로 이 일정을 소화하자 평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만주 지역으로의 국경 바깥 공연도 고려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다시 재개된 북선 공연에 흡수되면서 자연스럽게 무마되었지만, 그만큼 평양 금천대좌는 특별한 날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었고 국경 바깥으로의 순회 공연을 준비할 수 있는 거점 공간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했다고 하겠다. 전술한 대로 ‘추석 대흥행’으로서의 9월 평양 금천대좌 공연 이후, 신무대는 정주→신의주→안동현→봉천→신의주→선천→정주를 거쳐 평양으로 돌아오는 북선 공연을 재개했다. 여기서도 평양 금천대좌는 다시 북선 루트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평양 금천대좌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추석 공연이 일단락되었지만 추기(秋期) 공연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북선 공연의 출발지였던 평양 금천대좌는 다시 서선 공연으로 전환하기 위한 중간 경유지로 변경되었다.
결국 북서선 공연에서 귀착지였던 평양 금천대좌는, 진남포→사리원→개성으로 다시 하행하는 신무대 서선공연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신무대의 서선과 북선 공연은 평양의 금천대좌를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었고, 동시에 금천대좌는 새로운 공연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돕는 중간 기착지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양은 서선과 북선이 만나는 교차지역이었고, 상행 루트의 최대 수요처이자 하행 루트를 위한 최적의 출발지였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평양의 금천대좌는 1930년대 대중극단이 시행하는 서선 공연의 최대 수요처이자, 북선 공연의 경유지였고, 북선과 서선을 잇는 전환점이었으며, 경성으로 하행하는 서선 루트의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평양의 금천대좌는 극단이 머물면서 서선과 북선 혹은 국경 바깥으로의 출행을 결정하고 예비하는 거점 공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금천대좌의 역할을 정리하다 보면, 한 가지 중대한 의문점이 생겨난다. 그것은 평양 금천대좌의 관객 동원 능력이다. 객석의 크기야 1400석 이상이었겠지만, 이러한 객석을 얼마나 채울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934년 추석 공연을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는 추기 공연을 위해 신무대는 평양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머물렀다. 1934년 9월 21일 ‘추석 대흥행’으로 보낸 공연일도 상당했는데, 만일 이 기간 동안 국경 바깥으로 출행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무려 보름 이상(1934년 10월 5일까지)을 공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북선공연 이후 평양에서 1934년 11월 1일부터 5일까지 재공연에 돌입했다. 대략 20일 가까운 시간을 평양에서 공연한 셈이다.
그렇다면 평양의 금천대좌는 대단한 관객 동원력(객석 점유율)을 지닌 극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34년 신무대의 북선 공연은 대단히 성황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문 지역마다 공연 일정이 늘어났고, 그 중 정주는 두 번이나 공연지로 선택되었는데 그때마다 만원사례가 일어났다. 이러한 인기는 신무대의 레퍼토리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북 지역에 문화적 향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서 평양과 서북선 그리고 국경 바깥의 만주 일대는 경성 중심의 문화적 영향력이 제약을 받던 지역이었다. 인접한 국경으로 인해 검열 제도도 강화되었고, 문화적 인프라도 타지역에 비해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평양에서 신무대의 공연이 장시간 가능할 수 있었다. 금천 대좌는 이러한 북서선 일대의 지방 순연에서 안정된 거점을 제공하는 극단이었다.
여기서 당시 대중극단이 평양 금천대좌를 인식하는 하나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은 서북의 정치, 경제, 인구, 지리의 중심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효 관객과 잠재 고객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꿔 말하면, 공연 주체로서는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실험하고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공연지 중 하나였던 것이다.
고협의 경우처럼, 평양은 일단 서선과 북선 공연의 중점 도시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어느 극단이나 평양을 빼놓고 서북 순회 공연 루트를 구상할 수 없었다. 다만 아랑은 평양 공연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한 단계 더 진전된 전략을 드러내고 있다.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공연이 1943년 1월 1일~3일까지 평양 금천대좌에서 공연된 김승구 작, 안영일 연출, 김일영 장치의 「화전지대」(4막 6장)였다.
이 금천대좌 공연은 1월 4일부터 이어지는 서선공연의 시발점이 되었다. 우선 이 작품의 공연 경로를 살펴보면, 평양(1~3일)→서선 일대(4~12일)→개성(13~14일)→인천 애관(15~16일)→수원(17일)→예산(18~19일)로 이어지는 일정을 따르고 있다. 이 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물론 ‘평양’이다. 아랑은 평양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중부 지방까지 내려가는 루트를 개척하였다.
이러한 순회 공연 루트는 과거 평양 연행로와 일치한다. 서울을 떠난 연행 사절은 개성과 황주를 거쳐 중화(中和)를 지나 평양에 입성하는 연행로를 따라 이동했다. 아랑의 순회 공연 루트는 개성과 황주를 중요한 경유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루트의 변형이다. 평양과 개성을 잇는 루트는 그만큼 보편화된 루트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루트를 따라 아랑은 평양에서 중부 지방으로 내려오는 귀경 공연을 펼친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루트가 1월 22~23일 천안 공연을 기점으로 다시 북상하는 루트로 변하면서, 해주→연안→진남포(중악관)→황주→사리원(공악관)으로 이어지는 북서선 공연이 재개된다는 점이다. 북서선 지역을 두 개의 루트로 왕복하면서 공연 활동 반경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이 공연 루트는 함흥으로 이어지면서 동북순연의 성격까지 띠게 된다.
이러한 루트는 서선, 남선, 북선의 루트가 결합된 독특한 것이었지만, 아랑은 이러한 독창적이고 복잡한 루트를 감수했다. 문제는 이러한 루트 속에서 평양 금천대좌의 역할이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3년 1월 1일 이전 공연 양상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아랑은 1942년 10월부터 남선순연을 떠났고, 11월에는 특별 서선순연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때의 상연 작품은 김태진 작 안영일 연출의 「행복의 계시」(4막 8장)였는데, 그 특별 서선의 마지막 귀착지가 평양이었다.
물론 아랑은 1942년 12월 북선 공연을 예고했고, 이를 시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러한 공연 일정을 지키면서도 1943년 1월 1일 공연을 준비한 점이다. 남선→서선→북선을 연결하는 공연 일중 중에 김승구의 「화전지대」를 연습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신작 「화전지대」의 개막 공연을 개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선과 북선의 중심 지역을 다시 방문할 작품으로 「화전지대」를 선택했고, 이를 평양 금천대좌에서 개막하면서 문제점을 미리 검토했던 것이다.
아랑은 1942년 가을부터 남선, 서선, 북선을 통해 북부 지방에서 공연 루트를 따라 활동하다가, 1943년 연초부터 평양에서 새로운 작품 「화전지대」를 무대에 올렸다. 이러한 활동 경로를 보면, 아랑이 북부 지방에서 연습을 하고 공연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거점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역할을 평양의 금천대좌가 수행했다. 그것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선과 북선 공연의 일정이나, 평양에서의 개막을 통해 확인된다.
이미 고협에서 확인된 대로, 평양 금천대좌는 서북 지방의 관문이었고 극단의 거점이었다. 당시 관례상 대중극단의 지방공연은 관례화된 절차였고, 또 필수적인 활동 영역이었던 관계로, 주요 극단에게는 이러한 거점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령 서남 지역을 위해서는 인천의 애관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서선과 북선 공연을 위해서는 금천대좌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금천대좌는 서북 공연과 북선 공연을 위한 대중극단의 중심 극장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